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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

Joyfule 2016. 5. 29. 18:40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

 

(3) 유럽의 변화와 유대인 공동체
 

① 17-8세기의 유럽 사회의 태도


㈎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14-15세기에 걸친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문예부흥(Renaissance)은 근대화의  시발점으로 인정된다. 나아가  16세기 종교개혁은 중세사회가  지니고  있던   가치관이  파괴되면서  세속주의(Secularism)와  개인주의(Individualism)가 새로운  사회의 가치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종교'와 '정치'의 분리 원칙이 세워지게 되는 동시에 한쪽에서는 극단적인 종교주의가 증가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신앙은 통치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종교와 국가 사이의 강력한 경쟁 관계를 만들었다.

 

㈏ 종교적 관용(Religious Tolerance)과 유대인에 대한 존경심의 증가
  설교가 로저 윌리암(Roger  Williams)은 1644에 쓴 한 에세이에서 "기독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두는 것을 금지 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이다. 종교의 자유, 즉 이방인과 유대인, 터어키인이나 기독교인들의 예배나 사상은 모든 국가나 지역 안에서 인정되어야만 한다"고 썼다.


  존 로크(John Locke)는 [관용에 관한 편지](Letter Concerning Toleration,1689)에서 "이방인도 모슬렘이나 유대인들도 그들의 종교때문에 시민권이 제한 되어서는 결코  않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소위  17세기  말의 종교관용  이론(Theory of Religious Tolerance)의 기초인 것이다.
  보다 중요한 영향은 17세기의 히브리, 유대 문학에 대한 유럽의 관심으로부터 시작된다. 기독교 유대주의자들(Christian  Hebraists)은 유럽대학 안에서 히브리 유대학 강좌를 두었다. 성경은 고대 이스라엘의 정치사상, 사회 및 국가에 대한 권위있는 책으로써,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구약사상은 계몽된 국가의 정치, 사회 발전의 좋은 례서로 인정되기 시작 하였다.

 

