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성균 수필 연재 - 山邑 素描
연풍(延豊), 얼마나 풍족한 고을이면 이름마저 연풍이냐고 할지 몰라서 말씀드리지만 연풍은 문경새재 아래 있는 기름진 들판도 변변치 못한 궁벽한 산골이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연풍 현감은 울고 왔다가 울고 갔다고 한다. 올 때는 하도 궁벽한 산골이라 기가 막혀 울고, 갈 때는 잣죽 맛을 못 잊어서 울었다고 한다.
현감은 십중팔구 도임 지에서 가렴주구(苛斂誅求)부터 궁리했기 쉽다. 벼슬길을 높여줄 권문(權門)이나 세도가에(勢道家) 줄을 댈 뇌물 마련 때문이다. 헌데 쥐어짜 보아야 쥐뿔도 거둬들일게 있어 보이지를 않으니 ‘이제 내 벼슬길은 이 산골짜기처럼 꽉 막혔구나’ 하고 울었기 십상이다. 귀양 지는 아니라 해도 내가보기에도 막다른 벼슬길인 좌천(左遷) 지쯤은 되어 보인다.
잣죽이 얼마나 맛있으면 울고 도임 한 현감을 울고 가게 했을까. 나는 캔에 든 인스턴트 잣죽은 먹어보았어도 진국 잣죽은 못 먹어보았다. 수정과에 몇 알씩 띄운 잣 알을 먹어본 바에 의하면 엄청 고소했다. 그 잣을 갈아서 끓인 잣죽 맛은 얼마나 고소할까 짐작이 간다. 아마 ‘꿀 먹은 벙어리’라는 말보다 ‘잣죽 먹은 현감’ 이라는 말이 더 속담이 의도한 바에 적절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연풍초등학교 자리가 옛 연풍 동헌이 있던 터다. 지금은 동헌만 남아 있지만 6. 25전에는 객사까지 다 남아 있었다. 초등학교 뒷산 이름이 잣밭산이다. 그러니까 동헌 뒷산이 잣 밭이었던 것이다. 현감께서는 잣죽은 원도 한도 없이 먹었으리라.
“원님께서는 작취미성(昨醉未醒)이십니다. 아침밥은 못 드실 것 같습니다.”
수청든 관기가 이방에게 귀뜸을 하면 ‘그려 알았어-.’하고 즉시 대령한 것이 잣죽이었을 성싶다.
잣죽도 잣죽 나름이다. 연풍 현감이 든 잣죽과 변 사또 정도가 든 잣죽은 질적으로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전자의 잣죽은 정이고, 후자의 잣죽은 아첨이다. 왜냐하면 변 사또는 토색질을 질탕하게 할 수 있는 기름진 남원들을 다스린 큰 벼슬아치지만, 연풍 현감은 토색질도 못해보는 깔고 앉으면 맞침맞을 만한 산골 다랑논이나 들여다본 작은 벼슬아치기 때문이다. 토색질 하는 벼슬아치 밑에 있는 구실아치는 주구(走狗)지만, 토색질도 못해 보는 벼슬아치 밑에 있는 구실아치는 그저 구실아치일 뿐이다.
내 팔자에는 종6품 외직 벼슬이 고작인가보다.’ 그리 마음을 비우면 그보다 더 큰 자유는 없다. 잣죽은 고을 백성의 현감에 대한 지극 정성을 은유적(隱喩的)으로 표현한 음식물인지도 모른다. 고을 백성의 정성을 듬뿍 받으며 그렁저렁 보낸 연풍 현감의 한세월 맘 편하기로 따지면 상감보다 좋은 팔자다. 그래서 이임하는 현감이 ‘정 때문에 운다’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울었는지 모른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가 정조 19년 그의 나이 52살에 연풍현감을 지냈다. 그 분의 벼슬은 연풍현감이 고작이다. 대개 궁중 화원(畵員)을 지냈을 뿐이다. 그 공으로 정조임금이 산수 좋고 인심 좋은 고을에 가서 그림이나 그리며 편히 지내라고 연풍 현감을 제수 했는지 모른다. 그 분의 그림은 사실묘사와 조국애가 어울려서 조국강산의 아름다움을 예술로 승화시켰다고 평가받는데, 나는 그 화풍이 잣죽 공경을 받으면서 연풍 현감을 지낼 때 이루어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조선 후기의 화가 유춘(有春) 이인문(李寅文)이 단원의 산수화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가 그린 연풍의 명소인 수옥폭포(漱玉瀑布)그림 사본(寫本)이 연풍지(延豊誌)에 실려 있다. 나는 가끔 그 사진의 호방하고 다감한 산수경개를 보면서 기탄 없는 마음으로 그려진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기탄 없는 마음이란 단원이 연풍 현감을 지내며 욕심 없이 인정과 자연에나 심취했던 마음 아닐까 싶다.
