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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

Joyfule 2016. 5. 30. 20:25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

 

(4) 반유대주의(Anti-Semitism)


① 반유대주의의 실상과 허상
  우리는 앞서 중세 유럽인들이 토의하였던 유대인에 관한 입장을 정리해 보았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만나지게 되는  유럽인들의 경향 가운데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 의식이  매우 깊게 깔려있다는 점이다.  어디서부터 이러한 문제의 발단(발단)이 있는가? 특히 종교적 관점에서의 차별은 단지 중세의 정치적 경향으로 치부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아 보인다.
나아가 근세를 지나 현대로  오면서 시작된 유대인의 독립 운동인 시온주의의 기원이 "반유대주의는 시온주의를 낳았다"는 말로 요약되고 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현대 이스라엘의 독립을 향해가는 유대인들의 시온주의  운동의 배경을 이해 하기 위해서 반드시 반유대주의를 집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우리는 먼저 반유대주의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의 시작도 점검해 보아야 한다. 이 이념이  형성되고 발전되게 되는 여러 동기들과 그 과정도 중요하게 취급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반유대주의는 또 다른 이념적 허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② 반유대주의(Anti-Semitism)는 존재 하는가?
  유대인에 대한 미움은 한 시대의 유대인에 대한 나쁜 감정일 뿐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오랜 역사적  과정에서 발전된 하나의 체계적 이념인가?  이러한 질문은 반유대주의의 정체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질문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반유대주의가 하나의  실체로 이해되기에는 너무나  추상적이며, 조작된 허상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구체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는데 있다.
이스라엘의 전수상  이쯔학 샤미르(Izhak Shamir)는  "나는 지구상의 어디에서도 반유대주의라는 이름의 망령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유대인을 미워하는 사실만이 존재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프랑스의 지성인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반유대인 사상은 그것이 무엇인지  환영을  가지고   있지  않다(no  illusion).  반유대주의는  형상이  없다(no imagination). 그것은 처음부터 비합리주의(irrationalism)에  바탕을 두고 생겨났다. 다만 그것은 유대인에  대한 단순한 '의견'(opinion)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반유대주의는 하나의 죄악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것을 이루기 위해 준비한다. 유럽인들은  그것이 바로 유대인을 죽이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고 역설하였다.


  이처럼 반유대주의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불확실성이 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한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논의할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구석구석에서는 유대인 공동묘지가  파헤쳐진다든가 유대인에게 불이익이 불법적으로 자행된다든가 하는 구체적이며 조직적인 반유대적 행동들이 수없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보이지 않는 유대인에 대한 미움의 뿌리가 존재할 뿐 아니라, 그것이 오랜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자라나  하나의 실체로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사실은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Holocaust)을 통하여 확인 되었을 뿐이다. 이 사건은  유대인들의 문제를 하나의 '집단적 사건' 또는 '실체적 현상'으로 보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반유대주의의 정체를 분명하게  파악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의 기원을 역사적 맥락에서 점검해 보아야 한다. 이 아이디어가 형성되고 발전되게 되는 여러 동기들과 그 과정도 중요하게 취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가 파악하려는 반유대주의는 또 다른 허상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③ 반유대주의의 기원(Origin)과 정체(Identity)
  반유대주의는 하루 아침에  탄생되지 않았다. 반유대주의의 역사는 유대인의 역사 만큼이나 오래된  일로써 수 세기에 걸쳐 축적되어온 문제이다.  에집트의 바로왕이 단지 노예들의 인구가  불어 난다는 막연한 이유로 인하여 히브리 노예들에게 행한 박해, 수산궁의 하만이 모르도개와 그의 백성에게 행한 대학살의 음모 ,헬라 시대의 마카비 전쟁을  통한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의 갈등, 로마시대의 제1차,2차 유대 반란을 통한 대학살과 도미티안(Domitian), 하드리안(Hadrian) 황제등의 개인적 감정을 넘어서는  유대인을 향한 로마 정책, "아말렉이 너희에게 어떻게 하였는지를 기억하라"는 말씀- 여기서 강조하는 점은 적(아말렉)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적이 너에게 한  일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등 수없이 많은 원인이 불명료한 미움과 박해 사건들이 성경안에도 기록되어 있어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타국인들의 이해의 정도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유대인에 대한 미움과 박해의 원인을 유형별(typological)로 분류해 봄으로써 역사적으로 발전되어  온 반유대주의의 뿌리와 정체를 함께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 종교적 반유대주의(Religious Anti-Semitism)
  고대 이스라엘 사람 혹은  유대인에 대한 미움은 소수의 유일신 신앙 공동체(the Monotheistic Minority)와  다수의 이방 제국(the Mighty Pagan Empires)과의 갈등의 결과로 설명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종교 사상은 유일신 신앙에 기초하고 있다. 유일신  사상은 원칙적으로 다신교를 숭상하는 열국들과의 종교적,정치적 타협을 거부한다. 따라서  그러한 태도는 늘 힘센 열국들로 하여금 소수의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박해를 가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박해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단순히 정치적 박해로  이해되지 않고 종교적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를  또한 가지게 한다. 수산궁의 하만에 의한 유대인 박해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박해였음에도  불구하고 에스더서는 종교적 해석을 통하여 유대인들의 승리를 칭송한다.
  근대 유럽 사회에서 유대인들이  박해 받은 근거로 제시되었던 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독특한 종교  관습이었다. 안식일을 지키며, 까다로운 음식법(Kashurut)에 따라 살면서 결코 동화되지  않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성격은 지배 계층인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늘 눈에 거슬리는 혐오감이 되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성격은  종종 '선민'(chosen people)이라는  용어로 규정되기도 하였다. 적어도 이러한 종교적 반유대주의는 유럽의  근대 사회가 태동 되면서 개인의 권리가 그의 종교에 의해  차별되지 않아야 한다는 사상이  펼져지던 17-8세기 이전까지는 매우 설득력있는 박해의 근거로 이용되었다.

