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종과 맹신에 대한 칼빈의 견해
11. 회의들도 인간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로마 감독 레오는 칼케돈 회의를 교리에서는 정통적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지각없는 경솔과 야심이 있었다고 서슴지 않고 비난했다. 그는 이 회의의 합법성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과오를 범했을지도 모른다고 노골적으로 단정했다. 내가 이런 과오를 밝히려고 애쓰는 것을 미련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는 구원에 필요하지 않은 문제에서는 회의들도 과오를 범할 수 있다고 우리의 반대자들은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공연한 수고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반대자들은 피할 수 없을 때에는 입으로 그렇게 인정하면서도 모든 회의의 모든 결정을 성령의 말씀이라고 무분별하게 우리에게 강요할 때에는 처음에 인정한 것 이상을 우리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회의는 과오를 범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또는 과오가 있다 해도 우리가 진리를 분별하거나 그들의 과오를 따르지 않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주장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 나는 이런 사태에서 무엇을 생각 할 수 있는가를 밝히고자 할뿐이다. 즉 성령께서는 경건하고 거룩한 분들을 주관하셨지만 그들에게 인간적인 일이 생기는 것을 허락하셔서 우리가 사람을 너무 신임하지 않도록 하셨는데, 이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가 어느 회의에서도 좋은 결말을 본 일이 없다고 한 것보다는 나은 견해다. 이는 모든 회의가 예외 없이 결말이 나빴다고 주장할 때, 그는 회의들의 권위를 그다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방 회의들에 대해서는 일일이 따로 말할 필요가 없다. 신조를 제정하며 원하는 대로 무슨 교리든지 받아들이는 권위가 지방 회의에 얼마나 있겠는가 하는 것은 전체 회의에 생각하면 쉽게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 먼 인도자에게 순종하지 말라, 후대 회의들의 결정에도 성경에 비추어 볼 때 과오가 있었다. 12-14)
12. 맹종은 불가하다
현대 카톨릭 교도들은 그들의 입장을 옹호할 만한 도움을 이성에서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는 최후의 가련한 도피 수단을 사용한다. 즉 이 사람들 자신은, 비록 그 마음과 생각이 둔하고 심정과 의지가 철저하게 악할지라도 인도자들에게 순종하라는(히 13 : 17) 주의 말씀에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사실 이런 자들은 지도자가 아니라고 내가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들은 여호수아보다 더 많은 권리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주의 선지자요 훌륭한 목자였던 여호수아를 주께서 그 직책에 임명하실 때에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를 들어보자.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수 1 : 8,7). 그러므로 주의 율법에서 이쪽으로나 저쪽으로나 벗어나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의 영적 지도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목자들의 교훈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면,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말을 경계하라고 주께서 자주 경고하신 것은 무슨 뜻인가? 주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렘 23 : 16). 또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 : 15).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한 요한의 충고도 헛것이 될 것이다(요일 4 : 1). 천사들도 이 비판을 면할 수 없는데 하물며 사탄과 그 거짓말은 오죽할까(갈 1 : 8)?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고 하신 말씀은(마 15 : 14) 무슨 뜻인가? 이 말씀은 어떤 목자들의 말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한가 하는 것과, 무분별하게 모든 목자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충분하게 선언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의 칭호에 놀라며 우리까지도 끌려가서 그들과 같은 소경이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어떤 이름으로 가장했든 간에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끌려들어서는 안 된다고 주께서 우리들에게 특히 경고하신 것을 안다. 그리스도의 이 해답이 옳다면, 대제사장이든 대주교든 교황이든 그 누구이든 간에 눈 먼 인도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기들과 함께 같은 벼랑에서 떨어지게 할뿐이다. 따라서 이름이 회의나 목자나 주교라고 해서(그 가운데는 진정한 이름이 가짜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말과 행동을 증거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으로 삼아서 모든 사람의 영을 검토하며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왔는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13. 성경 해석을 위한 회의들의 실제적 의의는 무엇인가
이제까지 우리는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낼 권한이 교회에게 주어진 일이 없다는 것을 증명했으므로 이제는 성경을 해석하는 권한이 교회에 있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을 검토하겠다.
