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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종과 맹신에 대한 칼빈의 견해

Joyfule 2019. 12. 26. 02:31

 

 

     맹종과 맹신에 대한 칼빈의 견해

 

 

4. 올바른 믿음조차도 항상 오류와 불신앙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그네로서 살고 있는 동안에 맹신이란 것이 있음을 우리는 인정한다. 이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일과 가리워진 것들이 많을 뿐 아니라, 그런 것들이 오류의 구름에 둘러싸여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가장 완전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일은 고요히 또 겸손하게 계속 노력하여 더욱 전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도 신자들에게 하는 권고에서 어떤 일에 대해서 서로 생각이 다를 때에는 계시를 기다리라고 한다(빌 3 : 15). 육신을 벗어버리기까지는 원하는 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가 체험적으로 분명히 배우는 교훈이다. 평소에 매일 성경을 읽을 때에 우리는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많아서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 굴레로 우리를 일정한 한도내에 제어하시며, 각 사람에게 "믿음의 분량"을 정하셔서(롬 12 : 3), 가장 훌륭한 교사라도 항상 배우겠다는 태도를 가지도록 하신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했을 때에 그들은 이와 같은 맹신의 분명한 본보기였다. 그들은 사소한 일에도 머뭇거리며, 가장 초보적인 진리조차 맛보기 어려웠다. 또한 주의 말씀을 따라 가면서도 이해하는 점에서는 거의 진보가 없었다. 사실 여인들의 말을 듣고 무덤까지 달려갔지만, 주의 부활이 꿈같이 느껴질 뿐이었다(눅 24 : 11- 12, 요 20 : 8 참조). 그리스도께서 예전에 그들에게 믿음이 있다고 증거하셨으므로 이 때에 그들에게 믿음이 전혀 없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참으로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면, 그들의 열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죽은 사람, 살아날 희망이 전혀 없는 사람의 시체에 향료를 바르도록 여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미신이 아니었다. 진실하신 분으로 믿은 이의 말씀을 여인들은 믿기는 했으나, 무지가 아직도 그들의 마음을 점령하고 그들의 믿음을 암흑으로 둘러쌌기 때문에 그들은 거의 아연실색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보고 그의 말씀이 참말인 것을 스스로 발견한 후에 드디어 믿었다고 했다.


그때에 처음으로 믿기 시작했다는 뜻이 아니다. 숨은 믿음의 씨가-죽은 듯이 그들의 마음속에 있던 씨가-그때에 새로운 힘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유일한 스승으로 존경하며 마음속에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진정한 신앙이, 그러나 아직 맹목적인 신앙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받아 그분께서 자기들의 구주되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오셔서 아버지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의 제자들을 하늘로 인도하려 하신다는 것을 믿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더 자세한 증명을 구해서는 안 된다. 누구를 막론하고 신앙에는 항상 불신앙이 섞여 있다는 것으로 증명은 충분하다.


5. 믿음의 필수적 선행으로 "맹신"


엄격하게 말해서 아직 신앙의 준비 상태에 불과한 믿음도 맹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복음서를 보면 복음의 교훈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면서도 기적에만 놀라서 그리스도를 약속된 메시아라고 믿은 사람이 많았다. 이런 공경하는 태도가 있었으므로 그들은 그리스도께 기꺼이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이 공경하는 태도를 "신앙"이라는 훌륭한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시초에 불과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 주시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은 왕의 신하는(요 4 : 50) 집에 돌아가서 다시 믿었다고 복음서 기자는 증거한다(요 4 : 53). 처음에 그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하여 교훈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그가 교훈을 잘 받는 사람, 언제든지 배우겠다는 생각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처음 구절에서 그가 믿노라고 한 것은 어떤 특정한 일에 대한 믿음이었으나, 둘째 구절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지도하에 들어간 제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요한복음에 있는 비슷한 예를 보면 사마리아 여인의 말을 믿고 그리스도를 보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에게 모여들었던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들은 후에 여인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요 4 : 42). 이런 예들을 보면 아직 초보적 지식은 없을지라도 듣겠다는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신자"라고 불리웠다. 물론 정확한 의미는 아니나 이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 경건한 마음 자세에 이런 위대한 영예를 주시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받으려는 이 태도와 배우려는 이 욕망은 교환주의자들이 조작한 "맹신"으로 만족하는 저 나태한 사람들이 안주하고 있는 그 전적 무지와는 거리가 멀다. 바울은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 사람들을(딤후 3 : 7) 엄중히 책망하는데, 하물며 완전한 무지를 계획적으로 택하는 자들은 얼마나 더 큰 수치를 당해야 할 것인가 !