 

㈏ 사회적 반유대주의(Social  anti-Semitism)
  1세기 로마 제국  내에서의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박해의 근거로써 "유대인들의 반사회적 경향"을 들고 있다(Pliny the Elder). 다시 말하면 로마 사람들의 눈에 비추어진 유대인들은 로마  사회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고 비추어졌으며, 바로 그 원인이  로마로부터 유대인들이 박해 받게 되는 까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적어도 로마인들의 눈에 비추어진 유대인의 그러한 배타적 생활 방식은 물론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앞서 설명한 대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종교적신앙이 그들에게는 반사회적 경향으로  비추어진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적어도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유대인들은 현상적으로 반사회적 경향을 지닌 반로마주의자들로 분류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알렉산드리아의  아피온(Apion)과 마테토(Manetho), 로마의 타키투스(Tacitus)나 세네카(Seneca)에서도 발견된다.
  이러한 지적은  중세 유럽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속한 사회에서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기보다는 유대인끼리만 모여 살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주변의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살아왔다는 것은 어느정도 사실이다. 물론 유대인들  입장에서 볼 때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한 변명이 없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타인의 눈에 비추어진 유대인의 모습은 그러하였다.

 

㈐ 신학적 반유대주의(Theological anti-Semitism)
  기독교 세계에서 반유대주의는 예수를 박해한 유대인들 스스로 짊어지게 된 '피 값'이라는 의식이  팽배하게 지배하면서 얻어지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과의 관계 변화의  싯점을 유대인들에 의한 예수의  처형 이 후로 잡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초기 기독교는  점차 유대교를 비판하고 거부하여, 그들로 부터 분리되어 나옴으로써 '자율적이며 독자적인' 종교로 발전해 나갈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가장  강력한 역사적 근거로써 예수의 유대인에 의한 박해 받음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는 기독교의  자기 동일성(Self-identity) 확보를  위한 유대인 혹은 유대교에 대한 신학적 거부로 설명된다. 특히 기독교의 구속사적 신앙(Heilsgeschichte)에서 볼 때, 유대인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를 죽임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백성이 되었으며,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낡은 이스라엘(Old Israel)은 새  이스라엘(New Israel)로  대치되었으며, 옛 계약(Old  Covenant)은 새 계약(New Covenant)으로  교체 되었다. 구약(Old  Testament)은 신약(New Testament)의 빛 아래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그들이 당한 모든 역사에서의 고통은 하나님의 섭리(계획)하심이라는 신학에 의해 뒷받침 되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을 박해하는 일에  대한 도덕적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하나님의 계획'과 '자기들의 폭력'을 구별하지 않았다는데 그 오류가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입장에 서 있는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신학적 태도와 윤리적 논점을 혼돈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이 의식은  2,000년간의 기독교 교회사에서 일관되게 주장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기독교 교회는 시대마다 일어난 유대인 박해사건을 '유대인의 예수 배척의 귀결'로  보았고, 유대인들은 이를 '무고한 피흘림'으로 이해했다. 적어도 중세의 교회는 이러한 시각에서 유대인들을 판단하고 박해하였다.

