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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

Joyfule 2016. 5. 28. 14:21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

 

(1) 디아스포라의 유대 사회와 문화


  성전 멸망 이  후 유대인들의 삶은 총체적으로  '떠돌이 생활' 그 자체였다. 제1차 성전 멸망으로부터 시작된  유랑의 세월은 바빌로니아를 중심으로 한 근동 지방을 비롯하여, 이집트, 아프리카  북부로 이어졌으며, 제2차 성전 멸망과 이어 계속된 제2차 유대 반란은 로마  세계 전체로 유대인을 분산시켰다. 그 후 비잔틴 제국의 유대인 박해와 모슬렘의  추방은 유대인들을 스페인을 비롯한 동부 유럽과 서부 유럽에 이르는 지역에 이르기까지 확산시켜 놓았다.


  이들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들은 팔레스틴에  머물러 살고 있던 유대인들과 어느 정도의 교류를 가지고 있었으나, 점차 팔레스틴의 지위가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그것보다  우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면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 갔다.
  대부분의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는 예루살렘에로의  귀향이 하나의 이상이요 꿈이었다. 열강들의 영토에서 자신들의 법적, 종교적 지위가 약화되면 될수록 그들은 시온에로의 갈망이 더욱 불타 올랐다. 그러나 그러한 열망이 한쪽에서는 서서히 식어 가면서 디아스포라의 신학을 정리해 나갔다. 자신들이 속해 있는 문화와 전통속에서 고유한 유대교의 전통을 어떻게 재해석해 나가며, 정착해 나가느냐?하는 것은 현실적인 삶 속에서 하나의 필연적인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속해있는 문화에 점차 동화되어 가면서 살아가기도 하였으며, 어떤 이들은 타문화를 거부하며 박해와 죽음까지도 감래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디아스포라의 삶은 각 지역의 정치적 변화와 문화적 변동과 더불어 그 방향을 결정해 나가야 했으며,  적어도 현대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까지 수 천년동안 계속되었다.

 

① 중세 유럽의 유대인-아쉬케나지
  아쉬케나지(Ashkennazi)는 성경에서  야벳의 자손  중 고멜의 후예이다(창10:3;대상1:6). 지금의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모여 살던 이들은 커다란 왕국을 이루며,  바빌로니아를 치기도 하였다(렘51:27). 바빌로니아 탈무드에서 고멜(Gomer)은, 비록 그  이름이 북서부 시리아의 게르마니카를 가리킨다하더라도, 게르마니아(Germania)로 묘사하고 있다(cf.BT Yoma 10a).
 

이 용어가 어떻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는지에 관하여 불분명하다 하더라도,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역사에서 이  용어는 북서부 유럽에 정착하여 살던 유대인 공동체를 총괄적으로 묶어서 부르는 이름이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에서 살던 유대인들은 아쉬케나지의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동부 및 남부  유럽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의 모든 유대인들을 지칭하고 있다.

  아쉬케나지의 문화적인  뿌리는 남부 이탈리야와  북부 프랑스였다. 12세기 야콥 메이르 탐(Jacob b.Meir Tam)은 아쉬케나지의 문화를 일으며 나갔다. 특히 이 지역의 유대인들은 전통적이고, 근본적이며, 엄격한 유대 사상과 관습등을 유지시켜 나갔다. 예루살렘 성전 멸망 이 후 다양한 시대와 환경 속에서서 살아가면서 이들은 외적인 영향보다는 내적인 전통을 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성경과 탈무드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이러한  작업을 수행해 나갔다. 이들의 연구의 주된 관심사는 할 라카적인 원리를 찾으려는 것이었다기 보다는 성경의 주석적인 활동이었다. 아쉬케 나지의 이와같은 노력과 전통은 유대교의 학문적 전통의 뿌리가 되었다.
 

 15-6세기 서유럽의 유대인들이 동부로 대거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그 중심이 보헤미아, 모라비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지로 옮겨갔다. 이들은 히브리어와 독일어를 합성하여 자신들이 고안해  낸 이디쉬어(Yiddish)를 사용하였으며, 이 언어를 사용하여 많은 제의시(제의시)등을 창작해 나갔다.

  17세기 스페인의 유대인  학살로 인하여 많은 유대인들(스파라딤)이 동부 유럽으로 이주해 들어오면서 급속도로  아쉬케나지의 인구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 곳에서도 1648년의 폴란드 대학살 및 18세기 러시아의 박해등으로 말미암아 아쉬커니지 유대인들은 오스트랄리아, 남아프리카, 미국등지로 흩어져 분산(분산)되어 갔다.

