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눈물 - 크레이그
근 2년간을 냉소주의에 빠져 그 실체를 모르고 살았던 나는 그것이 나 개인의 문제인 줄만 알았다. 하나님이 그것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도, 그것이 타인에게 얼마나 공격적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곳곳에서 냉소주의의 해악과 실체가 드러났고, 그 점을 깊이 자각한 이상 그 눅눅한 공간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냉소주의는 거짓을 사실로 믿게 한다. 냉소주의란 편견이다. 편견이란 상대방의 면모를 살펴보지도 않고 불신하는 예단적 태도를 말한다. 그러므로 냉소주의자는 친절하고 진실한 사람들마저 도매금으로 넘긴다. 성숙한 사랑이 아닌 애들처럼 유치한 태도인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바울은 자신에게 그토록 깊이 상처를 준 고린도 교인들에게 언제나 바라고 믿는 사랑을 말했다.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들에 대한 당연한 반응으로 우리 같으면 담장을 지르는 것이 예사이겠으나 바울은 달리 말한다. “고린도 교우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다 말하였고 내 마음은 여러분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여러분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옹색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자기 마음을 스스로 옹색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전적으로 믿으며 크게 자랑합니다.”
기독교 사회비평가 리차드 존 네하우스가 피츠버그 공항에서 내려 강연장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마중 나온 행사 관계자 한 사람이 차안에서 미국 사회 구조의 분열과 기독교적 가치의 상실을 개탄했다. 그는 수도 없이 예를 들어가며 신랄한 어조로 사회상황을 비난했다. 그 지루한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네하우스 목사는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자 내리면서 한 마디 조언을 던졌다. “시대가 나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시대가 나빠도 우리의 희망은 여전히 기독교적 가치이며 절망은 도덕적 죄입니다.”
나는 내 부친을 생각한다. 정의를 추구하는 검사로서 험악한 꼴을 수도 없이 겪으신 분이지만 여전히 긍정적이고 밝게 사시는 분이다. 이런 삶의 태도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렇게 살기로 선택해서 나온 결과임을 나는 깨닫는다.
11. 치명적인 권태
목회자들 역시 기력을 잃으면 시동 꺼진 배처럼 표류한다. 처음에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서서히 떠내려가도 곧 우리에게 활력을 주는 어떤 계기가 생겨날 것이라는 어렴풋한 생각으로 우리는 권태를 방치한다. 그러나 권태가 심해지면 바깥으로 관심을 기울이며 재미있는 일을 찾으려고 분주히 돌아다닌다. 자신을 좀더 대우해 주는 교회로 옮길 수는 없을까 찾아보기도 한다. 그리고 설교준비를 게을리하게 된다. 독서라든가 영적인 훈련 따위의 내밀한 일들을 중단한다.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교회를 통해 의미 있는 일을 하신다는 기본적인 믿음마저 망각한다. 권태란 사실 믿음의 인내에 은밀히 대항하는 불구대천의 원수이다. 그래서 한번 붙들리면 그만큼 치명적인 것이다. 내 경험상 다음의 다섯 가지 태도는 내 목회에 최대한의 활력을 준 것으로 입증되었다.
① 내적인 충실성을 유지하라. 내적인 충실성 없이 외면적인 충성만 보여주는 사람은 행위에 몰두하며, 그러한 태도는 필연적으로 무기력을 낳는다.
② 구석까지 파종하라. 내 경우 권태는 사람들 하나하나와 구체적으로 만나는 일에서 떠나 있을 때 자주 발생했다.
③ 적극적으로 기다리라. 내게 소망과 기대가 없으면 모든 것이 귀찮고 우울해질 뿐이다.
④ 친숙한 것을 사랑하라. 내 영혼이 평화와 안식을 찾아야 할 경우 익숙한 것들의 안정성, 예측 가능성이 나를 편안하게 한다.
⑤ 이유와 방법에 대한 물음을 놓지 말라. 질문과 호기심을 잃어버리는 곳에서 정체가 시작된다.
이 다섯 가지 접근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권태와 무기력이 지속되면 나는 스스로 다음의 몇 가지 질문을 해본다.
① 나의 영적인 훈련은 성령께서 뒷받침하는 것인가?
② 내 권태의 원인에 대해 주님께 질문했는가?
③ 목회의 어려움을 회피하거나 태만하지 않았나?
④ 어떤 근본적인 것들을 무시하고 있지 않은가?
12. 안과 밖이 일치된 목회
내가 성서에서 명백히 발견한 것은 목회자로서 내 진정성(authenticity)은 다음 네 가지 사실에 입각할 때 확고히 정립될 수 있다는 점이다. 첫째, 나의 영적인 은사 둘째, 하나님의 인도하심 셋째, 그리스도인의 성품 넷째,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순종이다.
현재의 목회지에서 2년을 사역한 이즈음 들어 나는 이 교회가 내게 그토록 잘 맞는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고 있는 중이다. 나는 이 느낌이 몹시 좋다. 목회생활 최초로 나는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 나는 내 일이 사랑스럽다. 교회 사무실에 가는 일도, 주일날의 사역도 이제는 늘 고대하는 마음이다. 그 일들이 소중하고 간절한 마음이다. 그러면 지금의 교회는 이전 교회들보다 사정이 나은가? 덜 고생스러운가? 그렇지 않다. 여건은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나는 이렇게 변했는가. 우선 나는 이제 내 성격에 좀더 솔직해지는 방식으로 목회한다. 그리고 이제는 전보다 더 자유를 느끼며 목회한다. 또한 나는 이제 나의 최우선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집중한다.
참된 목회란 내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의 목표로 일치된 삶을 말한다. 나의 모든 행동은 그 목표를 지원한다. 그것은 안과 밖이 일치된 하나의 중심으로부터 일한다는 뜻이다. 내 중심으로부터 목회할 때 나는 효율성을 느낀다. 그럴진대 나는 진리의 하나님이 내 안에 흐르는 사람, 곧 진리의 사람이 된다. 여기에 나의 목회적 전일성이 있다. 문제는 진정성이다. 하나로 통합된 ‘나’가 있을 때 우리는 영적인 활력을 느끼며 최후까지 인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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