㈐ 상업이론과 유대 변증학
  유럽 사회의 새로운 정치적, 경제적 사상은 유대인들을 향한 유럽인들의 태도에 큰 변화를 주었다. '국가의 복지'(Walfare of the State)는 유럽 사회의 원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  주장은 "모든 인간은 종교에 의하여 판단되지 아니하며, 국가에 대한 유용성(Usefulness)에 의해 판단된다"는 것이다. 유럽의 인구 증가와 그에따른 인간의 경제적,  상업적 행위를 중시하게 된 것이다. 17-18세기의 사람들은 상업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론(Mercantilist Theory)을 받아 들이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유럽 사회의 유대인의 통합을 지지하게 된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변화에  따른 유대인들의 지지는 1638년 변증가인 시몬루짜토(Rabbi Simone Luzzato)가 쓴  [베니스의 유대인에 관한 소고](Essays on the Jews of Venice)에 잘 나타나 있다:"유대인들이 사는 곳은 어디에서나 무역과 상업이 넘쳐 흐른다". 특히 영국에서는  철학자 존 토란드(John Toland)의 [대영제국과 에이레의  유대인 귀화를  위한 근거](Reasons  for Naturalizing  the Jews  in Great Britain and Ireland,1714)에서 "유대인들을 영국으로 데려오는 일이 왜 이익이 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또 몽테스크(Montesquieu)는 "기독교는 무역이나 상업적 이익을 위하여 고리대금을 엄격히  금지했는가 하면, 왕은 또한 유대인들의 재산을 압수하고 추방시켰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들의 돈을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옮기기 위해 어음(letter of  exchange)를 고안해 냈다"면서 유대인들이 유럽의 경제 발전을 위한 긍정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 계몽주의와 유대인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은 서유럽과 중앙  유럽에서 교육받은 유럽인들의 유대인들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놓았다. 이들은 종교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개인의 동등한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으며, 국가 안에서 구별된 신원을 보존하는 것을 역사적   집단의  실존으로   받아  들였으며,   나아가  '구별주의자'   유대인  집단('seperatist' Jewish group)을 비록 그들이 위선적일 망정 인정할 정도 였다.
  독일 작가인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은 [유대인](The Jews,1749)에서 유대인을 정직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증명할 목적으로 이 책을 쓴다고 밝히고 있을 정도이며, [현자 나단](Nathan the Wise,1779)에서는 유대인을 이론이나 실제에 있어서 자연  종교의 제안자로 보았다.  이 책 속에서  그는 유대인들을 "선민"(chosen people)으로 간주하자 현자인 나단이 대답하기를 "나는 나 자신의 백성을, 너는 너 자신의 백성을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먼저  인간이요 다음이 유대인이며, 너도 먼저 인간이요 나중이 기독교인이다"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기생적(parasitic)인 모습으로 발전되는 것은 배격되었다. 토너(Clermont Tonnerre)는 1789년 12월 프랑스 국민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우리는 한 국가  안에서 유대인들에게 독립된 정치기구나 계층을 두는  것을 허락해서는 않된다. 각자  개인적인 자격으로 시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이러한 우리의 입장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추방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국가 안에서 비시민 단체(a groupof non-citizen)나 국가안의 국가(a nation within a nation)를 둘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이것을 받아 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 리신론자들(Deists)과 철학적 합리주의자들(Philosophical Rationalists)
  유대인들을 하나의  단체로 인정하려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그것은 곧 "국가 안의  국가"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18세기 영국의  리신론자들은 자연종교(natural  Religion)를  지지하며, 계시종교(revealed religion)를 반대하는 자들로써,  모든 종교 사상을 합리주의적으로 보려는 자들이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유대 성경은 지어낸 거짓말이요, 그들의 조상과 영웅들은 부도덕한 악당이요,  예언자들은 좁은 마음의 광신주의자라는 것이다. 이들은 종교적 기적이나 환상등을 거부하는  자들로써 이러한 사상을 가진 종교는 모두 미개한 것이므로,  유대인들은 야만족이요 잔인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초대교부들의 반유대논쟁의 부활이었다.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Voltaire)는  그의 철학사전(1756)의 "유대인" 항목에서 "큰 국가가 작고  알려지지 않은 노예국가로부터 법이나  신앙을 가져올 수는 없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전적으로 무식한 민족이며,  오랫동안 폭력과 증오, 반역과 인색함으로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화형에 처해지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또 홀바하(Holbach)는 반유대주의에 입각하여 유대인을 "간단히 말해서 약탈 민족이다"라고 정의해 버리기도 하였다.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Fichte) 역시  유대인들을 "도덕적 타락"과 "국가 안의 국가"라는 두 원리에  입각하여 비판하면서, 1793년에는 유대인에게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하는 일에 반대하는 글을 발표하였다:"그들이 이 권리를 계속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목을  자를 수 밖에 없다. 만일  이들에게 시민권을 준다면 그들은 다른 시민들을 짓밟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18세기 이러한 논거의 주장자들은  전세계에 이 일을 알리는 작업을 계속하였다. 철학자 칸트(I.Kant)는 [의사단의  전쟁](The War of Faculties,1798)에서 "유대인을 안락사(euthanasia)하는 방법은 그들의 종교적 도덕성과 순수함, 오래된 법규들을 그들로 하여금 포기하도록 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설파하였다.

 

㈓ 통합의 방법으로써의 유대인들의 개량(improvement)
  리신론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유럽의 교육받은 계층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종교나 신앙을 버리거나 변경하지  않고도 그들의 권리를 증진시키는 통합의 길이 있다고 주장했다.


  돔(C.W.Dohm)은 [유대인의  시민 변형](Civil Transform  of the Jews,1781)에서 유대인들의 동등한 시민권과 직업 선택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면서 그들이 가지고있는 기술을 격려했다. 나아가 그들의 예배의 자유, 회당을 열 수 있는 권리 및 학교에서 과학이나 예술에 종사하는  일도 허락하도록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에게 국가를 위해 봉사하도록  하는 훈련이 되어있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훈련의 부족은 그들이  온전한 시민권을 부여 받은 후에 실시해야 하는데,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기독교나 국가에 대한 증오심이 표출될 가능성을 유발시킬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임을 경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제안하기를 영향력 있는 정부 밑에서 새로운  교육을 통한 개량 방법이 창안,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돔의 주장은 다른  여러 나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목사인 아베 그레고리(Abb  Henri Gregoire)는 [유대인의 육체적,도적적,정치적 문예부흥 소고](Essays on the Physical,Moral  and Political Renaissance of the Jews,1789)에서 "모든 유대인들의 모임은  정부가 임명하는 대표가 의장이 되어야 하며, 모든 토의는 그  국가의 언어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785년 폴란드에서 온 유대인들을 개량하기 위하여 모든 서류에 그들의 언어 사용을 금지시켰으며, 군 복무를 의무화 하였다.

