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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존스의 목회사역과 독서생활

Joyfule 2018. 8. 31. 06:25

  

로이드존스의 목회사역과 독서생활

 

2. 로이드존스의 신학과 그에게 영향을 미친 것들

 

그에게 있어서 18세기의 칼빈주의적 감리교도의 부흥에 관한 독서들이 크게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18세기의 호웰 헤리스의 책을 13세에 읽고 크게 감명을 받은 것입니다 .

 

그에게 또한 영향을 미친 것이 청교도들의 작품들입니다. 그는 1925년에 리차드 백스터의 전기를 읽고 그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탐독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을 발견하고 청교도주의 극치로 보았다."라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조나단 에드워즈를 소개하기도 합니다. 그의 사위(프레데렉 캐서우드)에게 언제나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도록 권면을 하였습니다.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으십시오 그러면 무언가 건실하고 깊고 참된 것에 돌아가실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의 사상과 목회를 청교도주의 작품들이 영향을 미치며 통제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존 번연, 토마스 굿윈, 존 오웬, 18세기의 설교자들을 사랑하여 그들의 작품들을 읽었습니다. 다니엘 로랜드, 호웰헤리스, 조지 휫필드, 조나단 에드워드, 이들의 작품을 탐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19세기의 스펄전과 워필드의 작품들을 읽어 냈고 그리고 라일의 작품들도 탐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1932년 워필드의 전집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지난 70년간 영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는 그의 신학에 심취하여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의 초기의 전도 설교를 보면 신학자로서는 볼 수가 없었고 그의 사상과 가르침에 바울적 요소가 빈약했었습니다. 그러나 워필드의 가르침의 필요성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주었습니다. 그는 워필드를 통하여 바울이 로이드존스의 교사로서 모델이 되었던 것입니다. " 워필드는 개혁신앙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개혁 신앙이 다른 어떤 신앙체계보다 탁월한 것임을 입증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목회를 시작하는 그때부터 신학에 입문하여 계속적으로 신학을 연구하는 학생이 된 것입니다. 그가 생을 마치는 시기까지도 계속하여 그는 배우는 사람입니다. 목회를 마치었다고 하여 그의 신학연구는 끝이 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신학연구 수업이었습니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체계입니다. 우리는 신학교를 마치면 마치 신학을 모두 배운 것으로 여기고 신학 책을 놓고 맙니다. 그리고 마치 다시 신학 책을 다시 잡으면 이상한 사람을 쳐다보듯이 합니다. 그럼으로 더 이상 배우지 않고 가르치기에 열심히 하지만 고갈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이드존스는 배우는데 있어서 계속적으로 배우며 그것을 위하여 오전 시간을 연구하는데 바쳤습니다. 그는 초기에는 불명확한 부분들이 있었으나 신학을 계속적으로 연구함으로 이러한 부분들을 보충하여 간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는 계속적인 신학에 대한 연구와 성경에 대한 연구로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강해 설교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개혁주의 책들을 많이 읽었으나 더 나아가 포시드나 칼 바르트, 에밀 브르너 본 훼퍼, 불트만, 판넨베르그, 키르크, 한스큉의 저작들 까지고 읽어 나갔습니다.

 

"그는 개혁주의 속한 사람들은 마음과 지성, 믿음과 양심, 경험과 지식, 신비와 이성을 하나의 끈으로 묶어야지 절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참된 이성은 거룩한 신비와 분리 될 수 없다." 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신학이나 영성은 병들고 올바른 신앙이 아님을 말함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지도자들이나 신학생들이 제대로 갖추어진 영성과 신학을 마련하여 될 것입니다.

 

3. 로이드존스 목회사역에서 설교

 

이 부분은 이미 여러 강사님들이 언급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잘 아는 방법은 그의 목사와 설교를 읽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설교의 위치에 대하여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교회가 영적 침체에 빠지고 메말라 버리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설교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설교는 교회의 고유의 임무입니다. "인간의 실질적인 필요를 생각하는 순간, 그리고 성경에서 공개되고 선포되는 구원의 성격을 생각해 볼 때에 교회의 기본적인 임무가 이것을 설교하고 인간의 진정한 필요를 보여주며, 그 유일한 해결책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설교를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임무임을 그는 말합니다. 개인 상담이나 모든 다른 활동들은 설교를 보충하도록 의도된 것이지 대체되도록 의도된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심방이나 다른 어떤 활동도 설교의 부족을 보상해 줄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참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강해이며 말씀의 신실한 강해는 하나님 자신이 설교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반드시 신학적이어야 하며 강해적이어야 하며 설교는 반드시 성령의 능력과 통제아래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의 설교를 읽어보면 마치 신학책을 읽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즉 이것은 그의 설교마다 신학의 총체적인 진리와 조화를 이루어가는 설교이기 때문입니다. 조직신학을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신학을 총체적으로 공부하고 음미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해적어야 한다는 것은 모든 부분이 하나의 설교가 되고 다음주에 이어서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다시 하나의 완전한 체계의 설교가 되어야 합니다. 설교는 항상 성령의 능력과 그의 통제아래서 행해져야만 합니다. 이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항상 자유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설교 준비를 마치고 강단을 올라갈 때에 간단한 메모만 한 것을 가지고 올라갑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강론을 하는 데 그는 자신이 제대로 설교 한 적이 한번, 두 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성령에 완전히 지배되어 설교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설교란 무엇입니까? 불붙는 논리입니다. 웅변적인 이론입니다. 설교는 불타는 신학입니다. 불을 댕기지 못하는 신학은 결함이 있는 신학이요 최소한 그 사람의 이해에 결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라는 것은 속에서 불이 붙은 사람을 통해서 나오는 신학입니다. 진리의 참된 이해와 경험은 여기로 인도합니다. 다시 말하면 한사람이 이러한 진리들을 열정 없이 말할 수 있다면 그는 강단에 올라설 아무런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강단에 올라서도록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그는 설교를 준비하는데 있어서 설교를 위하여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의 주변에는 메모지가 준비되어 성경을 읽으면서 주님이 주시는 조명에 민감하여 그것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언제나 기록하고 그것을 설교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언제나 설교가 메말라 있지 않고 풍성한 설교자이었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위하여 성경을 읽는 일에 대하여 그는 경멸히 여기고 있고 다음 주에 설교를 하여야 하기 때문에 설교를 준비하는 것을 설교꾼으로 경멸히 여깁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성령에 민감하여 성경을 읽는 자세가 필요하고 설교는 언제나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설교는 해서는 안되는 행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