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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기도와 수행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Joyfule 2023. 1. 20. 12:06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노년의 기도와 수행



실버타운에 묵으면서 노인들의 황혼을 본다. 지붕 위에 혼자 앉아있는 새처럼 외로워 보인다. 혼자 기울이는 소주잔의 반은 눈물인 것 같다. 그들의 세월이 기울어가는 그림자나 메마른 풀 같기도 하다. 그런 속에서도 인생 말년의 수많은 삽화가 펼쳐지는 것 같다. 실버타운건물의 지하에 운동기구들이 놓인 방이 있다. 그곳에 갔을 때였다. 눈이 부리부리한 한 노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런닝머신 위에서 걷고 있는데 그 노인이 다가와 주의를 주었다. ​

“여기서는 별개의 실내화를 신어야 해요.”​

“제 방에서 운동화를 바꿔 신고 왔습니다”​

헬스실의 앞에 있는 신발 보관함에 아직 나의 고정된 자리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대답에 노인은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거짓말 하는 사람을 많이 상대하며 산 것 같았다. 오랫동안 피의자를 신문해 온 사람의 눈빛 비슷했다. 조금 마음이 불편해진 내가 말했다.​

“제 방으로 가서 확인해 드릴까요? 못 믿는 표정이신데”​

“왜 안 믿겠어요?”​

그는 팔짱을 끼고 말하면서도 계속 의심하는 얼굴이었다.​

다음 날 나는 헬스실의 신발보관함 한 칸을 얻어 실내용 운동화를 가져다가 넣어두었다. 새로 산 검정색 운동화였다. 며칠이 흘렀다. 운동을 하러 들어가는데 그 영감이 나를 불러세우고 노골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왜 경고를 했는데도 바깥에서 신던 신발을 신고 그대로 헬스실로 들어옵니까? 내가 당신 밥 먹을 때 몰래 가서 살펴봤어요. 검정색 운동홥디다. 그것 말고 이런 걸 신고 들어 오시라 말입니다.”​

그가 자신이 신고 있는 운동화를 가리켰다. 젊어서 우리들이 흔히 신던 하얀색 운동화였다. 그의 고정관념에 운동화는 하얀색이라야 하는 것 같았다. 남을 지배하려는 성격 같았다. 그런 경우가 있더라도 실버타운 직원을 통해 간접적으로 시정하게 해야 하는 게 아닐까. ​

“잠깐 나를 따라오세요”​

직접 확인시켜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문 밖 신발 보관함에가서 갈아신은 내 야외운동화를 보여주었다. ​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가 바깥에서 신던 신발을 그대로 신고 들어왔나요? 그리고 왜 운동화는 하얀색이야만 하죠? 검정색을 신으면 안되나요?” ​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 몰래 밥 먹는 나의 발을 살폈다니 그의 전직이 뭔지 의심이 들었다. 그는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쟈베르 경감같이 그 후에도 나를 보는 눈길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젊은 시절 노인들을 보면 산전수전 다 겪고 신선같이 도가 통한 것 같이 보였다. 

그런데 막상 늙어보니까 노인사회도 젊어서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모든 게 불만투성이인 회색 인생이 있었고 늙어서도 화사한 분홍의 벛꽃 같은 삶도 있었다. 


대학 시절 영어로 된 원서만 읽었다고 자랑하는 노인도 봤다. 

늙어서 그런 과거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그 노인은 소리없이 외톨토리가 되는 것 같다. 

항상 밥을 혼자 먹었다. 음식들이 짜고 맵고 입에 맞는 게 하나도 없다면서 내게 불평을 늘어놓는 노인도 있었다. 

오랜 경력을 가진 요리사가 나름 정성을 들인 밥상이라는 생각이었다. 

노인이 되어 건강이 안 좋으면 음식 맛도 없어지는 것 같았다. 

쇠약해 가는 자신의 불만을 세상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찡그리고 불평불만의 노인들 얼굴에는 징그러운 벌레가 붙을 것 같기도 했다. 

그와 정 반대의 노인들도 있다. 

항상 생글생글 웃는 모습에 다른 사람의 작은 행위 하나에도 감사하면서 사는 분이 있다. 

그런 노인의 주변에서는 향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나와 친하게 된 의사 선생님은 구십이 다 된 나이에도 단정하게 양복을 입고 실버타운 진료실에서 주변 노인들의 건강을 살피고 있다. 무료로 하는 의료봉사였다. 

바다를 좋아해 오십년간 부산 바닷가에서 의원을 경영하다가 바다 색깔이 다른 동해로 왔다는 분이다. 

노 의사의 다음 행선지는 아름다운 수풀속의 실버타운이라고 했다. 

그렇게 황혼의 인생여행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

옆자리에서 밥을 먹는 연대장 출신과 비행기기장 출신의 칠십대 말 두 영감은 텃밭을 함께 가꾸고 마을에 가서 일을 도와준다. 

어제는 시골 교회에 가서 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주고 돌아왔다고 했다. 수고하고 얻어온 감을 내 방에 한 바가지 놓고 갔다. 

엘리베이터에서 건설회사 출신의 영감을 만났다. 

젊어서 부킹이 힘들 때 어울려 함께 쳐야 좋지 늙어서 혼자 하려니까 재미가 없어 못치겠다고 했다. 

그는 시골 주민센터에 등록을 하러 간다고 했다. 

주민센터의 평생학습관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노인들도 많은 것 같다. 

팔십대 중반의 한 할머니는 매일 불경을 필사하면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항상 행복하고 평안해 보이는 얼굴이다. 

그 할머니는 노년에 무료할 틈이 없다고 했다. 

보람있는 노년이란 배우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건 아닐까. 

그중에서도 영적인 기도나 수행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