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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존스의 목회사역과 독서생활

Joyfule 2018. 8. 30. 02:46



 

  

로이드존스의 목회사역과 독서생활


1. 로이드존스의 목회사역들 연혁

 

1-1 로이드존스의 출생과 그 마지막 삶까지

 

D. M 로이드존스는 1899년 12월 20일 웨일즈의 카디프에서 태어 낳습니다. 그리고 1981년 3월 1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갔습니다.

먼저 그는 내과 의사로서 수업을 받았고 왕실주치의로서 유명하였던 호오더 경의 조수로서 미래가 보장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1년 이상의 소명에 대한 부담감으로 고민하다가 1927년 미래가 보장된 의사의 생활을 마감하고 목회자로 부름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당시에 전 유럽의 신학교에는 자유주의가 신학이 지배하고, 고등비평이 난무함으로 신학을 한다는 것은 거의 신앙의 잃게 되는 뻔한 길임을 알고 그는 신학교에 들어가지 않고 바로 설교자로 임명을 받아(우리와 약간다름) 아베라본의 센드필드에서 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목회를 시작하면서 신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목회를 하면서 신학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으로 초기에 그는 자신의 설교와 사상에서 약간 쏠려 있었고 그는 자신의 그러한 약점을 알고 많은 독서로서 교정을 하여 나갔습니다.

그리고 1938년 버킹험 게이트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채플에 담임목회자인 캠벨 몰간 목사의 동사 목회자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는 1943년에서 그 교회 담임 목사가 되어 1968년 8월 은퇴할 때까지 웨스트민스터에서 목회를 계속하였습니다. 그 다음 그는 순회 설교자로서, 저술가로서 남은 생을 주를 위해 섬겼습니다. 1981년 3월 1일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영원한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갔습니다.

 

1.2 샌드필즈의 특이한 설교자.

 

로이드 존스가 목회를 시작한 곳은 가난한 지역이었습니다. 당시는 경제 공황기였고 샌드필즈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실직상태에 있었습니다. 샌드필즈 주민 약 90%는 당시 아무런 예배처소에도 참석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가 목회를 시작했던 1920년대 중반의 웨일즈 지역 목회자들 사이의 신학적인 기류는 더 이상 역사적인 칼빈주의가 아니었습니다. 옛 낙관주의적인 자유주의였습니다. 그럼으로 신앙이 침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역사적인 칼빈주의에다 메소디스트로 이곳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부임한 즉시 웨일즈의 그 장로교회는 끊임없는 회심을 통하여 성장해 갔습니다. 동네에 악명 높은 사람들과 주정뱅이들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교회에 다니기만 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그의 아내도 포함됩니다. 그의 사역 맨 처음부터 성령의 예외적인 기름부음이었습니다. 그의 설교의 영향은 이내 아베라본 동네에만 한정될 수 없었습니다. 1930년 초부터 웨일즈 지역 순회 설교는 정규적인 그의 사역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 당시 그의 전도 설교를 [전도 설교]라는 책에서 볼 수 있습니다. 11년 반 동안의 그의 사역을 통해서 교회는 93명의 등록교인에서부터 530명의 등록교인으로 성장했고 평균 예배 출석은 850명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통계는 한국 상황에서는 별로 놀라운 것이 못된다고 할지 모르지만 해마다 기독교의 세력이 눈에 띠게 감소되는 영국 상황에서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영국이라는 특성을 고려하여 본다면 대단한 사역들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사역에 대한 평가로서 로이드 존스는 1930년대 공산주의로부터 남 웨일즈를 지킨 두 사람중 한 사람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의 전기 작가 이얀 머레이는 이 시기에 로이드존스는 "성령의 능력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미친다"는 평생 불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곳의 사역을 마치고 그 곳을 떠나 영국으로 떠나게 될 때에 어떤 사람에게 어떤 기자가 이러한 질문을 하였다고 합니다. 왜 로이드존스가 떠나기로 결심하였는지? 에 질문에 대하여 이 사람이 "나는 잘 모릅니다. 오직 내가 아는 것은 조금도 그 자신의 생애를 위해서 결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기도 끝에 내린 결정이라"는 것이다. 그의 목회에서 그의 설교가 힘이 되었던 것은 이와 같이 그의 청중들이 그를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그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바로 목회에 설교와 더불어 인격이 일치되는 통전성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설교자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더불어 그의 인격과 그의 기도가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현대 설교자들이 이러한 부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데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1.3 런던의 탁월한 설교자

 

그의 런던의 사역은 1938년부터 1968년까지 30년간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계속됩니다. 2차 대전에는 교회당이 폭탄에 맞아 많은 사람이 모이던 교회당에 150명 정도만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런던이 어려운 시기에 있을 때에 그 교회를 담임하는 새로운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 난 뒤에 약 500명의 성도들이 모여서 새로운 교회를 시작한 샘이 됩니다. 1951년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주일 예배에 약 2500명이 참석하는 런던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런던에서 사역하는 동안 줄 곧 주일에는 45분 정도의 설교 두 번과 금요일 밤에는 또 한번 같은 길이의 설교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그 설교가 너무 짧다고 느꼈습니다. 여기서도 그의 설교 사역은 런던에만 한정될 수 없었습니다. 주간에는 대영제국 각 곳에 다니면서 설교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런던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잘 알려진 복음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캠벨 몰간의 역사적인 계승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강해 설교의 왕자"라는 그의 칭호를 계승한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독특한 설교방식을 발전시켰습니다. 성경 한 책에 대한 연속 설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베드로후서 강해 설교(지상우 ,CLC)이다. 그리고 21년 동안 계속하여 그와 같은 연속설교를 했습니다. 그 중에 유명한 것이 산상설교(문창수 , 정경사)와 5년에 걸친 에베소서 강해설교, 12년간에 걸친 로마서 강해설교 이다. 이러한 책들을 구하여 반드시 읽어 보십시오 여러분의 설교가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책들이 있습니다.

 

그는 사역초기부터 1935년경부터 I.V.F 와 관계를 맺었고 후에는 그 총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국제 복음주의 학생연맹의 의장이 되었습니다. 그가 탁월하게 의장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 I.V.F는 그 세력이 확산되었고 경건주의와 복음주의적 단체로 알려진 IVF에 건전한 교리적인 뼈대를 제공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그의 탁월한 설교 사역의 결과로서 그는 [웨스트민스터 목회자 모임]을 창설하여 일단의 목회자들과 함께 신학적인, 목회적인 문제들을 토의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강력한 지도력을 통해서 일단의 젊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청교도 및 개혁주의 대회]를 통해 정규적인 토의장을 창출해서 매년12월초에 한 차례씩 모였습니다. 1967년 이후에는 이 모임은 [웨스트민스터 대회]로 이름을 바꾸어 모이고 있습니다. 로이드 존즈는 그 외에 상당한 기구들이 시작되는데 실제적이고도 영향력 있는 역할을 감당해서 [진리의 깃발]( The Banner of Truth Trust) 라는 출판사와 런던 복음주의 도서관과 런던 신학교(L.T.S)가 만들어지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