 

㈔ 프랑스 혁명기의 유대인들에 관한 토의들
  프랑스 국민의회 및  독일 국민의회는 유대인들의 법적 지위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비중있는 토의를 계속하였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유대인들의 인권, 즉 거주 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등을 박탈하자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주창하는 것은 꺼려하였으나, 유대인들의 정치적 문제 및 시민권 부여에 관해서는 그 논쟁이 계속되었다.


  1789년 12월 프랑스 국민의회에서 목사 및 보수주의자들은 '유대인'(juif)이라는 말은 종교적 분파(sect)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들의 법을 가지고 있는 한 민족으로 규정하면서, 이들에게 시민권을 주는 것은 영국사람이나 화란사람들이 프랑스 시민이 될 수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로베스삐에르(Robespierre) 같은  급진주의자들은 유대인들의 나쁜  성격을 강조하면서 '시민이 될만한 적절한 자격을 갖춘 시민에게만 공민권을 주어야 한다'고 차등 권리제를 주장하였다.


  1796년의 독일 국민의회에서도 프랑스에서와 비슷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유대인들은 가나안 땅으로부터 추방당했으며,  그들의 희망은 오직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땅에서 사는 모든 유대인들은 나그네로써 살고 있으며, 또 전능자로 오실 메시아를 늘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다른 땅에서의 거주 자체를 하찮은 것(unworthy)으로 여기고 있다."
이에 반해 유대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자들은 "유대인들은 우리가 그렇듯이 한 인간이며, 그들의 행동 역시  다른 민족이 가지고 있는 것같이 취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지금 유대인들은 한 백성(a people)으로서 생각 되는가? 아니면 한 국가(a nation)로 생각 되는가? 이들에게 주어진 이름은 신앙의 이름인가? 국가의 이름인가? 그들은 그들의 국가를  잃은 이래 그들 스스로를 한번도 국가로 부른 적이 없으며, 한 신앙의 백성으로 부르고 있을 뿐이다"라고 옹호하였다.
  결론적으로 17-18세기의 유대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태도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1) 종교적 관용이론  혹은 상업주의적 이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유대인을 한 인간으로, 또한 경제적 가치로  봄으로써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자는 입장이며,  2) 다른 하나는 유대인을 정치적으로 '국가안의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두 주장이 계속  됨에도 불구하고 17-18세기의 유대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태도는 시온주의 운동을  위한 매우 커다란 변화로 인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종교개혁으로 인한 정교분리 운동, 합리주의자들의 계시종교의 거부, 교회 전통과 조직에 대한 비판 및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자유 및 인권에 대한 존중이라는 커다란 유럽의 변화에 따라서  유대인들의 정치적, 법적, 철학적 전통에 대한 관심의 폭이 증가되었기 때문이다.

 

② 전체주의 국가에서의 유대인의 법적 지위


㈎ 중앙집권화와 지방주의의 대결
  중세 유럽 사회는 기본적으로 각 사회 단체간의 협력 및 정치-사회적 지위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절대  왕조 국가(Absolutist Monarchy)를 강화시킨 중앙집권주의자(centralist)와 전체주의자(absolutist)는 이러한 중세의 상황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특히 독일에서는 각 단체와의 협력과 유대 공동체의 자치력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절대 권력의 집중은 유럽에서의 유대인들의 법적 지위를 상실케 했다.

 

㈏ 동부 유럽의 유대인들
  이 시대에 폴란드는 왕정이  기울고 대신 귀족 계층의 세력이 증가 하였다. 따라서 유대인의 지위는  왕보다 귀족 계층의 태도에 의해 결정되었다. 유대인들은 주로 대지주들에 의해 보호되었다. 이들은 유대인들의 고용효과를 누리고 있는 자들로써  다른 계층(사제,도시 중간층  및 소작농)의 비판으로부터 유대인들을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이  대신에 이들로 부터 당하는 시달림 또한 고달픈 것이었다. 사유 재산이 없었던  유대인들은 대지주의 땅에서 살았으며, 그 때문에 공민과 지주 사이의 갈등을 직접 경험하게 된 것이다.
  특히 폴란드의  사제들은 유대인 박해의 배후 세력이었다. 이들은 유대인들에게 교회 예배 참석을 강요했으며,  반유대 시위에 학생이나 도시 불량배들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까지 고문과 잔악한  박해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1740년대와 50년대에는  거의 매년  종교적 광신주의자들의  피의 모독(blood libel)이 있었다. 최악의 사건은 1768년 폴란드 귀족사회의 반대 단체와의 충돌이 있었다. 쩨렌쯔니악(Zhelezniak)이 이끄는 깡패들이 동부 폴란드를 장악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우만(Uman)의  중요한 한 성채를 공격하여 많은 유대인들과 귀족들을 살해 했으며, 이  때에 처형된 사람은 20,000여명으로  그 중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요약하면,이 시대의 유럽에 살던  유대인들의 지위는 매우 보잘것 없었으며 전체주의자들의 태도는 거의  중앙집권적인 통치의 힘을 위하여 소수민족이나 단체들의 자치적 힘을  거의 인정하지  않았다. 한편,"계몽된"  전체주의자들은 소수 민족을 "변형" 시켜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그들의 인권을 존중하면서 유대인들의 통합을 꾀하였다.

