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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종과 맹신에 대한 칼빈의 견해

Joyfule 2019. 12. 22. 00:20

    

   맹종과 맹신에 대한 칼빈의 견해

 

 

 

이런 글들을 제대로 읽어 본 자라면 자신들이 믿음이라 내세웠던 것이, 저기 로마카톨릭에 대항해 봉기했던 초기 종교개혁 자들의 교훈에서 얼마나 많이 떠나왔는지를 알 것이다.




《기독교 강요 IV, 9장 1 - 14》

교회 회의들과 그 권위


(교회 회의의 참된 권위. 1-2)


1. 두 가지 서론적인 말


교회에 관해서 그들이 주장하는 점을 내가 모두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대전제를 옹호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회의가 교회를 대표한다고 하며, 교회에 대해서 하는 말을 곧 회의에 옮기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들이 교회의 권한을 완강하게 주장하는 유일한 목적은, 될 수 있는 한 많은 권한을 박탈해서 로마 교황과 그 측근자들에게 주려는 데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논하기 전에 나는 두 가지 서론적인 말을 간단히 해야겠다. 내가 여기서 엄격한 태도를 취하려 하는 것은 내가 고대의 회의들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존경하며 또 모든 사람이 존경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여기서 지켜야 할 규범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회의를 주관하며 그의 이 권위를 아무 사람도 나누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권리다. 그리고 나는 전체 회합이 그리스도의 말씀과 영의 지배를 받을 때에 한해서 그리스도가 주관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둘째, 내가 회의에 돌리는 것이 논적들에 비해서 적다는 것은, 마치 회의들이 그들을 지지하고 우리를 반대하는 것처럼 내가 회의들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리를 완전하게 증명하며 교황 제도를 전멸시킬 만한 충분한 장비 곧 주의 말씀이 있으므로 다른 것들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필요한 경우에는 고대의 회의들이 대체로 이 두 가지 일을 위한 충분한 증거를 우리에게 제공하게 될 것이다.


2. 교회 회의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


이제 본론에 들어가기로 하자. 회의들에 어떤 권위가 있는가를 성경에서 살펴본다면 그리스도의 약속보다 분명한 말씀은 없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 : 20). 이것은 작은 모임과 세계적 회의 모두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회의라야 그가 그 가운데 계시겠다는 부대 조건에 있다. 따라서 우리의 논적들은 아무리 감독들이 모인 회의를 말한다해도 그들에게 유리할 것이 없다. 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회의란 것을 우리가 믿도록 증명하지 않는다면 회의들이 성령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그들의 주장을 우리는 믿지 않을 것이다. 선하고 정직한 감독들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과 같이, 불경하고 사악한 감독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반역을 공모 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회의들이 발표한 교령들에는 이 사실을 분명히 증명하는 것이 많다. 그러나 이 점은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이름으로 모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약속하시지 않는다고 한 마디로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히도록 하자.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하지 말라고(신 4 : 2, 12 : 32, 잠 30 : 6, 계 22 : 18-19 참조) 하신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결정대로 일을 처리하는 자들과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 즉 완전한 지혜의 유일한 표준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들의 두뇌로써 신기한 것을 조작하는 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회의에 계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고 진정한 합법적 회의와 그렇지 않은 회의들을 구별하는 특별 표식을 지정하셨으므로, 우리는 결코 이 구별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옛날에 하나님께서는 레위 족속의 제사장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가르치게 하셨다(말 2 : 7).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에게도 항상 이 일을 요구하셨다. 이 규정을 사도들에게도 부여하신 것을 우리는 안다. 이 언약을 어기는 자들은 제사장직의 영예나 그 밖의 어떤 권위도 가질 자격이 없다고 하나님께서는 보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람들의 의견에 나의 신앙을 예속시키려고 하는 나의 논적들은 이 어렵고 난처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목자들의 결점 때문에 회의들도 오류를 범한다. 3-7)