 

② 중세 아시아의 유대인-스파라디
  역사적으로 스파라디(Sepharadi)는 스페인과 포루투갈에 살던 유대인의 후예들을 일컫는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 오바댜 1장 20절에 나오는 말로써 스페인을 일컫는 라틴어 'Hispania'와 동의어로  보고 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스파라디는 아쉬케나지가 아닌 모든 유대인들을 통칭하기도 한다.
  전승에 의하면 유대인의 스페인  진출이 솔로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이러한 전승의 역사적 근거는  찾을 수 없으며, 다만 711년 C.E. 모슬렘의 팔레스틴 정복 때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이 곳까지 이른 것으로 여겨진다. 정치적, 언어적으로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의 유대인들과 교류가 있었던 증거가 있으며, 바빌로니아에 버금가는 문학과 철학등의 창작활동이 활발하였다.
  1148년 알모하드(Almohad)의 박해 이 후 스페인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집중(집중)되면서 유대 공동체에는 적지  않은 압력과 박해가 가해졌다. 1391년 박해 때에 많은 유대인들이 추방되거나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되었다. 또 1492년 유대인 추방령이 포고되면서 스페인에  살던 유대인들은 대부분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터어키 등지로 떠나야 했으며, 이 칙령은 공식적으로 1968년까지 유효했었다.
  적어도 중세 유대인의  디아스포라 역사에서 스파라드의 인구가 아쉬케나지와 비교할 때 약 1/10정도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할은 활발하고 중요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던 시대의 문화와 잘 조화를 이루면서 유대인의 새로운 전통을 많이 창출해 냈다. 스페인어 혹은 히브리어와 스페인어를 조화시켜 만든 라디노(Ladino)어로 된 성경 주석, 시, 드라마, 법전 및 신비주의 카발라 작품등 많은 문학 작품들을 생산해  냈다. 1553년에 라디노어로 쓰여진 페라라 성경(Ferrara Bible)은 가장 유명한 책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2) 중세 유럽의 유대인


① 중세 유대인들의 경제 활동
  유대 역사에서 중세라  함은 640년 아랍-모슬렘의 통치 시대로부터 십자군시대를 거처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을 거쳐 17세기 유럽의 변화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이 시기의 특징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지위와 자치권을 위한 투쟁의 시기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유일신 신앙을 가진 모슬렘과 기독교와의 관계  속에서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살아  나가야 했으며, 이 두 정복자들 안에서 받은 여러  가지의 고난과 박해의 시기로 규정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삶 속에서  자신들의 지위와 자치권을 보장받고 인정받으려는 노력과 함께 정치적-사회적 삶을 영위해 나가던 시기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세 유대인들의 경제 생활은  가장 특징적인 역할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유대인들은 기본적으로 가내  수공업과 무역을 중심으로 점차 커 나갔으며, 디아스포라의 곳곳에서 이러한 유대인들의 경제 활동은 점차 확대되어 갔다.
  특히 기독교 세계 내에서의 유대인들의 경제 활동은 유대인들의 재력을 바탕으로한 지위를 확보해 나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봉건 영토내의 먼 지역에 여행하여 새로운 상품을 소개하거나  들여옴으로써 지역간의 교류를 활발히 하는데도 기여하였다.


  11세기에 접어  들면서 유대인들은 각 지역마다  지점을 두어 무역과 상업활동을 체계적으로 해 나가기 시작하였으며, 온 가족이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봉건 군주들 조차 이들의 이러한 상업 활동을 인정하면서 많은 이익을 나누어 가졌다. 상업을 통하여 점차 많은 돈을 번 유대인들은 이 돈을 일반인들에게 대여해 줌으로써 이자를 받고, 금융제도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들은 번 돈으로 금과 은을 사들였으며, 이러한 상업 활동은 순환적으로 계속되면서 많은 이익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경제 활동은 종종 지방 원주민들로부터 오해와 미움을 사기도 하였으나, 여러 지역에서  금융과 상업에 관한 한  유대인들의 숙련된 활동이 크게 인정 받게 되었다.
  중세 유대인들의 경제적  지위는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 제국 내의 유대인들 가운데는 남녀 노예들을  가지고 있었던 상류층이 많았으며, 모슬렘의 스페인에서도 유대인들은 화려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② 중세 유대인에 대한 종교적 증오심
  유대인들에 대한 기독교의 기본적인 태도는 중세 이전, 후기 로마 제국 내에서 사실상 구체화되었다. 즉,  하나님의 유대인 선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그 선택이 이미 기독교로 옮겨왔다는 신학적 이해는 4세기 이후 확대되었다. 교황 스레고리 1세(Pope Gregory I,590-604)는 유대인을 아직도 교회와 대적하며 싸우는 자들로 보았으며, 유대인의 회당을 새로 건축하는 일등을 금지시켰다. 같은 시기의 교부들 역시 반유대적 설교를 하였다.


