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의 은혜와 가슴속의 은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떤 일이든지 처음 접하는 것이라면 임팩트가 강해서
기억 속에 오래 남고 뭔가 전율 같은 감각이 나의 마음속에 저장됩니다.
제가 12살 때 형수님을 따라 강원도 산골에서
서울구경 처음으로 했을 때 참으로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보이는 건물들은 왜 그리 높은지, 들어오는 시가지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래졌고,
강원도의 깨끗한 공기만 마시다가 서울의 매캐한 공기를 들이키자니 얼마나 토악증이 많이 나던지
서울에 있는 3일 내내 힘들었습니다.
제게 무엇보다 큰 임팩트를 준 사건은 완행열차 안에서 파는 브라보콘 아이스크림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먹어봤는데 무슨 맛이 이렇게 좋은지 깨물어 먹지 않고 아껴 먹었는데
무더운 날씨에 녹아내리는 부분을 먼저 먹고 있는데,
왜 그리 아이스크림의 양이 먹을수록 푹푹 줄어드는지,
줄어드는 아이스크림을 바라보며 매우 좌절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찌나 맛있던지 1년 내내 그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로 저에게는 처음 맛보는 그 문화적인 충격이 강했던 것입니다.
그 임팩트의 영향인지 지금도 집사람이 심부름을 시켜 동내 마트에 가면 무조건 브라보콘을 사오는데
그 많은 콘 중에서 내 눈에는 브라보콘만 들어옵니다.
애들은 아빠는 맨날 브라보콘만 사온다고 하면서 제발 다른 거 사오라고 신신부탁합니다.
신경은 쓴다고 하는데 사고보면 또 브라보콘입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스크림은 맛이 어릴 때 먹던 그것과는 참 다르다는 느낌이 옵니다.
그 당시 동내에 가끔 방문하는 아이스께끼 아저씨가 집에서 설탕물 얼려 만든
단단한 아리랑바만 먹다가 난생 처음 콘이라고 하는 것을 먹으니
이것이 사람이 만든 것인가 놀랄 정도였는데
지금은 그 맛이 그 맛이고 입에 들어와도 시원한 감촉만 있을 뿐 큰 맛을 못 느낍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세월이 흐르면서 엄청난 양의 아이스크림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 맛에 길들어서 나의 혀 속 느낌은 이미 어린 시절의 임팩트함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연애 시절 첫 키스의 기억은 환상인데
늘 같이 살면서 하는 입맞춤은 키스가 아니라, 그냥 밋밋한 뽀뽀라고나 할까?
이런 현상을 세상에서는 권태기라고 하더군요.
이런 권태기의 느낌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현상임을 모든 분이 인정하실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우리가 늘 듣는 복음에 대한 말씀은 어떨까요?
흔히 교회에서 세상 복 많이 받으라고 목에 힘주어서 외치는 저렴한 복음 말씀 말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 전하는 영양가 있는 진짜 복음을 들었을 때,
북받치는 환희와 영혼의 강한 진동에 기쁨의 눈물과 회개의 눈물을 옆 사람 눈치 안 보고
마구 쏟아내던 전율적인 기억에 이 세상은 다 내 것처럼 느끼며 기뻐서 방방 뜨던 그 기억...
아마 그런 기억이 있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저도 그런 과정을 거쳤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똑같은 귀한 복음의 말씀을 듣는데도
처음 느낀 그런 임팩트가 느껴지지 않고, 그래 다 좋은 말씀이지,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야,
역시 진짜 복음은 좋은 거야...
어느샌가 저에게 이런 복음의 매너리즘이 들어와서 기쁨으로 북받치는 은혜의 감정은 다 사라지고,
은혜의 흔적만 남아 아멘 소리만 외쳐대던 위험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주옥같은 복음의 말씀이 내 가슴에 스며들어 심장 박동을 부추기더니,
어느 순간부터 긴장도 안 되고, 말씀이 가슴이 아닌 머릿속으로 빨려들더니
가슴에는 은혜의 흔적만 남고 머릿속에는 요동치는 지식으로 저장되기 시작하더란 것입니다.
하여 인터넷을 통한 목사님들의 말씀을 듣거나,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에 올라오는 글을 읽으면서
은혜를 가슴으로 느끼지 않고 머리로 느끼려 하고, 그동안 들었던 주옥같은 복음을 지식화시켜서
말씀 분별이란 그럴듯한 명분을 앞세워서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에 대하여 이건 아닌데, 그것도 아닌데, 하면서 넌지시 댓글난에 훈수를 둡니다.
글 쓴 분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다는 걸 증명하기위해
댓글로 전투가 벌어집니다. 일명 논쟁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누구의 의가 더 강한가 덤 앤 더머 게임을 끝내고 뒤돌아보면 남는 것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허망한 죄의식만 올라오고,
내가 왜 그랬지...
정죄와 판단만 난무하고 은혜라는 단어는 이미 지워졌고 콘크리트 같은 삭막한 느낌만 쌓이게 되더군요.
