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찰스 라일(John Charles Ryle, 1816-1889)
라일은 1816년 잉글랜드 북서부에 위치한 Cheshire의 Macclesfield에서 견직물 제조업을 하고 있던 유복한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은행가에다 의회의 회원이었고, 맏아들이었던 라일은 당연히 그런 아버지의 뒤를 이를 것이란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자라났다. 이튼(Eton) 공립 학교나 그 이후의 옥스포드 대학에서의 학교 생활에서 라일은 운동을 몹시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그는 후일 회고하기를,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크리켓 팀의 주장을 맡아 선두에서 무리를 이끄는 능력을 키우고, 사람들을 유형별로 잘 파악해서 그들이 자신들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 법을 익혔던 그 시절의 경험이 후일 자신에게 닥쳐온 여러가지 다양한 생의 국면들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서 있을 수 있게 해 준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했다.
1837년, 라일은 심한 병을 앓는다. 그는 성경을 읽고 기도함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 한다. 몸이 회복된 후에도 그는 하나님의 손길을 계속 의식하고 있었는데, 회복 직후 몇 달 간을 그로 인해 심한 영적인 갈등을 겪는다. 그는 그간의 성경 공부를 통해 이미 믿음에 관련된 위대한 교리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받는 구원의 복음을 맏아들이지도 않았고, 또 그 복음이 그의 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진리가 될 것인가 하는 사실은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대학 생활에서의 마지막 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어느 날, 그는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가 거기서 에베소서 2:8을 읽는다.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그 말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는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란 사실을 명확하게 깨닫게 된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반환점을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우등생으로 옥스포드를 졸업한 라일은 법률을 공부하면서 아버지의 은행 사업에 뛰어들어 시간제 근무를 한다. 그러던 어느날, 라일家는 은행업의 실패로 갑작스런 풍파를 겪게 된다. 집안은 팍삭 망할 지경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파산 선고를 받았고, 집과 재산은 모두 경매에 넘겨진다. 라일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뼈저린 경험이었지만, 그는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법을 배웠고, 이 일이 있고 나서 오래 지나지 않아 하나님께서 사업보다는 다른 위치에서 그분께 헌신하기를 원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1841년 12월, 그는 영국 국교회의 사역자로 임명되었고, 그 이후 그는 그 즈음해서 거세지고 있던 교회 내외부의 여러 공격들에 맞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관한 진리들을 전파하고 성도들을 돌보는데 일생을 바쳤다.
Hampshire에서 3년간 사역한 뒤, 라일은 잉글랜드 동부 지역인 Suffolk의 Helmingham에서 교회 주관자로 임명된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나머지 36년 간을 그 시골 교구의 사역자로 지낸다. 그는 명확하고 단도직입적인 설교 스타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의 화법은 평범한 남자들과 여자들의 가슴을 파고들었고, 이 스타일은 그의 저술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는 서포크에서 사역을 시작하면서부터 정기적인 저술 활동으로 소책자나 작은 낱장 인쇄물들을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다. 이 저작물들은 그의 생애 동안 약 12,000,000부가 팔려 나갔고, 세계 각지에서 그의 작품을 읽고서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편지가 그의 집으로 날아들었다. 그는 또한 20권 이상의 책을 발간했고, 그 중 <Expositry Thoughts on the Gospels>같은 경우 1856-1859년 사이에 7쇄나 발간되었다. 그리고 18새기에 있었던 부흥 운동과 종교 개혁의 영웅들의 이야기가 담긴 두 권의 역사 전기도 남겼다.
라일은 설교 준비나 교구의 성도 방문, 혹은 글을 쓸 때를 제외한 시간의 대부분을 독서나 공부를 하는 데 썼다. 그는 특히 퓨리탄 목사들의 저술을 많이 읽었는데, 그들의 역동적인 사고와 깊은 영성은 그의 설교와 저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라일은 그 자신의 삶에 밀어닥쳐온 고난과 고통, 그리고 슬픔을 부단히 극복하면서 사역을 수행해 나갔다.그의 초기 삶은 아버지를 도와 집안의 빚을 갚느라고 애쓴 초라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1847년 시작했던 결혼 생활은 삼년이 못 되어서 아내와 사별하는 고통으로 끝이 났다. 그의 두 번째 아내는 결혼 생활 내내 건강상의 문제로 고생하다가 1860년 마지막 숨을 내쉬었고, 그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두 아내를 거치고 난 후 그에게 남겨진 아이는 모두 다섯이었다. 그리고 1861년 그는 드디어 세 번째이자 마지막 아내인 Henretta를 맞이한다. 그녀는 1889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진정으로 라일의 사역을 도와준여인이 된다. 당시 영국 국교회는 많은 논쟁들로 어수선했는데, 라일은 북음주의의 선두주자로써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라는 종교 개혁의 성경적인 교리 위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서 있었다.
1880년 그의 나이 64세 되던 해, 그는 리버풀의 수석 주교로 임명되었고, 그 이후로도 라일은 거의 20년에 이르는 나머지 생애 동안 복음주의적인 교리 위에 견실하게 서서 자신의 사역을 수행해 나간다. 그는 은퇴를 불과 몇 달 남겨두고 있던 1900년 6월 10일 건강상의 문제로 다시 일어나지 못할 침상에 눕는다. 그의 장례식 설교를 맡았던 설교자는 "19세기를 살았던 영어권 민족들과 전 세계 사람을 통틀어 라일만큼 하나님의 진리와 의를 위하여 헌신했던 사람도 드물 것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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