3. "목자"가 없어도 또 "목자"에 대항하면서도 진리는 교회 내에 자립자존할 수 있다


그들은 목자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면 교회 안에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또 교회 자체도 총회의에서 나타내 보여야만 존재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예언자들이 자기들의 시대에 충실한 증거를 우리에게 남겼다면 그들의 생각은 항상 진리가 아니다. 이사야 시대에 예루살렘에는 교회가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아직 그것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 교회의 목자들에 대해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다.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사 56 : 10-11). 호세아도 그와 비슷한 말을 한다. "에브라임은 내 하나님의 파수꾼이어늘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 같고 또 그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도다"(호 9 : 8). 호세아는 빈정대는 뜻으로 그들을 하나님과 연결시킴으로써 그들의 제사장직이 가짜란 것을 가르친다. 교회는 예레미야 때까지도 존속했다. 그가 목자들에 대해서 한 말을 들어보자.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렘 6 : 13).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렘 14 : 14). 예레미야의 말을 너무 많이 인용하지 않기 위해서 독자들이 23장(렘 23 : 1이하)과 40장을5 읽기 바란다. 같은 시대에 에스겔은 다른 곳에서 역시 엄격하게 같은 사람들을 질책한다. "그 가운데서 선지자들의 배역함이 우는 사자가 식물을 움킴 같았도다‥‥‥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번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분변치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으로 분변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겔 22 : 25-26) . 같은 뜻의 말이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예언서에는 비슷한 말씀이 자주 나온다. 사실 이보다 더 자주 나오는 말씀은 없다(사 9 : 14, 28 : 7, 29 : 10, 렘 2 : 8,26, 5 : 13,31, 6 : 13, 8 : 10, 13 : 13, 14 : 14, 23 : 1, 27 : 9 기타).


4. 목자들의 변절은 예언되었다


혹자는, 유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을지 모르나 우리 시대에는 이런 큰 폐단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참으로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렇지 않으리라고 언명하셨는데, 이는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벧후 2 : 1)라고 베드로가 분명히 말했기 때문이다. 일반 사람들이 아니라 교사와 목자의 칭호를 자랑하는 자들에게서 위험이 오리라고 베드로가 예언하지 않았는가?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목자들이 교회에 대해서 가장 큰 위험 인물들이라고 얼마나 자주 예언하였는가(마 24 : 11,24, 행 20 : 29-30, 딤전 4 : 1, 딤후 3 : 1이하, 4 : 3)? 참으로 바울은 적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성전 안에 앉으리라고 분명하게 가르친다(살후 2 : 4).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거기서 말하는 무서운 재난은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목자로서 앉아 있는 자들에게서 오리라는 것이었다. 또 다른 구절에서 그는 이 가장 큰 재앙의 시초가 이미 가까이 왔다고 말한다. 즉 그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말한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행 20 : 29-30). 목자들이 단시일에 이렇게까지 타락할 수 있었다면 오랜 세월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얼마나 많은 부패가 그들 사이에 생기겠는가? 그런 예를 위해서 여러 장을 메꿀 필요가 없다. 진리라고 해서 항상 목자들의 가슴에서 육성되는 것은 아니며 교회의 건전성 또한 그들의 상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거의 모든 시대의 실례가 우리에게 경고한다. 목자들은 교회를 보존하기 위해서 임명된 사람들이므로 그들은 마땅히 교회의 평화와 안전을 수호해야 한다. 그러나 빚을 갚는 것과 갚지 못한 채 빚을 지고 있는 것과는 문제가 다르다.


5. 목자들을 잘 식별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모든 목자들의 권위를 일률적으로 경솔하게 손상시키는 것같이 해석해서는 안 된다. 나는 다만 목자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것과 목자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곧 그렇게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할 뿐이다. 그러나 교황과 그의 측근 주교들은 목자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만을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순종하지 않고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뒤섞어 버린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결코 진리의 빛을 빼앗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이 항상 자기들 사이에 계시고 교회는 자기들과 존망을 함께 한다고 우리들을 설득하려고 애쓴다. 마치 고대 백성들의 배은망덕을 벌하시던 하나님의 심판이 지금은 세상을 벌하지 않을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목자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정신을 둔하게 만드셨다(슥 11 : 17). 현대의 이 철저하게 우둔한 인간들은 옛날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던 자들이 부른 노래를 자기들도 지금 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예레미야의 원수들이 진리와 싸울 때에 한 말은 이것이었다.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렘 18 :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