이천 년 전 바리새인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귀한 은혜의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바리새인으로 진화되었구나...
가슴속의 뜨겁게 저장되던 복음의 말씀은 돌덩이같이 화석화되어 흔적만 있는
죽은 은혜만 존재하고, 머리는 뜨거워져서 지식으로만 활발하게 살아 숨 쉬는
교만으로 얼룩진 은혜만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건 은혜도 아니고,
바리새인의 지식으로 산더미 같이 쌓이니, 내 의만 난무하여 하나님께서 슬퍼하시고,
마귀가 잔치를 벌일 그런 저렴하기 짝이 없는 영혼으로 변질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치 심판자라도 된듯 헛된 정의감에 불타올라
세상의 타락해 가는 교회에 대하여 돌을 던지고, 나는 이렇게 주님을 섬기는데,
목사라는 당신들은 왜 하나님의 복음을 가르치지 않고
싸구려 맘몬의 복음을 전하느냐고 울분을 토하며, 이율배반적인 고약한 모습이 되어
바리세인을 따라하고 있었으니, 나는 바리새인보다 못한 의를 가진 사람이었구나...
이런 상태의 나를 어느 날 기도 중에 주님께서
"너는 나의 말은 없고 너의 말만 가득하구나,
너의 머릿속 지식을 지워버리고 가슴속에서 죽어간 내 말씀을 되살려라"
그날 머리를 쥐 뜯으면서 얼마나 정신없이 소리 내 울었는지
한동안 거룩한 맨탈붕괴 상태로 자숙하며 회개만 하던 기억이 납니다.
오래된 이야기도 아니고 10년도 안 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저의 부끄러웠던 기억을 숨기지 않고 왜 글로 옮기는지, 그 이유는
과거의 저 같은 못난 사람의 전철을 밟지 말자는 교훈을 드리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요즘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보면서 댓글논쟁 벌이며 누구누구 의가 더 큰가 논쟁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이 아파옵니다.
내 생각과 다르면 빙긋 웃으면서 지나가면 될 것을 왜들 이러시나...
과거의 내 모습을 보는듯해서, 주님~~~하며 탄식 소리만 절로 나옵니다.
아직도 여기저기 기독카페를 중심으로 이런 현상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느 큰 카페에 가면 세상적인 상식에도 벗어난 싸움들이 난무하여
서로 내 생각이 진리이고 너는 틀렸다는... 뱀의 혀에서 나오는 비릿한 악취를 마구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마귀가 여러분을 부추기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귀는 사람으로 하여금 분노하고, 분열시키고, 정죄, 판단하라고
우리 뒤에서 징그러운 미소를 흘리면서 부추기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의 장난질이 눈에 안 보인다고 안심하지 마십시오.
그러는 동안 성숙하지 못한 우리의 영은 계속해서 죽어갑니다.
복음을 머리에 저장하지 말고 가슴에 저장하길 바랍니다.
처음 먹었던 아이스크림의 맛은 점점 흐려질 수 있습니다.
첫 키스의 추억도 뽀뽀하듯 흐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말씀으로 잠자던 내 심령을 깨웠던 거룩한 은혜의 추억은 무뎌지면 안됩니다.
우리는 죄인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매일매일 회개하며 영적인 옷을 늘 빨지 않으면 안됩니다.
한번 찾아왔던 강한 은혜로 이제는 모든 것이 다 완성된 듯 착각하면 안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한번 은혜로 족하다고 만족해서 무방비 상태로 내 영을 엉성하게 관리하면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덤벼들어 한순간 영적 타락이 찾아옵니다.
날마다 가슴을 치며 애통한 모습으로 주님만 바라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어제의 은혜는 과거일 뿐, 현재 지금의 은혜가 중요합니다.
과거의 은혜로 추억팔이나 하는 우를 범하지 않길 바랍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는 나를 살리려고 거저 주시는 것이지 남을 판단하라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주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은혜는 내 영을 살리고,
우리 이웃을 사랑으로 감싸는 천국시민 다운 모습으로 살라고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다면 내 속사람의 자아와 의를 확실하게 사형선고 내리십시오.
작은 여분이라도 남겨두면 슬금슬금 다시 살아납니다.
뿌리째 뽑아야 내 의의 나무는 죽습니다.
가지만 쳐서는 완전히 죽지 않습니다.
확실하게 결단하고 뿌리째 뽑아 태워버리십시오.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좁은 길이고, 내 십자가겠지요.
내 의로는 힘듭니다.
그래서 주님의 권능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께 매달려 내안의 것을 도말해 달라고 간절히 매달리세요.
내 머릿속에서 은혜로 둔갑하여 지식화된 내 의를 다 사형시키고,
내 속사람의 가슴속에 화석화되었던 죽은 은혜를 다시 살려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나와 이웃을 살리는 진짜 은혜를 간직하는 우리가 되시길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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