(말씀에 대한 믿음의 관계와 믿음의 간단한 정의. 6-7)


6.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아버지께서 제시하시는 그리스도 즉 자신의 복음으로 옷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이것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믿음이 도착할 목표를 지정하신 것같이 복음이 우리를 앞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에게로 가는 바른 길을 걸을 수 없다. 그리고 거기서는 확실히 은혜의 보고가 우리 앞에 열려 있다. 만일 그 은총의 보고가 닫혀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과 가르침을 불가분리의 동반자로 서로 결합시키며,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채우지 아니 하였느니라…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라고 말한다(엡 4 : 20-21).


그러나 믿음을 복음에 제한할 때에 복음을 구성하기에 충분한 요소들을 모세와 예언자들이 전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에서 그리스도가 더욱 완전하게 계시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복음을 "믿음의 가르침"이라는 적절한 말로 부른다(딤전 4 : 6 참조). 이런 이유로 그는 다른 구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말한다(롬 10 : 4, 갈 3 : 25 참조). 그가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새롭고 특별한 가르침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선생이 되신 후에, 아버지의 자비를 더욱 분명하게 알려주시며 우리의 구원을 더욱 확실히 증거 하셨다.


그러나 일반적인 것으로부터 특수한 것으로 점점 내려가는 것이 더 쉽고 더 적당한 방법일 것이다. 우선 우리는 믿음과 말씀 사이에 영속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 둘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은 태양에서 나오는 광선을 태양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에서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고 선포하신다(사 55 : 3). 요한은 이와 같은 믿음의 원천을 보여주려고,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믿게 하려 함이요"(요 20 : 31)라고 말했다. 예언자도 백성이 믿도록 충고하기 위해서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시 95 : 7)고 한다. "듣는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믿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간단히 말해서 이사야서에는 하나님께서 교회의 자녀들과 외부 사람들을 구별하시는 표지가 있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자녀들을 가르치셔서(사 54 : 13, 요 6 : 45)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배우도록(요 6 : 45 참조) 하시리라는 것이다. 이 말씀에는 이유가 있다. 만일 은혜를 무분별하게 주신다면 왜 그분께서는 말씀을 소수 사람들에게 보내셨을까? 이 사실과 부합하는 것은 복음서 기자들이 보통 "신자"와 "제자"라는 말을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특히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그렇게 사용하며 9장 36절에서는 한 여인에게까지 이 칭호를 적용한다(행 6 : 1-2, 7, 9 : 1,10,19,25-26,38, 11 : 26,29, 13 : 52, 14 : 20,28, 15 : 10,16-21). 그러므로 만일 믿음이 목표로 삼아야 할 이 목표로부터 조금이라도 방향이 달라진다면 그 믿음은 본성을 지키지 못한다. 그것은 불안하고 경박한 믿음과 막연히 오류를 믿는 심리 상태가 된다. 믿음을 지탱하며 유지하는 근거는 말씀이며 말씀에서 떠난 믿음은 넘어진다. 그러므로 말씀을 제거하면 믿음은 조금도 남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에서 믿음이 배태되게 하는데 말씀을 심는 사람의 봉사가 필요한가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논할 것이다. 그러나 말씀 자체는 어떻게 우리에게 오든 간에 거울과 같고 이 거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도움을 사용하시든지 또는 자신의 힘만으로 하시든지 간에 자신에게로 이끄시고자 하시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을 복음에 대한 순종이라고 정의하며(롬 1 : 5), 빌립보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충성한 것을 칭찬한다(빌 1 : 3-5, 살전 2 : 13 참조). 믿음의 뜻을 이해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도-특히 이 점이-문제이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본성이 어떠하신가 하는데 있지 않고 우리에 대해서 어떤 분이 되고자 하시는가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그의 말씀에서 얻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지식의 근거는 하나님의 진실성을 먼저 확신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분열되어 자체 내에서 분쟁이 있으면 말씀의 권위는 의심스러운 것이 되며 약하거나 전혀 없게 된다. 또한 하나님은 진실하시며(롬 3 : 3 참조),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고(딛 1 : 2 참조)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신성불가침의 진리라고 확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