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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나는 도요새 / 박경리

Joyfule 2014. 7. 22. 10:18

 

 

멀리 나는 도요새 / 박경리

 

  20대 이후 가파로웠던 생활 탓이었는지 노래를 배울 겨를이 없었고 기억에 남아 있는 노래 같은 것도 거의 없다. 6.25 당시 고향을 피난 갔을 무렵 전진(戰塞)을 미처 털어내기도 전에 들은 음악이 아득하게 멀고 무감동했던 것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근자에 와서 우리는 싫든 좋든 텔레비전에서, 라디오에서, 다방 같은 곳에서, 혹은 차 속에서, 심지어 길거리에서도 매일같이 흔하게 듣는 것이 가요다. 더군다나 무슨 순위에 올랐다 하면 오나 가나 귀가 따갑도록 되풀이 하여 들려오는 곡목. 그러나 열 번 스무 번 그 이상을 들어도 들을 그때뿐이지 가사 한 줄, 멜로디 한 토막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아마 기억 감퇴의 현상이 아닌가 싶다.그랬는데 요즘 이상하게 머리 속에서 맴도는 노래가 있는 것이다. "을지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보자, 아아아 우리의 서울"이 그것이며 또 하나는,"가장 높이 나는 새, 가장 멀리 나는 새, 도요새 도요새". 가사가 정확한 지 모르겠다. 그나마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구절뿐이다. 사과나무를 심어보자, 그 목청이 울 때마다 나는 어린 날 그림이 아름다운 동화책을 펴 보던 순간의 황홀함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요, 말할 수 없는 비애와 분노에 휘말린다. 을지로에 사과나무를 심어보자고?

 

  서울, 과연 우리의 서울은 있는가. 사탕발림도 유분수, 신경을 긁는 데도 한량이 있는 법이다. 온갖 질병을 앓으면서 단발마와도 같이 흉측스럽게 변모되어 가는 서울, 땅 속에도 하늘에도 두터운 오염이 막을 이루고 머지 않아 유령도시의 목쉰 신음소리라도 들려올 것같은 것을 상상하게 하는 서울, 그 도시에는 지금 통 속에 든 미꾸라지처럼 1천만을 육박하는 인구가 몸부림치고 있는데 그게 찬미하고 사랑하는 우리의 서울이겠는가. 을지로 죽어버린 땅에 사과나무를 심어보자고? 차라리 처참한 느낌마저 든다.


십여 년 전 산등성이에 진딧물 같이 다닥다닥 붙은 집들을 멀리 바라보면서 집 한 채를 중심하여 서너 채 정도씩 솎아내어 나무를 심었으면 하고 나는 공상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십여 년 동안 솎아내지 못한 이유(빈곤)를 짓이기듯 서울에는 너무나 엄청난 양의 시멘트를 쏟아부은 것이다.산등성이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 두 팔 가지면 살수 있는 그곳에 향수를 느낄 지경으로, 나는 전문가가 아니어서 정확하게 아는 것은 없으나 짐작하기에 서울을 때려 부수고 다시 건설을 하자면 해체의 비용만으로도 천문학적 숫자가 될 것이다,게다가 해체물(解體物)을 어디다 처분할 것인가.

 

바다 속도 우리가 사는 현장이요, 산꼭대기도 우리가 사는 현장이고 보면 지구 밖으로나 내다 버릴 판국이다. 버릴 수도 살 수도 없게 된 서울, 엉거주춤 뭉개고 앉아서 대전이다, 어디다 하며 수도 이전 얘기가 알쏭달쏭 나돌기도 하는 모양인데 언제까지 유지될까. 시간 문제만 남아 있는 게 아닐까. 하나의 도시가 그것도 수도가 수백년을 두고 생성해 온 것이라면 이십여 년 동안을 순간으로 볼 수 있고, 바로 십여 년이란 순간에 서울은 치명상을 입은 것이다. 가난이라는 강박관념이 저지른 범행이다. 우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서울을, 국토를, 그 소중함에 비하면 푼돈에 불과한 것을 벌기 위하여 나락이 도사린 발전을 위하여, 따지고 보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오늘 먹기 위하여 미래를, 내일을 저당잡힌 꼴일까.


