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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종과 맹신에 대한 칼빈의 견해

Joyfule 2019. 12. 25. 01:41


 

     맹종과 맹신에 대한 칼빈의 견해


《기독교 강요 III, 2장 1 - 6》


믿음 : 믿음의 정의와 특성에 대한 설명



(믿음의 목표는 그리스도이시다. 1)


1. 그러나 이 모든 일은 믿음에 관한 정의를 보다 명확히 제시한 후에야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독자들은 믿음의 힘과 성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전에 설명한 것을 회고하는 것이 좋겠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해야할 일을 율법으로 정하셨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그 어느 부분이라도 지키지 않으면 율법에 있는 영원한 죽음의 무서운 선언이 우리 위에 내릴 것이다. 둘째로, 율법을 글자 그대로 이르기까지 지킨다는 것은 어려울 뿐 아니라,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요,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보며 우리가 당해야 할 처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좋은 희망이라고 하는 것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것이며,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영원한 죽음을 당할 처지임을 알게 될 것이다. 셋째로, 이런 비참한 재난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해방의 수단은 다만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구속자, 즉 해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무한한 선하심과 자비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리스도의 손을 통하여 우리를 도우시기로 하셨다. 다만 한 조건은 우리가 견고한 믿음으로 이러한 자비를 받아들이며 꾸준한 희망으로 그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검토해야겠다. 하나님께서 자녀로 삼기로 정하신 사람들은 이 믿음에 의해서 하늘나라를 소유하게 되는데, 이런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의견이나 신념일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점에서 현재 위험한 착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의 진정한 성격을 더욱 주도 면밀하게 검토하고 더욱 열성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실제로 믿음이란 말을 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음서에 있는 이야기에 보통으로 찬성한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그보다 더 깊은 무엇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사실 여러 학파들이 믿음을 논할 때에는 단순히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이라고 하며, 우리가 다른 곳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허무한 공상을 통해 가련한 영혼들을 확정된 목표로 이끌지를 못하고 도리어 다른 곳으로 끌어간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므로"(딤전 6 : 1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셔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세상의 빛"(요 8 : 12)이라고 하시고 다른데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하신다(요 14 : 6).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시 36 : 9) 가는 길은 그리스도 밖에 없다(요 14 : 6).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아버지를 아시며, 그 다음에 그분이 당신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는 신자들에게만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눅 10 : 22). 이 일을 근거로 바울은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 만한 가치가 없다고 단언한다(고전 2 : 2).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은…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21절) 증거했노라고 말하였다. 또 다른 구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전했다.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 26 : 17-18).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에게 나타나 보인다고 증언한다. 바꿔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빛나며 그 지식이 우리에게 비친다고 하였다(고후 4 : 6).


믿음이 한 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임은 사실이지만 여기 첨가해야 할 것이 있다. 즉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 : 3)이 있다. 그리스도의 광채가 우리 위에 비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까지나 멀리 숨어 계실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계시하시려는 모든 것을 독생자 그리스도에게 맡기시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은혜를 전달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진정한 형상을 표현하게 하셨다(히 1 : 3 참조).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으려고 분발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셔야 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볼 수 없는 아버지를 오직 그 형상에서만 찾아야 한다는 경고를 받는다.


어거스틴은 이 문제에 대해서 훌륭한 말을 했다. 그는 믿음의 목표를 논할 때에 우리는 가려는 곳과 가는 길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곧 이어 모든 과오에 대해서 가장 견고한 방비를 갖춘 길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신 그분이라고 한다. 즉 그는 하나님으로서 우리가 가려는 목적지가 되며, 사람으로서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 되신다. 목적지와 길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발견될 뿐이다. 그러나 바울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선포하는 것은 그가 믿음의 안정성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한 그 믿음에 대해서 자기가 그렇게 자꾸 역설한 점을 뒤엎으려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벧전 1 : 21)하면서 양쪽을 가장 효과적으로 결합한다.


(믿음은 지식을 내포한다. 참된 교리를 맹신이라는 스콜라의 사고는 흐리게 한다. 2-5)


2. 믿음은 방자한 무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에 있다


이 해독에 대한 책임은 다른 무수한 해독의 경우처럼 스콜라 신학자들에게 돌려야 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베일을 씌워 그를 숨겼다. 만일 우리는 그리스도를 직시하지 않으면 끝없는 미로를 헤맬 것이다.

그들은 모호한 정의로 믿음의 힘을 쇠약하게 만들며 거의 말살할 뿐 아니라 "맹신"이라는 허구를 만들어냈다. 비할 데 없이 엄청난 유치한 무지를 이러한 허구로 장식함으로써 그들은 가련한 사람들을 속여 멸망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문제의 진상을 솔직하게 말한다면, 이 허구는 진정한 믿음을 파묻을 뿐 아니라 완전히 파멸시킨다. 우리의 감정을 공손하게 교회에 복종시키기만 한다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것이 이른바 믿는다는 것인가? 믿음의 근거는 무지가 아니고 지식(knowledge)이다. 그리고 이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그의 뜻까지 아는 지식이다. 우리는 교회가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진리로 받아들일 용의가 있기 때문에, 또는 질문하고 알아내는 일을 교회에 일임했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화목이 성립됐기 때문에(고후 5 : 18-19),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비로운 아버지시며 그리스도를 의와 성결과 생명으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구원을 얻는다. 이 지식에 의해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지 우리의 감정을 교회에 굴복시킴으로써가 아니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할 때에(롬 10 : 10), 사도가 말하는 뜻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나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 것을 맹신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직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사도는 우리의 의의 근거인 하나님의 선하심을 명백하게 인정하라고(explicit recognition ; 이해에 입각한 신앙) 요구한다.


3. 로마 교회의 "맹신"이라는 교리는 근본적으로 잘못됐다


우리는 무지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우리가 지금 안다는 것은 대개 함축적인 것이며, 우리가 육(肉)의 짐을 벗고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갈 때까지 그대로 혼돈하리라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이런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판단을 보류하고 교회와의 단결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그러나 이것을 구실로 삼아서 소위 겸손한 태도를 가진 무지를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지(요 17 : 3), 교회에 대한 존경이 아니다. 그들이 "맹신"이란 것으로 어떤 미로를 만들어 냈는가를 우리는 안다. 무엇이든지-가장 무서운 오류까지도-"교리"라는 딱지를 붙여서 속여 넘기면, 무지한 사람들은 무분별하게 신령한 것으로 받든다. 이런 경솔한 맹신이 파멸 일보 직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변명하며, "이것이 교회에 대한 믿음이다"라는 조건만 붙으면 무엇이든지 확실한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자기들이 가진 오류를 진리인 것처럼, 암흑을 광명인 것처럼, 무지를 바른 지식인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논박하는데 시간을 더 보내지 않고, 그들의 교리와 우리의 교리를 비교하도록 독자에게 권고할 뿐이다. 진리 자체는 명백하므로 자연히 그들을 충분히 또 쉽게 논박할 것이다. 그들은 무지의 많은 잔재에 믿음이 둘러싸여 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무지한 사람들을 올바른 신자라고 부른다. 즉 자기의 무지로 마비된 사람을 심지어 자기의 무지를 자랑하는 사람들이라도 자기가 모르는 일들에 대해서 교회의 권위와 판단에 찬성하기만 하면 올바른 신자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믿음에는 이해가 따른다는 성경의 한결같은 교훈을 모르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