 

㈐ 계몽주의의 결과와 프랑스 혁명
  16세기의 종교개혁으로 인한  변혁 만큼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유럽의 변화는 전체주의의  몰락과 개인주의의 탄생으로  나타났다. 개인의 양심의 자유와 평등이 존중되었으며,  이는 곧 유대인들의 법적  지위를 위한 투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중세 종교, 사회  조직의 체제가 붕괴되면서 인식된 유대인들의 '자리매김'은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통하여 이룩된다.
  프랑스 혁명은 평민들의 귀족들에 대한 불만과 혁명 사상으로서의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이루어 졌다.  계몽사상은 17세기에 시작된 과학자들-갈릴레오, 뉴턴, 테카르트, 호이헨스, 파스칼등-에  의해 이룩된 과학 혁명과, 사회 과학자들-로크(사회계약론), 콩도르(낙관주의), 아담  스미스(자유 방임론), 루소(자연법, 교육, 인간불평등 기원론), 볼테르(리신론)등-에 의한  인간의 리성 발견을 기본 원리로 하고 있다.


  1789년 8월  말 루이 16세의 삼부회가  사라지고 프랑스 국민의회가 발족하였다. 국민의회는 [인권선언](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에서 다음과 같이 공포하였다:"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며, 어떤 인간도 자신의 신앙으로 인하여 침해 받지 아니한다".
  이보다 조금 앞선 1786년  미국의 버지니아에서 선포된 [종교 자유를 위한 헌장](Acts for establishing Religious Freedom)에서도 역시 "모든 인간은 어떤 종교의 예배, 장소, 사역에 강요  받지 아니하며,...어떤 종교적 입장이나 신앙에 의한 고통에서 배제된다. 모든 인간은  종교 문제에 있어서 그들의 입장을 지키기 위해 논쟁하거나 고백하는 것은 자유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물론 이와같은 선언이 유대인들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는 논리적 근거가 된 것은 사실이나 즉각 이 개념이 실천-시행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단지 프랑스 혁명의 정신과 목적을 반영하는  추상적인 원칙 - 다양한  부분의 관심, 전통 개념과의 상호 균형 -의 선언일 뿐이었다. 앉아서 이러한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 나폴레옹(Napoleon)과 유대인
  1793년 국왕인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도덕 공화국을 세운 자코방파는 대중들의 지지를 얻기에는 그들의 이상은 너무 추상적이고, 그 실천은 너무나 폭력적이었다. 1795년 가을, 불만에 찬  파리 시민들이 봉기 했을 때 국민 의회를 위기로부터 구출해 준 나폴레옹은 해방의 원칙(Emancipatory Principle)을 지키려는 자들과 이를 반대하는 자들 사이에서 발생한 정치적인 충돌을 계기로 권력을 얻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급기야 1799년 국가  지상주의(Statism)를 내세우며 중앙집권적인 군주제를 부활기키면서 황제에 등극하였다.


  그는 외국과의 전쟁에서 계속 승리함으로써 유럽 전역에 걸쳐 그 세력을 뻗어 나갔다. 그러나 프랑스의 팽창주의는 여러 나라들의 강력한 반발을 일으켰으며,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이탈리아등지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마침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는 그를 엘바섬에로의 유폐(유폐)로 막을 내렸다.


