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차드 백스터
백스터는 케임브리지나 옥스퍼드와 같은 명문대학에서 교육받은 대부분의 청교도 지도자들이 누린 특권이 없었다. 그는 자기 혼자의 힘으로 교육의 길을 찾아야 했다. 그는 자기 단련의 힘으로 배움을 터득하여 최고의 청교도 저자들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는 잉글랜드 국교회에서 안수를 받고 키더민스터(Kidderminster)의 목사로 부름을 받았다. 이곳은 그가 도착했을 때에는 영적 황무지였다. 백스터는 뜨거운 열정으로 심방과 전도 사역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키더민스터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고 회중의 규모를 크게 확대시켰다. 청교도들은 '부흥'(revival)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성령 사역은 '성령의 방문'(A visitation of the Spirit)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나을지 모른다. 이곳에서 일어난 일에는 그 뒤로 신자들을 자극하고 상상과 열정을 불붙이게 하는 무엇이 있었다.
1662년에 백스터는 결혼했다. 그의 아내 마가렛은 뛰어난 영적, 천부적 재능을 가진 자였다. 백스터는 자기 아내가 죽은 뒤에 그의 전기를 썼다. 패커 박사(Dr. Packer)는 이 전기를 읽으면 청교도들이 냉엄하고 비인간적이었다는 오해를 씻개 해 준다면서 추천하였다. 백스터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한 박해를 받았고 대축출(The Great Ejection) 이후에 투옥되었다.
시민 전쟁 동안 백스터는 크롬웰 군대의 군종이었다. 그는 1662년의 대숙청 이후로 비국교도들의 지도적인 대변인이었다.그는 가급적 여러 줄기의 입장들을 하나로 모으려는 포용적인 접근을 하였다. 그러나 백스터는 이처럼 다변적인 영역의 한 지도자로서는 그가 목회 영역에서 성공적이었던 것만큼 비례적으로 실패하였다. 그는 1685년에 대법관인 제프리 앞에서 잉글랜드 국교회를 비판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제프리 대법관은 일체의 청교도주의를 증오하였다. 그는 백스터를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백스터를 "세상을 키더민스터의 교리로 타락시키는 악한이며... 잘난체하고 완고한 광신적인 개!"라고 불렀다. 제프리는 백스터를 목 매달아 죽이고 싶다고 말하였다! 만약 공정한 정신을 가진 윗사람들의 영향력이 없었더라면 백스터는 적어도 거리에 끌려다니면서 매질당하는 벌을 받았을 것이다.
백스터는 설교 사역의 침묵을 강요당한 기간 동안 집필에 열중하였다. 그의 『크리스천 핸드북』(Christian Directory)은 실제적인 관점에서 크리스천 생활의 모든 분야를 다루었기 때문에 독특한 책이다. 이 책은 '어떻게...'에 대한 청교도 문서의 대작이다. 크리스천은 어떻게 하나님과 자신과 가족과 교회와 직업과 국가와의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 이런 문제들을 가득히 다루었는데 표준 치수로 잡으면 무려 2천 쪽이나 된다. 이 책은 오늘날에도 실제적인 도움을 준다. 우리도 결혼이나 가족과 같은 실제적이고 기본적인 주제를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의 사회적 문제들을 시대적으로 다르다고 해도 성경의 원칙은 마찬가지이다. 단지 적용은 현대적이어야 할 것이다.
리처드 백스터의 전도서인 『회심하지 못한 자들에게 주는 부름』(A Call to the Unconverted)은 베스트셀러였다. 이 책은 아직도 유용하다. 에스겔서 33장 11절에 대한 그의 강해는 통찰이 깊고 마음을 사로잡으며 전형적으로 청교도적이다. 또 다른 수위권을 누린 책은 『개혁된 목회자』(The Reformed Pastor)이다. 『성도의 영원한 안식』(The Saints' Everlasting Rest)도 유명한 베스트셀러였다. 백스터가 기독교 저자로 명망이 높았던 까닭은 신학적 주제들에 대한 그의 글들이라기보다는 헌신적이고 목회적인 강해서들로 인한 것이었다.
백스터의 신학은 개인적이고 별스럽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신학적 오류는 쉽게 식별되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책들을 읽을 때도 조심해야 한다. 좋은 것들을 배우지만 오류를 피해야 한다. 특히 청교도 전문가인 패커(Packer)는 백스터 전문가이기도 한데 그에 대해서 이렇게 논평하였다. "백스터는 큰 인물이며 성자 같은 사람이다. 목사로서, 전도자로서, 그리고 헌신용 책자의 저자로서 그를 아무리 높여도 부족하다. 그러나 신학자로서는 비록 기발할지라도 일종의 재앙이다. 그는 이것 저것을 마구 섞어 놓았다." 이런 식의 신학 때문에 다음 세대는 교리적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여기서 다룰 형편이 못된다. 다만 백스터의 경우에서 우리는 신학은 매우 조심스럽게 형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존 오웬의 가치가 더욱 드러난다.
백스터는 국내 전도에만 열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해외 선교 사역에도 동일한 열정적 관심이 있었다. 그는 복음 전파 선교회(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를 설립하는데 주역을 맡았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사도'로 불린 유명한 존 엘리옷(John Eliot)은 백스터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백스터는 죽음의 병상에서 『엘리옷의 생애』(Life of Eliot)를 읽고서 인크리즈 매더(Increase Mather)라는 저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는 12시에 거의 죽음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러나 당신의 책이 나를 회생시켰지요. 나는 엘리옷 선교사의 의견들을 잘 알고 있는데 그로부터 받은 편지가 많기 때문이랍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엘리옷 선교사보다 더 존경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의 전도 사역은 곧 내가 갈망하는 사도적 전통입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 영성을 위한 ━━ > 신앙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렌 (Horace N.Allen,安 運)선교사 (0) | 2015.10.31 |
---|---|
알렌 (Horace N.Allen,安 運)선교사 (0) | 2015.10.30 |
콘스탄틴누스,성경변개의 역사 - 오리겐, 유세비우스, 제롬 (0) | 2015.10.28 |
존 찰스 라일 John Charles Ryle (0) | 2015.10.27 |
무디가 능력 있게 쓰임받은 20가지 이유 (0) | 2015.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