  나아가 7세기 또 하나의  유일신 신앙을 가진 이슬람교가 등장함으로써 유대인에 대한 종교적 태도는 원칙적으로  부정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모슬렘의 스페인 안에서 유대인들은 개종을 강요당했으며,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들의 자녀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박탈하였다. 기독교와 모슬렘 간의  갈등과 투쟁 역시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이가 나빠지면서 서로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모슬렘의 정복은 모슬렘 제국 내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지위를 바꾸어 놓았다. 모슬렘 교도들에게 있어서 유대인들은 단순히 이단일 뿐 아니라 비신앙인이었다. 소위 모슬렘 신앙을 신봉하는  공동체인 움마(Umma)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모두 적이었다. 모슬렘 안에서 탁월한  법과 실천 강령을 가지고 있던 수니파(Sunnite) 교도들은 알리의 추종자들인 혁명적인 시아트(Shiites) 교도들보다 비교적 관용적인 사람들이었다. 1008년 이집트가 시아트파에 의해 점령되면서 이집트 내의 유대인들은 심각한 박해를 받게 된다. 참수형에 처해지거나 광야로 추방당하게 된 것이다.


  한편, 1096년 라인 계곡에서  집결한 십자군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마인츠(Mainz)에서는 기독교 개종을 거부한 약1,000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했으며,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였을 때에는 유대인들을 회당에 모아놓고 불을 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슬렘과 십자군에 의한  종교적 박해는 유대인들에게 [순교자에 대한 기도](Kiddush Hashem)를 낳게  하였다. 즉, 개종하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에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간  이들로 부르며, 이들을 위한 기도를 통하여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신앙적 구심력을 더욱 공고히 해 나가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건이 계속되자 왕  헨리 4세(Henry IV)는 강제로 개종한 모든 유대인들에게 본래 위치로 되돌아 갈 것을 허락하여 많은 유대인 도시와 공동체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나, 이러한 조처는  지속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어떠한 방식으로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보호해 줄 힘이나 스스로 자신들을 방어할 희망을 찾지 못하게 되자, 학살에 반대하는  군사적인 행동을 감행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다다랐다. 유대인들은 폭동을 일으켜 도시 밖에 성채를 구축하고, 그 안에 사는 비유대계 사람들을 밖으로 보낸 후 맞서 싸워 나갔다. 영국의 요크(York)에서는 이렇게 하여 고립된 유대인들이 포위를 당하여 견디지 못하고 모두 자결하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중세의  유대인들은 점차 그 사회와 고립되어 가기 시작하였으며,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해 가면서 내면화 되어갔다. 경제적인 지위도 점차 약화되어 갔다. 이 때에 생겨난 새로운 종교 사상은 대부분 내재화, 신비화되어갔다. 대표적인 집단 가운데 카라이트(Karaites)가 있는데, 이들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종교 전통이나 제의, 탈무드등을 거부하면서 오직 토라와 유대인 사이의 개별적이면서  직접적인  접촉을  강조하였다.  카라이트의  지도자는  베냐민  모세(Benjamin ben Moses al-Nahawendi)였다.

 

