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심판주로 오실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가?
우리네 교회의 가장 큰 명절은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이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을 기념하는 날이고, 부활절은 예수님께서 죽은 지 삼 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래서 전 세계의 크리스천들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살아나신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경배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육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나서, 영원한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 것을 철썩 같이 믿고 기대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오늘은 그 얘기를 좀하고 싶다.
지금은 잊혀져가는 문화유산이지만, 예전에는 사람이 죽으면 꽃상여에 시신을 태우고 장지로 떠났다. 상여는 각 마을마다 추렴해서 비용을 마련해 제작을 의뢰해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자그마한 집을 짓고 보관해 두었다가, 동네사람이 죽으면 꺼내어 사용하였다. 상여(喪輿)는 장례에 쓰이는 가마라는 뜻으로, 형형색색의 단청을 곱게 입혀 화려하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평민들은 시집올 때 한 번 가마를 타고 와서는 죽을 때 꽃가마를 타고 떠나는 것이다. 죽어서야 아름다운 가마를 태워주는 것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로 떠난다는 슬픈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상여를 매는 사람들을 상여꾼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매우 구슬프다. 평생 고달프게 살아왔던 이들의 서러운 인생을 노래로 지어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는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상여를 만들고 구슬픈 노래로 죽은 이를 보내는 것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자에 대한 살아남은 자들의 작별인사인 셈이다. 이들의 장례식의 저변에는 한번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서글픈 의미를 담고 있어서이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은 세상 사람처럼 죽음이 슬프지 않다. 왜냐면 죽는다는 의미는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를 영접하고 교회에 나오는 가장 주된 이유는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영원한 천국에서 살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철썩 같이 믿기 때문이다. 부활이란 말은 ‘다시 살아났다’는 한자어이고, 영어로는 resurrection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예언대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토대로 세워졌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생명을 주관하신 하나님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기에, 우리는 기독교가 진리라고 믿는 이유이다. 만일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지 못했다면 우리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춘분이 지나서 처음 보름달이 뜨고 난 뒤의 일요일을 부활절로 정해, 교회마다 축하예배를 드리고 삶은 계란을 나누어주며 경축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서 다시 살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주장이라고 덮어버리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최근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이천여 년 전의 중동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으므로, 성경 외에는 변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남아 있는 몇몇 기록 중에서, 유대교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의 기록을 살펴보자.
‘유대고대사 18권과 20권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내용이 다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유대고대사 18권 3장에서는 예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한편 바로 이 때 예수라는 지혜로운 사람-너무나 신기한 일들을 많이 행했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볼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인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면-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선생이었다. 그는 수많은 유대인 뿐 만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그의 곁으로 끌어들였다. 그가 바로 그리스도였다. 빌라도가 유대의 유력 인사들의 청에 의해 그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으나 그를 처음부터 사랑하던 자들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그에 관해 예언한 대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서 그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이 뿐 아니라 그에 관해서 수많은 놀라운 일들을 예언했었다. 그의 이름을 본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참고로, 유대고대사 20권 9장에서는 야고보의 처형을 다루는 내용에서 예수님의 이름이 언급된다. 이에 아나누스는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들을 소집하고,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예수의 동생 그의 동료 몇 명을 율법을 범한 죄로 고소한 후 돌로 쳐 죽이도록 넘겨주었다. 이처럼 고대 유대교와 헬레니즘에 권위 있는 학자들은 유대 전쟁 등의 사실을 저술한 요세푸스 기록의 진실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빌라도 통치 기간에 예수는 십자가형을 받았고, 그 후 많은 추종자들이 생겨났다는데 대해 명확한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그러나 이 사실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그 내용은 후에 기독교인인 누군가에 의해서 조작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암튼, 당신은 부활을 절대적으로 믿고 계신가? 물론 그럴 것이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죄다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을 믿고 있다면 그렇지 않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첫째는 이 땅의 삶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한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소풍 온 학생과 같다. 소풍 온 장소에서 집을 짓는 사람은 없다. 점심을 먹고 놀다가 해가 길어지면 각자 소풍가방을 챙겨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당신이 부활을 믿고 있다면 천국에서 다시 산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세상과 세상의 것에 대해 탐욕을 부리고 집착하며 살 리가 없다. 당신이 부활을 믿지 않기에 일시적이며 임시적인 세상의 것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이유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만약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믿고 있다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준비하며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부활을 믿고 있다고 말하면서 마음은 이 땅에 집착하는 것은, 믿는 게 아니라 단지 소원하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크리스천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천국을 소망하고 있다. 그러나 각자 믿는 종교가 만들어 놓은 천국이다. 그러므로 진리가 아닌 천국은 가짜일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땅에서 확인이 되지 않고 죽어 심판대 앞에서야 자신의 믿었던 종교의 실상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이라도 죄다 천국에 가는 자격을 얻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천국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가는 곳이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동안 철저하게 천국의 자격을 갖추려고 애쓰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한 하나님의 뜻을 우습게 알며, 주일날 1시간짜리 예배의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천국의 자격을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니라 천국보험에 든 것으로 아는 사람일 뿐이다.