 

㈑ 정치적-인종적 반유대주의(Political-Racial Anti-Semitism)
  근세-현대에 오면서 이러한  여러 유형들의 반유대주의 사상들은 유대인들의 시민으로서의 동등한 권리를 제한 함으로써 보다 정치화 되어 갔다.  특히 유럽 사회에서의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비인간화는 유대민족에 대한 생물학적 인종차별(racism)로 나타나기에 이른다.
  이러한 형태의 새로운  반유대주의(Der neue Antisemitismus)는 그 동안 계속되어 오던 여러 형태의 반유대주의의 종합적인 축적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현상은 단순히 한 쪽 측면-그것이 종교적이든,사회적이든,정치적이든 간에-에서만 해석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박해는 역사적으로 타  민족에게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러한 정치적 반유대주의는 늘 지배 체제-그것이 로마의 네로 황제이든 독일의 히틀러이든지 간에-의 유지를 위한 정치적 수단 또는 목적으로 이용되어 왔다.

 

④ 현대 반유대주의


㈎ 특성
  현대  반유대주의(Modern  anti-Semitism)는  초기  반유인  운동(Early anti- Jewishness)와는 구별된다. 초기는  주로 유대교의 종교적 관습 및 전통에 대한 이방세계 혹은 기독교 세계의 증오로부터 시작 되었다면, 현대의 그것은 수세기에 걸쳐 내려온 이러한 유럽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의식이 유대인에게 정치적, 조직적 박해의 형태로 나타난다.  유대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반유대적 감정은 그런 점에서 매우 이념적이고 종교적인  것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나, 드러나는 현상은 잠재의식적 수준을 넘어서는 매우  정치적인 것이어서 그 현상이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적어도 유럽인들의 눈에 비추인 유대인의 배타적 신앙과 생활 방식으로부터 싹트기  시작한 반유대주의는 급기야  유대정신(Jewish spirit)의 파괴를 선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독일에서는 유대인의 인종적 열등함이 강조 되면서 인종차별주의자(racist)와 연합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현대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의 역할이나 영향에 대해 투쟁하려는 목적을 가진 유럽인들의 조직 및 정치적 정당의 확산이라 특성지울  수 있다.이는 유럽 사회가  지닌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법으로써 "Jewish Question"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념적 뿌리(ideological roots)
  17-18세기의 유럽의 변화는  합리주의적 사상의 지지자들이 이끄는 반전통주의자 써클(anti-traditionalist circles)을  만들었다. 이들은 특히 그들의 전통 및 종교적 신앙과 분리될  수 없는 유대인들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한편, 유럽사회주의자(Socialist)들은 유대인의  사회적 역할과  유대교의 본질사이의 관계를 부정적인 태도로 보았다. 이들은  유럽 공산주의의 발전에 있어서 유대인들의 반사회적 경향(anti-social tendency)을 강하게 비판했다.
  또 사회적 진화론(social Darwinism)은 인간의 역사나 사회의 발전을 자연과학적인 적자생존 이론에 적용시키면서,  인간은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으로부터 적응, 발전해 나가는  것이기며, 따라서 우생학적으로 열등한 '종족'(race)은 도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유대인들은 아리안족(Aryans)과는 달리 정치적으로나 문화적 성취력,도덕적-사회적 가치로 볼 때 열등한 '종족'으로 규정하였다.

 