③ 중세 유대인의 법적 지위
  중세 유대인의 지위는 항상 세속 정부의 인가(인가)에 의해서만 그 역할을 보장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유대 지도자들은 항상 그들의 자치권을 얻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 왔다. 중세 사회에서 유대인들이 받은 정치적, 종교적 대우라는 것은 보잘것 없는 것이었으나 유대인들의 경제적 지위는 만만치 않았다. 서부 유럽의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돈을 빌려주는 일에 종사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교회와 제국, 교황과 황제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고조되면서 유대인의 종교적 지위를 위협하는 교황의 입장과 유대인의 경제적, 법적 지위를 보장해 주려는 황제의 노력이 상호 교차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요한 기능을 가지게 된 것이 유대인의 경제력과 그들의 대부(대부) 행위였다. 돈이 많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돈을  빌려주게 함으로써 그들의 법적  지위를 보장해 주거나, 심지어 죄를 지은 유대인들에게 면제부가 되도록 해 준 경우도 있었다. 이는 중세 봉건 제도 하에서 농노들은  봉건 군주에게 충성하고, 봉건  군주는 농노들을 보호해 주는 한 형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황제의 행위는  적어도 교황의 눈에는 부정적인 것이었으며, 더구나 교부들에게 있어서 예수를  살해한 유대인들은 가인처럼 인식되었다. 황제의 지위 마저도 결정 지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된 교황은 유대인들을 억압하였다. 중세 유럽 사회에서 유대인에  대한 실질적인 법적 차별은 없었으나 관습과 일반인들의 의식 속에서 유대인은 증오와 미움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폭력적인 저항뿐 이었다. 유대인들은 곳곳에서 기독교 어린이들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살상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더 큰 곤경에 처하도록 하였을 뿐이었다. 1286년 뮌헨에서는 "유대인들이 기독교 어린이들을 잡아다가 그 피를 뽑아 마신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였으며,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이 사실을 문자적으로 믿었다.
  급기야 황제 프레드릭 2세(Frederick II)는 사제들을 불러 이 사실을 조사하도록 명령하였으며, 여러 지역에 걸친  지역에서의 조사 결과 사실이 아님이 보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믿지 않았다. 이러한 이야기는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으로부터 유대인이  추방된지  거의  한 세기나  지난  1387년에  쓴 쵸서(Geoffrey Chaucer)의 칸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에서도 그 배경으로 삼고 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④ 중세 유대인의 종교사상
  중세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 근본적인 변화의 징조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말경이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의 지도 체제는 귀족적인 계급구조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토라 연구에 있어서 전문적인 지식층이 이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권위와 역할은 거의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이러한 지도  체제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정치적 박해 속에서 이러한  체제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형태의 체제는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형식의 지도 체제와 사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지도력의 권위를  주장하고  나선 사람은  모세  벤 마이몬(Moses  ben Maimon, 1135-1204)이었다.  스페인에서 추방당해 이집트로 건너가  유럽에서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제도를 발견한  그는 과거의 제도를 거부하고 보다 강력한 정신적지도자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는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권위만을 강조하고, 탈무드학교에서 많은 돈을 받고 가르치는 행위등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합리주의자로서 전통과 신앙을 이성과 철학을 바탕으로 설명해 나가면서 전통적인 유대 사상을 수정해 나갔다. 그는 유대 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종합하려 하였으며, 유대 상류 사회의 많은 지지를 얻었다. 특히 그는 명확하게 체계화된 철학으로  유대교의 유일신 신앙을  설명하였다. 그는 메시아의 인성(인성)을 강조하였으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다 사회적인 성격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합리주의 철학으로 설명된 유대 신앙은 아직까지 이성적(리성적)인 사고에 익숙하지 않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많은 비난과 논쟁을 거쳐야만 했다.


  메이르  벤 하레비(Meir  ben  Todros  ha-Levi Abulafia)와  메나헴  벤 솔로몬(Menahem ben Solomon Hameiri)는 마이몬의 합리주의적 태도와 해석에 관해 심각한 우려를 표시하면서 그의 이론을  반박하였다. 특히 마이몬의 육체의 부활을 거부하는 해석과 합리적 알레고리적 해석에 관해서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그는 "헬라의 지혜"와 모세의 토라는 결코  종합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마이몬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유대교의 밀의적(밀의적)이며 신비적인 교리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두 학파간의 갈등과 논쟁은 결코 쉽게 끝나지 않았다. 15세기까지 계속된 이 논쟁은 결국  두 학파의 주장은 상호  보완적이며, "이성과 신앙은 길을 밝히는 두개의 등불"이라는 결론으로 어느 정도 매듭을 짓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해와 차이는 여전히 유대인의 문화와 종교적 전통속에 깊게 흐르는 두 줄기의 물줄기가 되었다.

 

⑤ 유대인의 재이주
  많은 박해 속에서 유대인들은 힘들고 위험한 곳으로부터 새롭고 안전한 삶의 거처를 찾아서 떠나야  했다. 이들의 이주는 이슬람 세계로부터 기독교 세계로,기독교 세계에서 다시 다른 기독교 세계로, 서쪽으로부터 동부나 북부로 이주해 갔으며, 주로 도시로부터 소도시나 시골로, 유럽의 중요 국가로부터 변방의 국가로의 이동이었다. 서부 유럽에 살던 많은 유대인들은 동부나 북부 유럽으로 대량으로 이주해 나갔으며, 주로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모라비아, 실레시아 등지로 옮겨갔다.
  특히 스페인의 카톨릭 지도자들은 1391년부터 1492년이 이르는 기간 동안에 스페인내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모두 추방하였으며 , 이는 또 다시  고향을 잃은 자들처럼 처참하게 쫓겨가야 했다.
  이들은 주로 한 곳에 보다 큰 집단적인 정착을 실시하면서 스스로 자신들의 경제적, 사회적, 정신적 기회를  만들어 나가는 새로운 형태의 정착운동을 벌여나갔다. 나아가 이 시기에 쫓겨난  많은 유대인들은 팔레스틴에로의 복귀를 서둘렀다. 순례단과 함께 팔레스틴으로 이주한  유대인들도 상당수에 이르렀다. 이들 가운데는 은행가나 상인들이 많이 있어,  팔레스틴의 경제적 이익과 부합되어 이주가 용이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