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짐은 우리가 문제일 뿐, 대상이 문제가 아닙니다.
언젠가 저랑 나이가 비슷한 조카님이랑 신앙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입을 열자마자 불평불만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거룩하신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목사답지 않은 범죄행위로 재판을 받고 쇠고랑을 차는 걸
티비로 지켜보면서 너무 실망한 나머지 그동안 억지로 나가던 교회마저 발길을 끊었다고 했습니다.
물론 주변의 강요로 억지로 출석하던 차에 교회 떠날 명분이 생겼으니
입에 침을 튀겨가며 목사님들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하여 저는 그와 정반대되는 정말 주님 뜻에 합당하게 목회하는 목사님을 예를 들어
대화를 시도하니 들으려고 하지 않고,
그 목사도 거룩한 척할 뿐이지 뒷조사하면 다 그늠이 그늠이란 논리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참으로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장원에 가서 커트를 하는데 아줌마들의 수다가 이어집니다.
어느 교회 어느 집사님은 교회 사람들 상대로 장사질 한다며?
어느 교회 다니는 어느 안수집사님은 교회 밖에서 입이 얼마나 거친지 욕을 안 하면 대화가 되지 않는다며?
어느 집사는 매일 술 처먹고 들어와서 애들 잠 안 재우며 했든 얘기 계속 하면서
아주 식구들을 미쳐버리게 한데...
그건 약과야 어느 교회 목사는 교회돈 몇십억 횡령해서 아주 난리 났어...
이런 대화를 듣고 있는 내내 머리가 아파오고 머리를 빨리 깎아달라고 재촉하길 두어 번...
제가 저런 저렴한 언행을 하는 교인은 아니지만, 마치 제가 비난을 듣는듯해서
얼마나 그 자리가 불편했던지 빨리 도망치고 싶은 마음 뿐이었습니다.
참으로 눈물이 날 정도로 비참했고, 의분이 치밀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왜 이 시대의 종교인들은 사서 욕을 먹나...
왜 짓밟히고 다니나...
도데체 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목사를 탓할 필요도 없고 무늬만 교인인 사람을 탓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히죽거리는 욕설은 저를 포함 기독교인 모두를 향한 일갈이었고, 우리 모두의 총체적인 책임입니다.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빛과 소금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이방인에게 짓밟힌다는 예수님의 추상같은 말씀을 알면서도
그대로 삶으로 녹여내지 않는 우리 모두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대놓고 조카님에게 설득할 명분도 안 생기고 하여
찔러나 본다는 식으로 예를 들어 한마디 했습니다.
어느 곳으로 손가락을 가리키며 내가 어딜 향하여 손가락을 세우고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더니
조카님이 있는 자리에서 각도가 좀 애매했는지
웃으면서 다가오더니 저와 비슷한 시선으로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바라봅니다.
그때 손가락을 구부렸다가 휘휘 돌렸습니다.
왜 손가락을 움지이냐고 가볍게 따집니다.
그랬다가 손가락을 고정하고 가리키는 곳을 보라고 했습니다.
"삼촌 아무것도 없잔아"...
"왜 없어 자세히 봐봐"...
허공에 대고 뭔 손가락질이냐고 하기에... 나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조카는 실없이 웃으면서 왜 그런 행동을 하냐고 하기에 저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하늘을 보지 않고 손가락의 각도와 모양만을 보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리키는 하늘이지 손가락의 생김새가 아니다."
내가 손가락을 구부려서 헷갈리든 말든, 손톱에 때가 있든, 수전증으로 손이 흔들리든,
중요한 것은 손의 모양이 아니라, 손이 가리키는 하늘이란 것입니다.
손이 더럽다고,손톱에 때가 끼었다고, 손가락이 굽었다고 하늘을 비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손은 손이고 하늘은 하늘일 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손가락질을 하든 하늘은 변함없이 고고하게 푸른 빛을 띠며 우리를 감싸고 있다는 것입니다.
손가락질을 잘못한다고 하늘의 모양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문제 있는 것은 손가락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보이는 손가락을 가지고 하늘을 이렇다저렇다 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행실이 저렴할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철없는 교인들 때문에 죄 없는 예수님이 덩달아 비난을 받습니다.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예수님을 욕합니다.
손가락이 잘못되었다고 하늘을 보고 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변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여전히 거룩하십니다.
여러분~ 손가락을 들고 하늘을 향해 가리켜 보시면서 손가락만 집중해서 보십시오.
손가락은 매우 잘 보여도 하늘은 촛점이 안 맞아서 어리어리하게 보입니다.
반대로 하늘에 촛점을 두고 하늘만 보십시오.
손가락이 두개로 혹은 어리어리해서 또렷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보는 촛점을 어디 두느냐에 따라서 가리키는 손가락이나 하늘은 잘 보이기도 하고 어지럽게 보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신성은 집중하지 아니하며 주변 상황만 보면 언제든지 넘어집니다.
신앙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만 보십시오.
하나님만 보면 주변의 좋지못한 상황은 눈에 안 들어옵니다.
그냥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내게 됩니다.
베드로도 예수님만 봤을 때는 물위를 걸었으나
주변의 상황을 보는 순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떨어져 물속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어디에 시야를 두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세상 것을 보면 세상 것이 나도 모르게 들어와 믿음의 씨앗들을 은근히 밀어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바라보면 세상 것이 나도 모르게 밀려납니다.
그게 신앙의 법칙입니다.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실망하는 것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기에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 중에 목사나 교인들의 그런 악한 모습에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간혹 어떤 사람 중에는 그런 모습에 실망하여 믿음마저 버립니다.
우리 조카님 같은 경우입니다.
목사님이 하는 말씀과 행실이 다른 것에 실망하여 힘들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든 저렇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여전히
공의로운 모습으로 자리를 지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문제이지, 하나님은 결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믿는 자의 행실이 말씀과 같지 아니하면 이방인에게 짓밟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영원한 안식에 문제가 생김을 걱정해야 합니다.
이방인에게 밟히는 믿음을 가진 그들은 그렇게 하더라도,
이 모든 걸 아는 우리들은 그들을 반면교사 삼아 그리 행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믿는 자들이 말씀대로 행하는 착한 행실을 보고 판단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목사님이 아무리 천하를 꿰는 주옥같은 설교를 할지라도
행실이 세상 이방인과 차별함이 없으면 비난을 받으며 멸망의 길로 들어갈 것이고,
믿는 우리 성도님들도 행실이 말씀과 같지 아니하면
이방인과 다를 바 전혀 없는 지옥 자식의 대열에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부디 주님을 가리키는 멸망당할 손가락을 보지 말고, 손가락 뒤에 있는 주님의 신성만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세상이 두 쪽이 나도 주변의 상황에 휘둘리지 말고
씩씩하게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사람만이 피니쉬라인을 통과하는 축복을 얻을 것입니다.
주변 상황을 보고 시험에 들지 마십시오.
주변 상황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 없는 것입니다.
그저 주님만을 바라보고 힘차게 달음박질하십시오.
그리고 이방인에게 혹은 믿음이 약한 교인들에게 우리가 모범적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에 충실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위대함을 알게 하고 영광 돌리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남이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그런 영혼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장 13-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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