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영상시산책

다 버리면 오히려 새롭습니다 - 이철수

Joyfule 2008. 6. 22. 01:40


힘들면 몸부터 주저앉고 눕게 되는 것에서도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죽은 몸뚱이가 적막한 것을 알면 더 분명해집니다.
사람은 끝내 고요한 데 이르게 생긴 존재입니다.

늦가을이 온통 기품으로 가득 차는 것을 보았습니다.
늦가을 오색 장엄 앞에서 겨울 백발을 짐작키도 어려울 것이 없고
봄 어리광 여름 장난을 이해 못 할 일이 없습니다.






거짓말이 흔한 시절에는
거짓이 가득 차 있는 내 속부터 살펴야 합니다.
살피면 절로 밝아집니다.
마음에 환히 떠오르는 달 있으면 손가락이 무슨 소용?

해 지면 달 떠오르고 꽃피고 나면 지고
우리들 나고 스러지고 당연한 것이 당연히 오고 가는 그 자리에서
개나 사람이나 어리석어서 달을 보고 자꾸 짖습니다.






상한 콩을 골라서 퇴비더미에 쏟아버렸는데,
그 반편들―찌그러지고 썩고 병들어 문드러진, 콩들이
소복하게 파란 싹을 틔워냈습니다.
온전한 생명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죄송천만이었습니다.
제 속의 어둠을 툭 터뜨리면서 산벚나무 꽃피었는데..
살지! 힘겨운 삶도 살아보면 기쁨 있는데..
어리석음이 제 목숨을 제가 내다버립니다.






마음 한가운데 색이 앉아 지냅니다.
그러면 서로 부끄럽습니다.
면목없습니다.






마음 한가운데
어둡고 답답한 기운이 들어와 앉아서 편치 않습니다.
뱃속이나 마음속이나 방귀 크게 뀌고 나야
시원스러워집니다.






마음을 가만히 살피면 오색 종이가 들어 있는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현란하고 변화무쌍합니다.
마음의 천변만화가 한눈에 보입니다.

그 마음이 어디서 왔는가?

빨래 다 걷어내고 나니
빨랫줄에 빈 하늘이 잔뜩 내걸렸습니다.
―그 하늘에 구름무늬가 들어 있는가?







이승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떠나게 될 풍광을 아시는가? 묻습니다.
모르면 눈 없는 사람, 알면 지레 죽은 사람입니다.
창문 열고 보면 그날도 허공에 구름 떠가고 있을 터,
창문 닫아도 허공에 구름 흘러가기 마찬가집니다.






밤 이슥토록 일하고 뜰에 나서는데 어둠 깊은 산의 외줄기 능선 위로
조각달과 초롱한 별이 하늘에 지켜 서 있는 것 보였습니다.
피곤한 삶을 지켜 선 것이 거기도 있었구나 하고 어둠 속을 돌아보니
희미한 달빛에 조용히 제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더 있습니다.
아직 삽자국이 선명한 흙덩이들과 낮은 지붕들과 멀리 잣나무숲입니다.
그것들로 봄밤이 문득 아름답습니다.
한낮 햇살이 눈부시고 그 따사로움이 세상 키우는 힘이지만,
어둠 속에 온기 없이 희미한 달빛만으로도 마음 이렇게 넉넉해집니다.
이만큼만 나누어도 한시절 겨우겨우 살아가기는 하려니..
차고 기우는 달은, 밝고 어두워지는 마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육창(六窓)의 달.






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고, 달 하나가 천 줄기 강물에 두루 비쳐 있는
아름다움에다 밝은 지혜의 두루한 힘을 넌지시 실어 보인 표현이 있습니다.
TV의 작은 화면에 비치는 이미지와 메시지의 힘은 지혜 아니어도
한없이 크고 거침없습니다.
밝밝은 지혜의 언어는 어디 사시는가?
현주소가 궁금해집니다.


강을 건넜습니다.
썩은 물도 흐르는 것을 알았습니다.
거기 꺼지지 않는 불빛의 홍수 속에서
많이 희미해진 도시의 달이 비치어 있었습니다.
낯익은 풍광인데 눈물겹습니다.






하늘 보면, 다 버리고 사는 것이 옳은 줄 알게 됩니다.
맑은 날, 하늘에 가득한 별들의 사방팔방 연속무늬를 배경으로
가끔 떨어지는 별똥을 만납니다.

별도 때가 되면 꽃 지듯 떨어집니다.
별이 지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지는 별을 보고
땅에서는 달빛의 하얗게 빛나는
배꽃의 낙화를 봅니다.
사람도 지는 법.
별 보고 꽃 보는 우리들도 그렇게 지고 맙니다.






무심한 눈이 되어서 바깥을 조용히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삶을 그렇게 바라보아도 좋고 새떼들이 먹이를 찾아
몰려다니는 겨울풍경을 그리 바라보아도 좋습니다.
그 눈으로 제 삶의 갈피와 구석구석을 조용히 보고 있으면
저혼자 소란스러운 것이 가여워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가여운 것이 바로 나인 줄 알게 되기도 합니다.






비 오는 날 툇마루에 앉아 내다보는 경치 중에
제일 가까이 있는 것이 낙숫물 떨어지는 풍경입니다.
저 혼자 듣는 낙숫물에 천천히 마음을 맡겨가노라면
낙숫물은 문앞에 드리운 발처럼 조용히 그저 있고,
나는 한없이 작아진 마음 한조각이 되어 있습니다.
문득 그 일뿐, 바깥풍경도 무엇도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세상은 그 물방울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 버리면 오히려 새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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