  한편, 유대인에 관한  문제는 알사스-로렌(Alsace-Lorraine) 지방의 주민들이 유대인들에게 빚 문제를 제기하면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 문제는 프랑스 국민의회에 상정되어 유대인을 위한  특별법(special laws for the Jews)을 제정하려고 하자, 이 법이 평등 원칙에 위배된다 면서 거부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1년동안 유대인에 관한 모든 안건을 토의할 기구를 두도록 하였으며, 동시에 [유대인 저명인사 의회](The Assembly of Jewish Notables)를 구성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1806년 7월 이  기구가 설치되어 유대인들에게 제기된 12개의 질의서 -일부다처 및 이혼에 대한 유대인들의 의견, 프랑스와 프랑스 국민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 유대 자치 기구의 권위 문제,  유대인들의 고리대금업과 직업문제 등 -를 토의하여  응답하도록 하였다.  이 의회는  1807년 2월에  [대산헤드린](The Great Sanhedrin)으로 개편되어 이 문제를  토의한 후, 9개 결의안을 발표하였다. 나폴레옹에 따르면 이 결의안은 프랑스안에서 "모세종교의 조직"을 발표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1808년 3월에는  유대인들의 지위를 규제하는 두 칙령이 공표되었다:1)프랑스 안에서  공동체의 계급적  조직(hierarchical organization  of community in France)을 규제하며, 모든 개인 또는 단체의 일은 파리에 있는 중앙 감독원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2)불명예스러운 선언(D cret  Infame)으로 불리워지기도 하는 이칙령은 유대인에 대한 모든 대부(loans)를 통제하며, 무역 거래를 위해서는 특별허가를 받아야하며, 아울러 다른 지역에서 프랑스의 북동지역으로 이주하기를 원하는 자는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이와 같은  변화된 조처는 다른 전체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안에서 유대인을 통합하려는 의도를 실천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으며, 동시에 국가를 종교보다 우위에 두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영향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다시 게토(Ghetto)로 돌아 갔으며,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동등권은 국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폴레옹에 의해 수여된 것이다"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이다.
  요약하면 17-18세기 유럽의 정치적,  사회적, 정치적 변화는 유대인들의 법적 지위에 서서히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특히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유대인들에게도 전적인 동등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권력의 개입과 함께 인정됨과 동시에 그들의 목적에 이용되어 왔다. 절대군주들 처럼 이들은 그들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이 일을 진행 시켰으며, 유대인들을 "통합"(integrate)하고 "개혁"(reform)하려는  의도가 컸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조항들은 자주 바뀌기도 하였으며, 그  시행이 지연되기도 하였다. 17-18세기 말까지는 적어도 유대인들의 완전한 법적 동등성을 확보하기 위한 과도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③ 동유럽 유대인들의 내적 투쟁


㈎ 정통 유대교의 쇠퇴
  유럽에 있던 유대교의 외적인 상태와 정신적 상황의 변화는 그들의 신앙과 사상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주었다. 즉 그들은 1,500년 이상 지켜온 율법-탈무드 전통이 점차 쇠퇴해 가면서  전통적인 랍비들의 경건성이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즉 계몽주의와 더불어 정통 유대교의  율법주의는 쇠퇴해 갔으며, 주변 세계와의 접촉과 교류, 특히 유럽의  새로운 교육제도와의 만남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1,800년경 서유럽에서는 존경받을 만한  탈무드 학교가 없어졌으며, 동유럽에서 조차 이러한 학문적 전통은 낡은 형태에서 벗어 나지 못하였다.

 

㈏ 신비주의의 발효(Jacob Frank와 그의 종파)
  극단적인 사회주의를  배격하는 폴란드의 유대  사회는 그것과 대조되는 신앙과 종교를  일으키기 위해 신비주의를  발효시킨다. 1750년 야콥 프랑크(Jacob Frank)는 포돌리아(Podolia)  태생으로 [남은  안식주의자](Sabbatean Remnants)의한 분파를 만들었다. 이들은 "탈무드에 반대하는 유대인"으로 규정되어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했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성육(incarnation)하심과  삼위일체(trinity)를 믿으면서 예루살렘에서의 이스라엘의 구원을 거부하던 자들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는 탈무드를  공개적으로 불태웠으며, 그를 비판한 주교가 갑자기 죽자 더욱 기승을 부렸다.