크리스천들이 부활절을 기념하여 예수님이 다시 사심을 축하하고는 있지만, 부활이라는 게 모든 사람에게 축하할만한 일이 아니다. 크리스천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기 때문이다. 무슨 얘기냐면, 모든 사람은 육체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지만 죄다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즉 천국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유황불이 활활 타는 지옥에 던져지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부활이 곧 천국이라는 착각은 빨리 버리시기 바란다. 부활을 마음을 설레며 기다리며 사람들은 천국에서 살 것을 확신하는 사람이겠지만, 기대만 한다고 천국의 자격이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천국의 자격을 꼼꼼히 체크하며, 그 자격을 철저하게 준비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면서도 부활의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오랫동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숭배하며 교육받아온 사람들이, 교회에만 나온다고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부활이 금방 믿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교회에서는 성경의 말씀을 진리로 믿어야 한다고 다그치며 부활사건이 사실임을 다양하게 설명하겠지만, 부활은 예사 기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는 게 만만치 않다. 예수님을 3년 6개월 동안 따라 다녔던 사도들과 제자들조차,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낙심과 좌절에 싸여 제각각 집으로 돌아갔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여러 차례 말씀하셨고,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그들이 애초부터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그런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갑자기 돌변하여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알다시피 대부분의 사도들과 수많은 제자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고향을 등지고 가족들과 뿔뿔이 헤어져서 먼 타국에서 방랑하다가 잡혀서 모진 고문 끝에 순교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이들이 40여일 만에 복음에 목숨을 걸만큼 확 바뀐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당신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믿을 수가 없다. 이는 교회예배에 성실하게 출석한다고 믿어지는 게 아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자 성령을 만나는 것이다. 성령이 당신 안에 들어오면 부활사건이 믿어지기 시작한다. 믿음은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반복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활신앙을 가슴에 지니면서, 예수님이 오실 날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믿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3:1~2)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 시작한 계기는, 오순절의 성령강림사건을 통해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역사하신 놀라운 성령의 능력이었다. 그래서 기적과 이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되었으며, 베드로가 유대인의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자 찔림을 받아 사람들이 각각 3천명씩, 5천명씩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찾아온 까닭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예수님이 하신 표적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었던 계기는 복음을 들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기적과 표적을 보고 믿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예수님을 믿는 과정을 살펴보자. 작금의 우리네 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적과 이적을 보고 믿게 되었는가, 아니면 복음을 지식으로 받아들여 교회예배에 참석하고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믿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기적과 표적을 보고 믿었지만, 우리네 교인들의 믿음은 그런 게 아니라 전도자의 열정에 탄복하거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잘 정리된 복음의 설명에 동의해서일 뿐이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도 영적인 존재인 천사와 악한 영의 존재가 받아들이기 어렵고, 악한 영이 부추기는 죄와 피터지게 싸우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교회를 오래 다녀도 여전히 죄의 종이 되어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믿음으로는 구원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며, 이대로 죽어 이 땅을 떠난다면 지옥의 불길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도 여전히 당신의 죄의 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믿음은 기적을 믿는 믿음이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신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자신 들어오셔서, 그가 이 땅에 계실 때 하셨던 표적과 이적의 역사를 동일하게 경험하며 살았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면, 자신들도 동일하게 죽어서 다시 살 것이고 영원히 살 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부활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안에 내주하셔서, 이적과 표적을 드러내며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의 몫인 것이다. 이들은 죄다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으로 사는 증거를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당신 안에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주하셔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는 것은 머리에 저장하면 누구나 고백할 수 있겠지만, 부활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사람 안에 들어오셔서 가슴으로 믿어지고 삶의 현장에서 드러내야 비로소 인정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6:53~57)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안에 거주하시는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살은 말씀이다. 하나님은 성경말씀이시며,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그래서 매일처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성령의 조명을 받아 가슴으로 깨달음이 내려와야 한다. 말씀은 성경을 읽고 머리에 저장하여 쌓아두거나, 매일처럼 유명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다고 가슴에 새겨지는 게 아니다. 성령이 깨달음을 주셔서 가슴에 새겨져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의 습관이 필수적이다. 또한 예수님의 피는 무엇인가? 바로 죄를 용서하시며 죄와 싸워 승리하는 보혈의 능력을 말한다. 예수님의 보혈을 마신다는 것은 보혈의 능력이 가슴에 새겨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날마다 죄를 회개하며, 죄와 피터지게 싸워서 승리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며, 가슴 안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거주하시고 동행하는 사람이다.
해마다 부활절이 되면 사람들은 부활절 축하예배를 드리고 삶을 계란을 나누며 덕담을 하곤 한다. 그러나 가슴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새기지 못하기에 절기 행사를 반복하는 것에 그치고 만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슴에 새긴 사람은 천국의 확신이 삶에서 절절히 배어나온다. 그러나 지식으로 배우고 머리에 저장한 사람들은 가슴에 새긴 확신이 없기에 그 느낌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번 부활절에는 성령이 내주하는 영적 습관을 들여 절기 행사를 반복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심판주로 오실 예수님을 학수고대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자 성령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간곡하게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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