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구나무 - 고희숙

내가 살던 고향 마을엔 둥구나무가 있었다.
크고 둥글다 하여 둥구나무라 하였을까. 시골길을 지나다보면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정자나무다. 어른들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라 여겼고, 정월엔 한해의 기원을 비는 당산나무가 되어 온 동네 사람의 의지처가 되기도 하였다. 나 또한 어린 시절 하면 그곳이 먼저 떠오를 만큼 둥구나무 아래서 꿈을 키우며 자라왔다.
내가 성장해 객지에서 학교를 다닐 때도, 결혼을 하여 친정 나들이를 갈 때도 엄마는 둥구나무 아래서 나를 기다려 주었다. 혹여 남의 동네 갔을 때 어른들께서 물으시면 “웃말 둥구나무 옆에 살아요”한다. 그러면 내가 뉘 집 여식인지 금세 알아본다. 고만 고만한 여자아이들이 모여 고무줄 놀이하고 숨바꼭질하며 놀던 그 때도 둥구나무 가지 위에선 까치가 울었었다. 갑자기, 정말 갑자기 그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기억의 실타래가 풀어진다.
동네 앞엔 큰 냇물이 있다. 입학도 하지 못한 꼬마아이들은 가장자리 얕은 물에서 찰박대며 놀았다. 초등학교 3■4학년은 되어야 보(洑)를 막아놓은 깊은 물로 미역을 감으러 갈 수 있어 언니 오빠들을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보 안으로 멱을 감으러 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다 자란 양 으스대기도 하였다.
둥구나무에 잎이 모두 떨어질 때가 되면 할아버지를 졸라 썰매를 준비한다. 엉덩이 넓이 만큼한 송판에 굵은 철사로 다리를 만들어 물이 얼기만 기다렸다 냇가로 내닫는다. 동네빠들 틈에 끼여 행여 썰매를 밀어주지 않으려나 아쉬운 눈길로 따라다니던 기억이 낡은 필름처럼 희미하게 지나간다.
늦은 겨울이었던가. 한쪽 다리가 얼음물에 빠져 나일론 양말이 젖었다. 겨울엔 햇빛이 약해 말리는 일이 고역이었다. 엄마에게 야단맞을 일이 걱정되어 둥구나무 피워 놓은 모닥불에 양말을 말리다 구멍을 내고 말았다. 섬축에서 할아버지 부름에 쇳소리가 나도록 집엘 갖 못했다.
사계절 모두 둥구나무 아래를 떠나지 못하고 자랐다. 보름달이 대낮처럼 비추어 뒷집 순이 얼굴에 주근깨 하나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밤엔 강강술래를 한다. 추석빔으로 얻어 입은 색동저고리를 입고, 누구는 세라복을 입고, 엄마가 떠준 공작실 스웨터를 입고 그렇게 그곳에서 우린 꿈을 키워 나갔다.
오월 단오가 되면 그곳은 그네터로 변한다. 동네언니들이 모여 각자 짚을 한 단씩 들고와 그네를 만든다. 선녀가 타고 내려 온 듯한 짚 동아줄을 언니들은 잘도 만들었다. 춘향이라도 된 양 치마를 펄럭이며 언니들은 그네를 탔다. 유난히 겁이 많았던 난 한번도 그네 위에서 치마를 펄럭여 보지 못하였다. 언니들이 밥하러 간 사이 겨우 걸터앉아 보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숨바꼭질도 하고, 깡통 차기도 하였다. 술래가 눈을 감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우는 사이 한 발작씩 다가가 제일 앞에 간 친구가 술래의 등을 치고 도망을 간다. 잡히는 아인 술래가 되고, 잡히지 않으면 술래가 다시 술래가 된다. 동작이 민첩하지 못했던 난 언제나 술래였고, 술래한테 잡히는 엉거주춤한 아이였다. 그래도 끼워 주는 것만 신이 나서 할아버지가 잡아끌기 전에는 둥구나무 아래를 떠날 줄 몰랐다.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 어느 댁 며느리 들이는 얘기를 할 때도 어김없이 이 나무 아래서였다. 옆집에 새댁이 들어오던 날 엄마를 따라 각시 구경을 갔다. 그땐 이웃들에게 새댁의 혼수품을 자랑삼아 보여주곤 하였었다. 동네에선 오랜만에 맞이하는 멋쟁이라고 구경꾼이 많았다. 유일하게 중학교를 졸업한 충청도 어느 읍내에서 시집을 온다고 하였다. 혼수품 구경이 끝나고 각시를 다는 순서가 되었다. 텃새를 한답시고 먼저 시집온 헌 댁들이 노래를 하라고 보채기 시작했다.
요즘엔 새댁 노래쯤이야 예사로운 일이지만 그때로선 새각시 노래를 들었다 하면 못 들은 사람은 원통해 할 만큼 재밋거리였다. 그러나 여간한 비위가 아니고는 구경꾼이 오히려 지쳐 돌아가는 것으로 끝맺음이 되었다. 그런데 그 새댁의 말을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고 있으니 그때로선 온 동네의 일대 사건이었다. 유행가는 시시하고, 영어노래는 방에 있는 사람들이 이해를 못할 것 같아 부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읍에서 면으로 시집을 왔으니 자기가 한 등급 위라는 뜻이리라.
그 후 동네 엄마들과 임의로워지고 나선 그와 농을 할 때마다 유행가니 영어노래니 들먹이면 부끄러워 어찌할 줄 몰라했다. 그러나 그 새댁도 지금은 손자가 주렁주렁 매달린 칠순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되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다. 어느 해부턴가 둥구나무가 보이질 않았다. 홍수를 대비해 섬축을 쌓아 올리는 과정에서 방해가 되었던가 보다. 둥구나무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추억의 한 부분을 잃은 것 같은, 그리고 돌아갈 곳을 잃은 것 같은 서운함은 아직도 가슴 한편에 남아있다.
내게 꿈과 희망을 키워주던 둥구나무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그 나무는 지금도 내 마음속에 살아있어 가끔은 어린 시절로 나를 데려다 주곤 한다. 언제 내려갈 것인지 얘기만 하면 나무가 서있던 언저리에서 엄마는 날 기다려 주신다. 그리고 떠나올 땐 “시방 가면 언제 또 올 수 있냐”하시며 손을 흔들어 주는 곳 또한 그 자리에서다.
가끔 삶이 고단하다고 느낄 때, 요즘처럼 한 해를 마무리 해야되는 계절이 오면 난 그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고무줄 놀이하고 숨바꼭질하며 우리의 꿈을 키우던 둥구나무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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