  1759년   프랑크 신봉자들은 "유대인들이  제의의 목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피를 사용하고 있다"고 소문을  퍼뜨리기도 하였다. 기독교로 개종하겠다는 그의 요청이 교회에 의해 거절되면서  그는 13년간이나 체스토코바(Czestochowa) 성채에 감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르는 수백명의 유대인들은 계속적으로 불어만 갔다.
  프랑크는 카발라식 안식주의자(Kabbalistic Sabbatean) 전통을 정치 사상의 흔적으로 연결시켰다:"폴란드는 선택된 땅이요,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군대의 힘이 필요하다". 그는 군대를 조직하였으며, 다른 나라들과는 다른 정치적 제도를 구상하기도 하였다.
  1772년 러시아가 폴란드에  들어오면서 프랑크는 다시 석방되어 독일의 오펜바하(Offenbach)에 정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가 죽고 난 후 그의 딸이 지도자가 되었으나 19세기 초에 이 운동은 사라지고 만다.

 

㈐ 바알 쉠 토브(Ba'al Shem Tov)와 하시딤 운동(Hasidism)의 시작
  "선한 사람들의  주인"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랍비  바알  쉠 토브(R.Israel ben  Eliezer Ba'al Shem Tov,1700-1760) 은  포돌리아(Podolia) 태생으로 가난하게 살았다. 젊어서 그는 회당의 보조 교사였으며, 몇 년간의 명상과 독신생활 이후 그는 기적을  만드는 사람(Ba'al Shem or Miracle Worker)이 되었다. 그후 그는 종파의 지도자가 되어  몇 장의 편지외에는 남긴 것이 없지만 그의 가르침과 인격은 큰 힘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금욕적인  카발라주의자들(ascetic   kabbalists)과  안식주의자(sabbateans)들과  접촉하기도 하였으며,  나아가  밀의적(밀의적)  신비주의 원리(esoteric mystical theories)을 발전시켜 나갔다. 당시에는 극단적 밀의종교가 널리 퍼져 있었으며, 칸트 철학자였던 솔로몬 마이몬(Solomon Maimon)은 밀의적 실천을 통하여 죽음을 서둘렀던 자로 잘 알려져 있었다.
하시딤의 신앙에  의하면 "의(Zaddik)은 세상의  기초이다". 온 세상은 그로부터 나왔으며, 모든 영적, 물질적  부요함은 그에게 통제된다. 의은 하나님의 결정조차 바꿀수 있는 유일의 힘이다.
 

 또한, 하나님과의  교제(devekuk,'붙다','풀')는 특별히 중요하다. 화해(memuza,'mediating')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필요하다. 하시딤의 기본 원리는 "하나님을 위해 비워 놓을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신은 모든 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에 의의 지도자들의 중심 목적은  모든 물질세계의 세포(kelipot)에 감추어져 있는 신의 빛을 표출시키는 일이다.
  이들의  가르침의  핵심은 열정,  백열상태(life  of  fervor)와  초월적인 기쁨(exalted joy)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들은 '초월', '영원', '위'등의 용어를 즐겨 사용하였다.하시딤 운동은 메시아에 대한  대망 사상을 약화 시키지는 않으나 이를 현재적, 내재적 개념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1747년  새해에 그가  경험한  신비적인  환상은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수레(divine Chariot)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으며, 그의 가르침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져 두루  퍼지게 된다는 약속을 받았다는 것이다. 1760년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그때까지 이것은 '운동'(movement)으로 제도화 되지는 않았다.

 

㈑ 하시딤 운동의 구체화
  마기드(Maggid,'설교가',cf.삼하15:13)는 14세기  중세 때의 "떠돌아 다니며 설교하는 사람"(Wandering  Preacher) 혹은 "대중 설교가(Public Preacher)로서 16세기에는 "조직되어 있지 않은 지식계급"(non-establishment intelligentsia)으로 불리우는 사람들이었다.
  도브 바엘(Dov Baer of  Mezhirech)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바알 쉠 토브의 제자들은 하시딤  운동의 여러  사상들을 구체화  시켜 나갔다.  특히 랍비  야콥 조셉(R.Jacob Joseph of Polonnoye)은 첫 번째 하시딤 운동에 관한 책인 [야콥 조셉 전승](Toledot Jacob  Joseph,1780)을 출판하였다. 그는  기도를 하시딤 운동의 기본강령으로 강조하였다. 또, 동물의 제의적 도살,  공동식사, 안식일이나 절기 식사중에 행하는 의에 관한 설교등이 특별히 강조 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대설교가들(Great Maggidim)으로써  레비 이삭(R.Levi Issac of Berditchev),  미카엘(R.Jehiel  Michael  of  Zloczow),  엘리멜렉(R.Elimeleh of Lyzhansk)등 많은 랍비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