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성균 수필 연재 - 할머니 산소
아랫마을 산모롱이를 돌아들면 좌측 산비탈 중턱에 할머니의 산소가 있다.
이 산을 동네사람들은 달걀양지라고 부른다. 이름만큼이나 양지바르지만 비탈 진 석회암 산으로 나무도 잘 자라지 못했다. 좌청룡 우백호로 여길 수 있는 산줄기도 거느리지 못한 펑퍼짐한 산비탈이다. 그렇다고 ‘조상이 솔밭에 들었다’는 말처럼 솔숲에 둘러싸인 자리도 아니다. ‘달걀양지 땡양지/ 메 캐러가자’ 애들 노래처럼 양지바르기는 했다. 무식한 안목에도 할머니의 산소 자리는 명당이 아닌 건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할머니의 산소를 무성의하게 잡은 게 아닌가, 섭섭한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동네에 들며 나며 고개만 들면 할머니 산소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할머니 산소 아래 이르면 무심결에 걸음을 멈추고 산소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그러면 늦가을 아침 햇살 가득한 안방 아랫목에 한껏 편한 자세로 앉아 계시던 할머니 같은 봉분이 나를 내려다보며 ‘잘 다녀오너라.’ ‘잘 다녀왔느냐’ 하고 배웅도 해주시고, 마중도 해 주시는 것 같아서, 나도 속으로 ‘할머니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드리곤 했다.
어느 해 추석 아버지와 우리 형제들은 할머니 산소에 성묘를 마치고 제절에 서서 골짜기를 나려다 보고 있었다. 노랗게 물이 들어가는 풍요로운 초가을 들판이 맑은 햇살 아래 조용히 펼쳐져 있었다. 일말의 유감도 없는 평온한 풍경. 농부(農婦)이신 할머니가 생전에 제일 기뻐하시던 풍경이었다. 제절 끝에 팔짱을 끼고 서서 들판을 내려다보시던 아버지가 불쑥 한 말씀을 하셨다.
“너의 할머니가 봄에 나물을 뜯으러 올라오시면 이 자리에 앉아서 시간가는 줄 모르시고 봄이 오는 들판을 내려다 보셨느니라.”
아버지는 언제 할머니의 그런 모습을 눈여겨보셨을까. 할머니는 아버지만 보시면 농사에 전념하지 않고 읍내 출입이나 한다고 닦달을 하셨고, 아버지는 봉두난발을 하시고 들일에 몰두하시는 할머니를 늘 못마땅히 여기셨다.
“제발 들에 좀 나다니지 마세요. 어머니가 안 그러셔도 폐농 안 할 테니---.”
그러시며 아버지는 늘 읍내에 나가 사셨다. 물론 할머니가 들에 나가지 않으셨으면 아버지의 읍내 출입이 잦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할머니는 늘 아버지 때문에 맘을 졸이시며 들에서 사셨다. 삶의 방식이 모자지간의 정에 지장이 되는 건 아니었던가 보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삶을 예의 주시하며 사신 게 분명했다.
풍수에서 이르는 명당음택(明堂陰宅)이란 바로 말이지 후손이 조상 덕보자는 자리지, 돌아가신 분의 안락한 저승살이를 생각한 자리는 안이다. 아버지께서 후손의 발복에 욕심 내지 않고 할머니의 저승살이에 유념하여 산소를 쓰셨구나 생각하니 할머니의 산소가 더 없는 명당 같아 보였다. 그 이후 나는 아버지가 할머니의 산소자리를 소홀하게 잡았다는 생각을 깨끗이 씻어 버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겨울이었다. 건너편 산등성이가 가물가물 눈발에 묻히고 인적이 끊어진 빈들에 까치 울음소리만 뚝 떨어지는 겨울, 동네에 들다가 눈발에 묻히는 할머니의 산소를 올려다보면 무명 수건으로 볼을 싸맨 할머니가 “이제 오느냐, 춥다. 얼른 집으로 들어가거라.” 하시며 산소 제절에 떨고 서 계시는 듯 해서 차마 멈춰 선 발걸음을 돌이킬 수가 없었다. 긴 겨울 동안 할머니는 유택 안에 갇혀서 얼마나 고적할까 생각하면, 생전에 할머니가 겨울을 나며 쓰시던 물레라도 부장품으로 넣어 드릴걸 그랬다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얼른 봄이 와서 할머니가 산소 제절에 나앉으시기를 바랄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다행이 할머니의 산소에는 봄이 한발 빨리 왔다. 앞산 머리가 잔설을 이고 있을 때, 산소 제절에는 벌써 아지랑이가 피어나고 할미꽃이 조용히 돌아앉아 피었다. 그때쯤, 나는 할머니가 산소 제절에 나앉으셨을 것만 같아서 산소를 올려다보며 “할머니! 봄이 왔어요.” 맘속으로 기뻐서 소리 지르곤 했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산소자리를 돌아가시기 전부터 그 자리로 점찍어 두셨던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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