나는 교리에 관한 토론이 일어날 때에는 진정한 감독들이 회의를 소집하고 거기서 문제된 교리를 검토하는 것이 가장 좋고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교회의 목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의 도움을 받아 서로 일치하게 되는 결정은 목자들이 각각 자기 집에서 혼자 생각한 후에 신도들에게 가르친다든지 또는 몇 사람이 모여서 교리를 작성하는 것보다 더욱 무게가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감독들이 모이면 무엇을 어떤 모양으로 가르칠 것인지를 공동으로 심사숙고할 수 있을 것이며 다양성 때문에 생기는 불만을 방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로 바울도 교리들을 분별하기 위해서 이 방법을 권한다. 교리를 분별하는 일을 각 교회에 일임하면서(고전 14 : 29 참조) 바울은 더 중대한 경우에 따를 절차를 보여 준다. 즉 교회들은 서로 심리하며 인정하라고 한다. 경건한 감정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것을 보더라도, 이상한 교리로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리고 더 큰 분열이 생길 위험성이 보일 경우, 교회들은 먼저 모여서 문제를 검토하며 정당한 토의를 하고 그 다음에 성경에 입각한 결정을 내려서, 일반 신도들의 의혹을 제거하며 악하고 욕심 많은 사람들의 입을 막아 감히 문제들을 더 만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아리우스가 일어났을 때에 니케아 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는 그 권위로 저 불결한 사람의 악한 노력을 분쇄해서, 그가 흔들어 놓은 교회들의 평화를 회복하며 그의 모독적인 가르침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을 주장했다. 그 후에 유노미우스와 마케도니우스가 새로운 소동을 일으켰을 때에 콘스탄티노플 회의가 그들의 미친 생각에 대한 대책을 일으켰다. 에베소 회의에서는 네스토리우스의 불경건이 전복되었다. 사탄이 흉계를 꾸밀 때마다 교회는 처음부터 이런 방법으로 단결을 유지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우리는 아타나시우스와 바실이나 키릴루스 같은 진정한 교리의 수호자들을 주께서 모든 시대와 모든 곳에서 일으키신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참으로 우리는 제 2 차 에베소 종교 회의에서의 일을 생각해야 한다. 유티케스의 이단설이 이겼고 거룩한 기억을 남긴 플라비안과 다른 경건한 사람 몇 명은 추방을 당했으며, 그밖에도 이런 비행이 많았다. 이것은 극히 악한 성격을 가진 논쟁가 디오스코루스가 회의를 주관한 것이지 그리스도의 영이 주관하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거기에 교회가 없었다고 말한다. 나도 인정한다. 진리는 교회 안에서 죽지 않는다고 나는 확신하기 때문이다. 한 회의가 진리를 억압할지라도 주의 놀라운 보호를 받아, 때가 오면 진리는 다시 일어나 승리한다. 그러나 한 회의의 투표에 의해서 채택되는 성경 해석이 확고한 진리라는 생각에 대해서는, 나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 라고 생각한다.
14. 회의의 결정에 대해서 카톨릭 교회는 그릇된 평가를 한다
그러나 성경 해석권은 회의들에 속하며 더 상소할 길이 없다고 카톨릭 교도들이 주장할 때에 그들의 목표는 다른 곳에 있다. 그들은 회의의 모든 결정을 "성경에 대한 해석"이라고 부름으로써 이것을 하나의 구실로 악용한다. 연옥과 성자들의 중보 기도와 은밀한 고백과 기타 비슷한 문제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한 마디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교회의 권위에 의해서 허락되었으므로,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의견과 관습에 의해서 용인되었으므로 그 하나 하나를 성경에 관한 해석으로 인정해야 된다고 한다. 결코 그뿐이 아니다. 어떤 회의가 무엇을 결정하면, 비록 성경이 분명히 반대할지라도 그것은 "해석"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만찬에서 잔을 주시면서 모두 그 잔을 마시라고 명령하셨다(마 26 : 27-28). 콘스탄스 회의는 평신도에게 잔을 주는 것을 금지하고, 오직 사제만 그 잔을 마시라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에 전혀 반대되는 이 결정을 그들은 "해석"으로 생각하라고 한다. 바울은 결혼을 금지하는 것을 마귀들의 위선이라고 한다(딤전 4 : 1-3).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는, 성령께서는 혼인은 모든 사람에게 거룩하고 귀한 것이라고 언명하신다(히 13 : 4). 그들은 후대에 와서 그들이 사제들의 결혼을 금지한 것을 성경에 대한 진정하고 순수한 해석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이질적인 것은 고안할 수가 없다. 누가 감히 반대 의견을 말하면 그들은 이단자라고 판정한다. 교회의 결정은 상소할 수 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의 해석이 옳은가를 문제로 삼는 것을 불법이라고 한다. 내가 왜 이런 파렴치를 공격하겠는가? 그것을 폭로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정복한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성경 인정권이란 것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무시하겠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판단에 굴복시키며 하나님의 말씀의 타당성을 사람의 변덕에 의존하게 만든다는 것은 입에 담을 수 없는 모독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다음의 한 가지 질문만은 하겠다. 만일 성경에 권위가 있는 것이 교회의 인정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이 점에 대해서 어느 회의의 결정을 인용 할 것인가? 나는 그런 결정이 없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왜 아리우스는 요한복음에 인용된 증거에 의해서 니케아 회의에서의 패배를 인정했는가? 카톨릭 교회의 의견에 의하면, 회의의 승인이 아직 없었으므로 아리우스는 그 증언들을 거부할 권리가 있었다. 그들은 증거로서 "경전"(canon)이라고 하는 고대의 목록을 제시하며 교회의 판단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시 묻는다. 어느 회의에서 그 경전이 공포되었는가? 그들은 대답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경전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고자 한다. 나는 고대 저술가들 사이에는 경전에 대해서 일치한 적이 없었던 것을 안다. 그리고 제롬이 한 말에 중요시해야 한다면 마카비서와 토비트와 집회서와 기타 유사한 책들은 다시 외전의 지위로 돌려야 할 것이다. 이것은 카톨릭 교회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 영성을 위한 ━━ > 기독교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맹종과 맹신에 대한 칼빈의 견해 (0) | 2019.12.26 |
---|---|
맹종과 맹신에 대한 칼빈의 견해 (0) | 2019.12.25 |
맹종과 맹신에 대한 칼빈의 견해 (0) | 2019.12.23 |
맹종과 맹신에 대한 칼빈의 견해 (0) | 2019.12.22 |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0) | 2019.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