㈐ 사회적 뿌리(social roots)
  유럽 사회의 변화는 정치의  민주화를 가져왔고, 이는 보다 많은 국민들이 보다 넓은 정치 영역에  참여하여 책임을 나누는 역할이 보다 더 강조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가 보다 큰 반유대주의를 부축이게 된 것이다.
  유럽에서의 '자유사회'(free society)는  보다 자유로운 경제적 경쟁, 이 결과로 야기되는 독점상태의 몰락을 가져  왔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주의는 국제적 길드(gilded International)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오히려 이익이 되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경제적 힘은 '악한 유대인'(evil Jews)이라는 중세의 망령을 다시 불러 일으키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유럽의 경쟁자   혹은  반대자들에게   있어서  유대인   경제가인  로스최일드(Rothchild)는 세계  경제와 증권 시장을 지배하는  지배자의 상징이었다. 또 막스(K.Marx)와 라살(Lassale)은 유대인  혁명가의 상징으로, 보에르네(Boerne)와 하이네(Heine)는  극단주의적  문학가  혹은  저널이스트의  상징으로, 번하르트(Sarah Bernhardt)는 극장을 지배하는 상징으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요소들은 반유대주의자들로 하여금 보다 큰 정치적 힘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 독일에서의 반유대주의 운동의 조직
  독일에서의   반유대작가들의  활동은   카톨릭   잡지인  [게르마니아](Germania) 로부터 시작된다.  저널이스트인 오토 글라가우(Otto Glagau)와 윌리암 마르(Wilhelm Marr)는 유대교와 독일주의  사이의 생사를 건 투쟁으로써 국가의 문제들에 관한 여러편의  기사를 쓰면서, '반유대주의'(anti-Semitism)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1878년 기독교 사회운동가 당을 만든 아돌프 스토커(Adolf Stoecker)는 반유대적 연설을 통하여 유럽인들을  자극, 선동하였으며, 1879년말과 1880년에 이르러 독일은 반유대주의 운동은 중심이 되었다.
  역사가이며 교수였던 하인리히  트로츠키(Heinrich Treitschke)는 유대인들이 독일 문화와 사회에 동화되어 가는 것 자체를 독일-유대적 잡종('mongrel')문화의 탄생이라 하여 거부하였으며, "유대인은 우리의 불행"(the Jews are our misfortune)이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가장 극단적인 주장을  한 사람은 두링(Eugen Duehring)으로써, 그는 유대민족의 여러 성격을 공격할 뿐 아니라 유대인 피에 대한 중상 모략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고대 히브리 민족이 행하던 인간제사(human sacrifice)를 공동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사건으로 보아 반유대주의의 근거로 삼기도 하였다.
  이러한 독일 내에서의 반유대주의  운동은 동유럽 전체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러시아 지도자였던 알사코브(Aksakov)는 1881년에 "최근 유럽문화를 리드해 나가는 독일에서 시작된 반유대주의 운동은  종교적 불관용, 미숙한 무지등에서 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이것은 너무  뒤늦게 일어난 대중의 각성의 증거이다. 서유럽의 기독교 세계는 이 일을 주시할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반유대주의의 첫 국제' 회의는  1882년 말 드레스덴(Dresden)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유대인때문에 위험하게 된 기독교 국가의 정부와 국민들에게 드리는 선언문"이라는 제목으로 회의 결과를  출판을 하였다. 이 문서는 모든 도시에 유대인과 투쟁하기 위한 위원회를 두도록 요청하고 있으며, 이 위원회는 [국제 기독교 동맹]으로 단일화 하자고 제의하였다. 1883년에 열린 제2차 회의에서는 이 운동의 연합 이념으로 두링의 이론을 채택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이 운동의 기초를 인종주의에 두려는 것을 반대한 사람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헝가리에서는 국회부의장이었던  이소크치(Isoczy)가 반유대 발언을 시작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의  추방을 주장했다. 모든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으로 보내 그곳에서 유대국가를 세우도록 충고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도 돈(재정)과 말(언론)을 통제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추방을 선언했다.

 

㈒ 동유럽 국가의 정부의 공식적 정책(official government policy)으로서의 반유대주의
  러시아에서의 반유대주의 운동은 알렉산더 II세때 까지만 하여도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1881년 혁명으로 인하여 죽고 알렉산더 III세가 등장하면서 진보적  경향에 대한 어떠한 양보도 하지 않았다. 다시말하면 러시아 안에서 유대인들의  수가 점차 불어나고 그들의 경제적 지위와 힘이 향상 되자 러시아인들은 이들에게서 위협을 느끼게 된다. 급기야 1881년 4월 29일  러시아의   남서지방에서  반유대인   폭력 시위를   시발로  엘리짜베가르트(Elizavetgrad)에서도, 키에브(Kiev)에서도, 5월에는 오데사(Odessa)에서 연속으로 일어났다. 살인과 약탈, 방화와 강간등이 도처에서 자행되었다.
  특히 젊은 유대인들은 중학교나 고등교육 연구소등에서 교육받을 기회를 박탈 당했으며, 정부가 반유대주의 신문을 발행했고, 반유대 정책을 정권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1911년 키에브(Kiev)에서  발생한 사건 중 "유대인들은 그들의 제의의 목적으로 필요한 기독교인의 피를 얻기 위해 기독교 소년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멘델 베일리스(Mendel  Beilis)는 러시아 안에서 유대인들을 공식적으로 박해하는 보다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루마니아에서는 유대인들의 은행  소유를 법으로 금지하였고, 정부는 반유대주의 운동 단체들에게 재정 후원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럽 각지에서의 유대인 박해운동은 유대인들의 독립을 위한  이념 확립 및 국민 운동으로서의 시온주의 운동을 더욱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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