연풍은 내 고향이다.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나의 유토피아-. 나를 성장시켜준 연풍을 나는 사랑한다. 그래서 나는 '토마스모어'는 못 되었어도 연풍의 정기를 받아서 수필문학의 후학(後學)은 된 것이다.
방학도 끝나 가는 입추 말복 지경, 친애하는 우리 죽마고우들은 해가 설핏하면 일단 주호네 이발소로 모였다. 갈매실 냇물로 나가기 위해서다. 각자에게 임무가 분담된다. 양조장 집 규식이는 막걸리 준비, 주호는 양념과 양은냄비 준비, 석희는 여울낚시준비, 형수는 보쌈 놓을 준비 등등---.
갈매실 냇물은 남한강의 지류인 달천 상류다. 조령산(1017), 백화산(1064), 희양산(998)에서 발원한다. 갈매실은 냇물이 휘돌아 나가면서 만들어 놓은 넓은 자갈밭이다. 자갈밭은 여름 장마에 벌창하는 냇물로 깨끗하게 씻겨져 있었다. 이곳에 앉으면 옹배기 같은 연풍 분지를 만들어 놓은 산맥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냇가 자갈밭에는 패랭이꽃이 지천으로 피었고, 그 위로 메밀잠자리가 군무를 추듯이 유유히 날았다. 기우는 햇살에 산맥은 분명한 실루엣을 그렸다. 조령산은 가부좌를 틀고 앉은 스님의 탈속한 자세 같고, 백화산은 크고 유순하다.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봉암사(鳳岩寺)를 안고 돌아앉아 있는 희양산은 젖을 물리고 있는 어머니의 등허리 같이 안온하다. 산등성이는 햇살에 살아나고, 골짜기는 그늘에 저물고, 산읍은 조용하게 이내에 무친다. 어디한 곳도 불편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나는 냇물에 목욕을 하고 나와서 산그늘이 내리는 달아서 따끈따끈한 자갈에 벌렁 드러누워 그 저녁그늘이 그리는 산읍의 소묘에 공연히 맘이 격앙되었다. 행복에 겨워 일으키는 일종의 발작상태였을까. 벌떡 일어나서 황소 같은 석산이에게 덤벼들어 괴춤을 잡고 모래밭으로 끌었다. 그리고 그 녀석의 완력에 번쩍 들려 모래밭에 메어쳐지면 그 쾌감이 말할 수 없이 좋았다.
단원 김홍도도 이 모래밭에서 잣죽 대령하는 기골이 장대한 아전의 완력에 양반 체면 불구하고 메어쳐지면서 나처럼 행복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이 자리가 울고 온 현감들이 삶의 어느 경지를 터득하고 떠날 때 운 까닭을 만들어준 자리 아니었을까. 실제로 어느 날은 면장 님과 읍내 유지들이 주막 색시들과 같이 나오셔서 우리를 냇물 아래로 쫓고 희희낙락 삶의 한 때를 맘껏 즐기셨는데, 옛날 현감과 지방 토호(土豪)들도 그랬지 싶은 것이었다.
우리는 여울낚시를 드리우고 보쌈을 놓고, 반두 질을 해서 잡은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여 놓고 둘러앉아서 막걸리를 마셨다. 노을에 빨갛게 물든 수면위로 피라미들이 뛰어 오르고 천 변 버들 숲에서 소나기처럼 울던 말매미들도 지휘자의 마지막 지휘봉에 맞추는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울음을 일제히 뚝 그치고 나면 여울물 소리가 기립박수소리처럼 살아났다.
그 때 왜 그리 행복했는지-.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행복할 것인지 몰랐고, 알 필요도 없었다. 간은 제대로 맞았을까. 그 매운탕 냄비에 머리들을 틀어박고 열심히 먹던 잔광에 벌겋게 물든 빨가벗은 놈들의 모습-. 저만큼 산읍은 저녁연기에 가뭇하게 잦아들고 있었다.
내 수필의 근거는 그 돈독했던 풍경 안에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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