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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균 수필 연재 - 梨花嶺3

Joyfule 2012. 2. 18. 07:49

 

 

   

 

목성균 수필 연재 - 梨花嶺3

3. 京畿旅客

정전이 되고 놀란 백성들의 삶도 점차 안정 되어갔다. 백두대간을 따라서 출몰하던 빨치산들도 사라지고 이화령은 구름이 쉬어 넘는 평온한 고개로 되돌아갔다.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서 연풍에 주둔하고 있던 이화령 수비대도 박 중사, 김 중사 등 몇몇 노병을 연풍에 떨어트려 놓고 철수했다.

그 즈음 어느 봄날, 버스가 한 대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면서 장터거리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신기해서 버스에 모여들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버스와는 모양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종전의 버스는 엔진룸이 차 앞에 툭 튀어나와 있었는데 이 버스는 차체 안에 들어앉아 있어서 차 앞이 유리벽처럼 평평하게 마무리지어졌다. 산골사람들에게 처음 보는 그 버스의 생김이 ‘은하열차 99’와 같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우물안 개구리 같은 산골사람들에게 새로운 문물은 숨가쁜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처음 경기여객이 들어 왔을 때 장터거리 사람들이 다 몰려와서 버스를 외워 싸고 흥분을 했다. 버스 기사는 자랑스럽게 담배를 피워 물고 버스 앞에 서있었다.
“운전사 어른, 이 버스 어디서 옵니까?”
“상주서 옵니다”
“상주서 서울까지 가는데 얼마나 걸리나유?”
촌노의 물음에 운전기사는 무거운 목소리로 거만하게 대답했다.
“해 거름이면 들어가지요.”
상주서 서울 가는데 하루 해 동갑이면 된다는 게 촌 노들에게는 놀라운 사실일 뿐이었다. 상주에서 새재를 넘어 신혜원까지 하루, 신혜원에서 장호원까지 하루, 장호원에서 광나루까지 하루, 날쌘 파발마로도 사흘은 달려야 가는 길이다.

경기여객은 콩나물시루 같이 영남사람을 한양으로 실어 날랐다. 버스도 계속 증차되었다. 경기여객이 인정과 물류를 싣고 이화령을 넘나들면서 세상은 날로 발전되었다. 연풍사람들도 많이 변했다. 연풍사람들이 좀 멸시하는 어투로 이르던 ‘계란장수’가 차부에 여남은 명이나 생겼다. 이화령을 넘나드는 경기여객 승객을 상대로 찐 계란, 엿, 떡 같은 걸 팔았다. 계란장수는 대개 전쟁미망인인 새댁과 처녀들이었다. 처음에는 늙은 계란 장수도 있었는데, 웬일인지 늙은이 계란은 안 사먹고 새댁 계란만 히히 덕 거리며 사먹는 통에 ‘늙은이 계란은 골았나-. 더러워 계란장수 못하겠다.’며 치웠다.

버스가 들어오면 계란장수들은 버스에 우루루 몰려가서 문이 열리면 안으로 먼저 들어가려고 몸 쌈을 하고 난리였다. 그 모양새가 볼 상 사나워서 사람들은 언필칭 ‘계란장수계란장수’ 하고 업신여겼다. 전후의 궁핍한 사회실상의 한 단면이 이 궁벽한 이화령 아래 산 읍까지 흘러 들어와서 연출되는 것이었다.

계란장수인 산골 새댁들은 차츰 억세고 뻔뻔해지면서 얼굴이 반반한 순서에 따라서 하나 둘 사라져갔다. 딸린 것 없는 새댁이 사라진 것은 누구도 나쁘게 말하지 않았다. ‘청춘이 구만리 같은 게 제 길 찾아가야지-.’ 그 보수적인 산골 사람들의 사고도 전쟁후유증처럼 의외로 아주 쉽게 개화가 된 것이었다. 문제는 어린것을 떼어놓고 떠난 새댁들이었다. 그들은 당분간 지탄을 면치 못했다. 그 시어머니가 보채는 어린것을 업고 차부에 나와서, 경기여객이 들어오면 차장과 운전수를 상대로 사라진 며느리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다 부질 없는 짓이라는 걸 깨닫는데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릴 필요는 없었다. 어린것이 떠나간 제 어미를 잊어버리면 시부모는 따라서 가차없이 떠난 며느리를 잊어버렸다. 경기여객은 산골의 서럽고 암담한 새댁들도 그렇게 실어다가 치워버렸다. 그걸 혹자는 악역(惡役)이라 했고, 혹자는 선역(善役)이라 했다.

그 속에 어린 색시가 하나 끼어서 차츰 영악해져 갔는데, 내 초등학교 동창생 영자였다. 나는 그녀가 계란장수를 하는 게 싫었다. 동창생들이 계란장수라고 손가락 질 하는 것도 싫었다. 별꼴이었다. 내 색시라도 되는 것처럼 싫은 것이었다. 그녀도 얼마쯤 깍쟁이가 되더니 사라졌는데 어느 날 경기여객의 차장으로 변신되어 나타났다. 감색 제복에 쌍 갈래 머리를 하고, 잘록한 허리에 가죽 가방을 찬 그녀의 모습은 지금의 스튜어디스보다도 더 멋진 모습이었다. 어느 날 경기여객이 들어와서 멎고 그녀가 내렸을 때 그녀의 금의환향을 선망하며 붙들고 축하를 하는 바람에 버스가 연발을 했을 정도다.

그녀는 차부 앞으로 난 골목 끝에 있는 오두막집에 살았다. 홀어머니와 자매가 농토도 없이 살았다. 항상 집안은 청결했다. 나는 객쩍게 그녀가 없는 집 앞에 가서 깨끗하게 쓸어 놓은 마당과 담 밑에 핀 빨간 칸나 꽃을 한참 씩 훔쳐보곤 했다. 인기척이 없는 그녀의 집안에 홀로 피어 눈부시게 빨간 칸나가 나를 허무하게 하는 것이었다.
몇 해후 그녀는 경기여객에서 볼 수 없었다. 운전수 내연의 처가 되었느니, 조수하고 결혼을 했느니 풍문만 무성하고 진위여부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도 얼마동안은 경기여객이 차부에 들어와서 멈추고 감색 제목의 차장이 내리면 나는 깜짝 놀라서 가슴이 뛰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