 일본의 쯔찌다 다까시 교수가 쓴 <공업사회의 붕괴> 속에 산림지대를 개간하고 유휴지를 경작한다면 일본 인구가 2억이라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했다. 유기농업을 주장하면서도, 그 말은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것이다.


"가장 높이 나는 새, 가장 멀리 나는 새," 서울 가는 차 안에서 그 노래를 들었을 때 나는 마을 속으로 흐느꼈다. 그것은 생명의 애처로운 비상이었기 때문이다. <토지>에서도 몇 차례인가 나는 도요새에 대해 쓴 일이 있었다. 그러나 도요새의 얘기를 쓰자면 상당한 지면이 필요하겠기에 생략하기로 하고 하여간 가장 높이 나는 새, 가장 멀리 나는 새, 그 노래를 듣는 젊은이들은 과연 높은 곳이 무엇인지, 먼 곳의 뜻을 어떻게 헤아리는지 나는 몹시 궁금하다.

 

새는 날갯죽지 하나로 망망대해, 수만리 장천(長天)을 목마름과 배고픔과 또 무서운 폭풍을 견디며 자신의 삶을 구현하는데 그 높고 먼 곳을 행여 야망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것이나 아닐는지. 높은 곳은 출세요, 먼 곳을 정복이라 생각하는 것이나 아닐는지. 오늘처럼 많은 부모나 사회 전반에서 젊은이들을 야망으로 내모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야망 자체도 내용 면에 있어서 상당히 전과는 달라 자연을 벗삼아 심신을 단련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천하경륜의 뜻을 키우느니보다 방 속에 죄인 가두듯 시험 과목을 달달 외워 일류대학을 지향하게 하는 풍조, 아니면 이류를, 그것도 안되면 삼류를, 인생의 결정을 오로지 시험이 한다는 응고된 관념으로 세상은 병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물결은 너무나 거세어 땅에 발을 붙이려는 사람들까지 휩쓸어 간다. 해서 삼류대학에 간 아들을 위해 부모는 빛을 얻고 파출부로 뛰고 소를 팔고 밭뙈기를 판다. 

  날갯죽지 하나로 자신의 삶 전체를 구현하는 새, 대학의 문안과 문밖의 차이가 있을 수 없으련만 생명의 원천인 흙 한 줌보다 지폐한 장이 소중하다는 생활 철학에 찌든 현실에서는 문안과 문밖이 있을 뿐 하늘도 없고 땅도 없다. 따라서 문안에서는 쓸모 없는 지식을 채워 머리통만 커졌지 삽자루 하나 안 잡는 왜소한 인간을, 한 분야만 파고들어서 한 부분밖에는 볼 수 없는 무식한 전문가를 양산하고 문밖에서는 자신의 삶을 장난감 망가뜨리듯 어렵잖게 내동댕이치는 추세가 현저한데 이들 양자가 어찌 높이 멀리 나는 도요새를 알까보냐.

 

 일부에서는 요즘 청소년들이 편지 한 장 변변히 못 쓰는 것은 전화 탓이요, 객관적 입시제도 탓이라 왈가왈부하는데 물론 그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글이란 생각의 흔적이다 삶에 대한 애환과 생명에 대한 깊은 통찰력없이 생각의 샘에 물이 괼 수는 없는 것이다. 출세라는, 돈을 번다는 상자에 넣어진 사고방식, 그 상자는 일본의 전자제품같이 날로 작아져 간다. 그 상자에서 뛰쳐나온 자만이 우주를 느끼고 높이, 멀리 나는 도요새의 그 뜨거운 생명을 알게 될 것이다.


 생명은 우주를 포옹하고 간다. 인간도 초목도 벌레까지, 그리고 우리는 도달하는 것이 아니며 영원히 가는 것이다.옛날 노인이 말하기를 이야기는 거짓말이라도 노래는 다 참말이다, 오늘 글을 잘 쓴다는 전문가들보다 옛 노인이 먼저 더 정직하게 예술의 본질을 체득했던 것이었을까.아아, 그러나 지금은 노래도 거짓이로구나. 독백하며 일어서보니 밖에서는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겨울을 견뎌낸 나의 나무들이 환희에 차서 간지럽게 일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