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장 날 - 고희숙

Joyfule 2012. 9. 11. 01:46

  장 날 - 고희숙
  

가을 바람이 분다.
이런 날 누구는 여행을 떠난다 하고, 어떤 이는 그리운 이에게 편지를 쓴다고 한다. 하지만 난 시장엘 간다. 그것도 재래시장에.
  꼭히 무엇을 사러 가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 가면 혹여 추억 속의 누군가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성남 모란장이다. 전동차에서 내려 계단을 두 칸씩 뛰어 올라 장으로 들어선다. 까만 콩이 듬성이 박힌 옥수수 빵이 먹음직스럽다. 차츰 안으로 들어가니 별의별 물건들이 모두 모였다. 짝이 없는 사람은 아예 사질 말라고 선수를 치는 약장수 앞엔 두 귀가 쫑긋이 선 남정네들이 진을 치고 있다. 엄마의 치마꼬리를 잡고 따라다니던 고향의 장터가 아닌가 잠시 착각을 한다. 어디선가 구성지게 품어대는 장타령 소리에 우르르 몰려간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노랫가락인가. 가위로 장단을 맞추며 누더기 옷을 걸친 남녀 한 쌍이 신기한 물건이라도 전하러 왔는지 잔뜩 호려댄다. 


  가위소리에 묻혀 가물가물한 기억 저편으로 달려간다. 닷새에 한번씩 돌아오던 오일장. 내 어릴 적 장날은 잔치나 다름없었다. 빨래비누 한 장을 사러, 고무신 한 켤레를 사러 장엘 간다. 꽁치 두세 마리를 짚으로 묶어 지게에 매달고 벙글거리던 누구네 아버지. 간 고등어 한 손이면 그래도 형편이 궁색하지 않은 집 장거리가 아니었던가. 옛말에 ‘남이 갓 쓰고 장에 가니 두엄 지고 장에 간다’라는 말이 있다. 장 구경은 가야겠는데 돈은 없고, 빈손은 남세스러우니 두엄이라도 지고 다녀온다는 우스갯소리다. 볼거리가 드물었던 그 시절엔 장구경이 기중 신명나는 일이 아니었나 싶다.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아버지가 처가엘 다니러 갔을 때의 일이다. 외할머니는 백년 객을 대접할 찬거리를 사러 십리 길을 걸어갔다. 장꾼들 틈새로 이상한 말을 떠 외며 나무통을 메고 가는 소년에게서 뭔가를 사서 맛있게들 먹더란다. 가까이 가 본즉, 얼음과자였단다.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여 오뉴월에 얼음이라니” 하고는 큰맘먹고 사위 것으로 하나를 샀다. 그런데 그놈의 얼음과자가 심상치 않더니만 재를 넘던 중 툭하고 땅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단다. 할머니 손엔 가느다란 꼬챙이 하나만 들려 있었으니 얼마나 원통하였으랴. 재담(才談)이 좋아 더욱 재밌게 들려주던 얘기는 내가 할머니의 나이가 되어 가는데도 잊혀지지 않고 가끔씩 나를 즐겁게 해준다.


  한참을 돌다보니 아침까지 거른 뱃속에서 단단히 기별을 해온다. 요깃거리를 찾다 길게 줄을 서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가니 멸치 우리는 국물 냄새가 더욱 시장기를 돌게 한다. 넓은 판에 국수를 밀고, 옆에선 가마솥에 연신 삶아내는 정경이 작은 외갓집 삼촌 장가들던 날 같다. 긴 판때기에 두 다리만을 만들어 붙인 의자에 앉아 땀을 훔치며 맛있게들 먹고 있다. 난전에서 줄을 서자니 쑥스럽기도 하여 망설이는데 주인자의 한마디가 어찌나 구수하던지 마음을 정해버렸다. “양이 차지 않으면 얼마든지 더 드립니다. 돈은 국수 한 그릇 값만 받습니다”. 맨 뒤에 서있는 내 옆으로 할머니 한 분이 주춤거리며 내게 묻는다. “한 그릇에 얼마랍디여?” 보아하니 자식들에게서 받은 용채가 넉넉하질 않은 모양이다. 그러더니 한쪽으로 돌아서서 치마를 들추고 속바지에 달린 주머니를 살피는 눈치다. 


  낯선 할머니에게서 일가붙이를 만난 듯 울컥 눈물이 솟는다. 아침도 거르고 달려왔던 이유를 찾은 것이다.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 그리고 사십 년도 넘은 그 옛날에 외할머니가 사 주셨던 국수 생각에 예까지 달려 왔나보다.
  방학만 되면 외가엘 갔었다. 작은 할머니가 낳은 두 살 위인 이모와 들고양이처럼 헤매고 다니다 실팍해지면 엄마가 보고 싶어진다. 아무리 가고 싶어도 장날이 아니면 할머니가 데려다 주질 않기에 장날을 꼽아보아야 한다. 하루에 두 번 있는 버스의 첫차를 놓치면 해거름이 되어야 차를 탈 수 있다. 그 날도 그랬다. 서둘러 왔는데도 첫차를 놓치고 보니 여간 낭패가 아니었다. 할머닌 장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나와 이곳 저곳을 구경했다. 면 소재지의 장에 구경거리가 얼마나 될까. 할머닌 한쪽으로 돌아서서 치마를 들추더니 고쟁이에 달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리고는 내 손목을 잡고 나무막대기로 받쳐 세운 차일 밑으로 들어갔다. 멍석 위에 두레판이 놓여졌던 것 같다. 국수는 나 혼자만 먹었다. 어린 나이에도 민망했던지 할머니 앞으로 그릇을 내밀었다.
  마지못해 국물만 두어 모금 마시고선 당신은 배가 고프지 않으니 내게만 먹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장꾼들이 조금씩 빠져나가 한산해진 해질 녘에 할머니가 태워준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조금씩 철이 들면서, 국물만 두어 모금 마시고선 내 앞으로 국수 그릇을 들이밀던 할머니 생각에 가끔씩 가슴이 저려온다. 십리 길을 어찌 걸어 가셨을까. 국수 한 그릇 값이 없어 그리하진 않았을 것이다. 남정네도 아닌 아낙이 감히 장터 바닥에 앉아 국수가닥을 훌훌 거릴 만큼 할머니에겐 비위가 없었으리라. 
  

내 옆에서 줄을 서지도 못하고 치마만 들추고 있는 저 모습 또한 당신한테 들이는 돈은 아까운 우리네의 할머니가 아닌가. 주인에게 두 그릇 값을 지불했다. 마침 차례가 되어 할머니 손을 잡고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몸둘 바를 몰라 하는 할머니께 “배가 부르지 않으면 얼마든지 더 준대요. 덤으로 주는 것은 돈을 받지도 않는 다네요” 했더니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그깟 국수 한 그릇 값에 민망할 정도로 황송해하는 할머니가 안쓰럽다.
  빈손으로 오기엔 서운하여 찾으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호박잎이다. 외할머니가 국으로 끓여주던 호박잎이 아닌가. 방금 요기를 하고도 입에 군침이 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값을 치렀다. 호박잎을 팔던 할머닌 내 속을 알기라도 한 듯 애호박 하나를 덤으로 준다. 이 먼길에 달랑 호박잎 한 단을 사러 왔다면 남들은 웃으리라. 그러나 어쩌랴. 오랫동안 그리던 이를 만나기나 한 것처럼 마음이 부른 것을.

  가끔씩 추억이 그리운 날엔 이 곳에 오리라. 풀먹인 무명치마를 입은 외할머니 그리운 날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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