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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균 수필 연재 - 敦篤에 대하여

Joyfule 2012. 2. 9. 04:09

 

    

 

목성균 수필 연재 - 敦篤에 대하여

돈독은 두터울 돈(敦)과 도타울 독(篤)으로 합성 된 한문 글자다. 옥편에는 돈이나 독이나 다같이 ‘厚’의 뜻으로 적혀있고, 국어사전에는 명사로서 ‘인정이 두터움’이라고 해석해 놓았다. 그러나 주로 ‘돈독하다’의 어근(語根)으로 쓰이는데, ‘돈독하다’는 ‘인정이 두텁다’는 뜻의 형용사로서 예를 들어 ‘이웃 간에 정이 돈독하다’느니 ‘우애가 돈독하다’느니 하는 등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이를 때 쓴다고 구체적으로 해석을 해 놓았다. yahoo한영사전에는 돈독은 돈후(敦厚)와 같은 말로 sincerity(성실, 정직: 표리가 없음)라고 영역(英譯)했다. 국어사전보다 추상적이지만 나는 영역이 맘에 든다. 돈독하다는 표현이 반드시 사람과 사람의 사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 고향 동네 앞들 복판에는 둥구나무가 한 쌍 서있다. 신작로가 개설되기 전에는 이 둥구나무 사이가 동네에 들고나는 길이었다고 하니까 당초에는 동구였던 셈이다. 동네를 연 사람 중에서 택리(擇里)에 안목이 있으신 분이 허전한 동네 앞을 비보(裨補)할 목적으로 심은 나무일 것이 분명하다. 비교적 모질게 크는 팽나무가 저만큼 클 때는 몇 백년은 좋이 묵었을 것이다. 나무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좋다. 새는 날 미명에 들어 나는 나무도 좋고, 저무는 날 노을에 묻히는 나무도 좋다. 또 이파리가 피어나는 봄의 나무, 뽀얗게 소나기에 묻히는 여름나무, 잎을 지우고 서있는 겨울나무 등 다 보기 좋다. 그러나 나무의 모습이 보기 좋은 것과 돈독해 보이는 것은 다르다. 보기가 좋다는 것은 시각적이고, 돈독해 보인다는 것은 마음의 느낌이다. 나무의 모습이 항상 보기가 좋다해도 돈독해 보일 때는 따로 있다. 갈걷이가 다 끝난 초겨울, 잎을 다 지운 나무가 빈들 가운데 의연하게 마주 서서 첫 눈발 속에 묻히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돈독해 보일 수가 없다. ‘그럭저럭 일년 농사를 마무리했네 그려-.’ 같이 늙은 두 농부가 그리 말하며 빈들을 바라보고 서있는 듯한 풍모다. 나무도 돈독해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서 돈독의 영역(英譯)인 sincerity가 나는 좋다.

낱말의 뜻은 그렇다 치고, 그보다도 ‘돈독하다’는 ‘돈도카다’로 발음 되는데 된소리와 된소리가 어울린 억양이 손아귀에 꼭 잡히는 조약돌의 무게 만치 목직할 뿐 아니라, 발음하는 맛이 꼭 춘분 때쯤 땅에 묻었던 항아리를 헐고 꺼낸 군내 나는 묵은 김치 맛처럼 그윽하다. 그래서 나는 ‘돈독하다’란 말을 좋아한다.
나는 미술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지만 밀레의 그림은 좋아한다. 그러나 바르비종파의 미술 경향인 자연에 대한 로맨틱한 감정과 서정적인 화취(畵趣)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고, 다른 바르비종파 화가와 달리 바르비종의 풍경보다 바르비종 농민의 삶을 바라본 밀레의 일련의 그림들 ‘이삭줍는 여인들’이나 ‘만종’ 등에서 느낄 수 있는 삶의 엄숙성 때문이다.
하루 일을 마치고 일한 자리에 흘린 이삭을 줍는 여인들의 진지한 모습과 저녁 종소리에 기도를 드리는 농부 내외의 감사한 모습에서 나는 고마운 마음을 느낀다. 그들은 행색으로 보아 바르비종의 가난한 소작농들이 분명하다. 그러나 삶의 고단함에 대한 비관적인 기색은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삶의 가치가 이러니 저러니 말한다면 삶을 모독하는 짓이다. 삶은 삶일 뿐이다. 삶은 현재형이지 미래형이 아니다. 밀레의 그림에 대한 나의 감상이다.

나는 밀레의 그림을 보면 내가 미술에 약간이나마 소질을 타고나지 못한 게 원망스럽다. 미술의 소질을 타고났으면 나는 분명히 바르비종파 아류(亞流)의 화가가 되였을 것이다. 물론 바르비종에 가서 그림을 그릴 필요까지는 없다. 내 고향 ‘윗버들미’가 곧 바르비종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고향 윗버들미에서 밀레 그림의 모티브인 ‘삶의 엄숙함’을 수도 없이 보았다.
나는 내 할머니가 하루 일을 마치고 밭고랑에서 일어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루종일 구부리고 일한 허리를 미쳐 펴지도 못하고 구부정한 자세로 밭둑으로 걸어 나오셨다. 그러나 나는 허리가 아파서 상을 찡그리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밭둑으로 걸어나오신 할머니는 비로소 허리를 펴시고 노을지는 쪽을 향해 서서 머리에 쓴 수건을 벗어서 툭탁툭탁 몸의 먼지를 터셨다. 노을에서 눈을 떼지 않으신 채-. 나는 할머니의 그 모습을 보고 감히 할머니 ‘고생하셨어요’하고 인사를 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께 고생했다고 하는 것은 할머니의 노동에 대한 가치를 평가 절하 하는 것만 같아서였다. 할머니의 노동은 단순히 노동이 아닌 엄숙한 삶의 현재진행형이었다.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은 장래에 대한 확신 여부를 떠나서 당장 살고 있다는 사실에 충만한 삶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은 화전정리 사업으로 다 사라졌지만 우리 동네 앞산에는 새조밭(火田)이 많았다. 그 중에서 화전정리의 일정선 아래 두 곰춘씨의 새조밭이 나란히 붙어있었다. 두 곰춘씨란 영춘씨와 신도씨의 별명이다. 영춘씨가 큰곰춘이고 신도씨가 작은 곰춘이다. 두사람이 일 욕심이 곰처럼 미욱한데 대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일욕심이 미욱한 거는 두 사람 다 한 저울에 달면 똑 같은 양이지만 영춘씨의 이름 영자를 곰자로 바꿔서 곰춘으로 부르게 된 까닭에 그 어른이 큰곰춘이, 신도씨가 작은 곰춘이로 불리어졌다. 두 분이 돌아가시고 묵정밭 되었지만 앞산의 두 뙈기 새조밭은 동네서 제일 조 농사가 잘 되는 밭으로 이름이 붙은 밭이었다.

산비탈 새조밭이 토질이 좋아서 조 농사가 잘되었을 리가 만무하다. 신도씨와 곰춘씨의 억척스러운 영농의 결과였다. 두 분은 빈 몸으로 그 가파른 비탈을 올라가는 걸 나는 보지 못했다. 항상 두엄이나 인분을 짊은 무거운 지게를 지고 앞뒤에 서서 올라갔다. 그렇게 밭을 걸군 까닭에 조농사가 잘된 것이다. 농사는 물론 토지의 땅심(地力) 덕도 있지만 땅심의 차이는 지주의 농심(農心)으로 얼마든지 상쇄가 가능하다. 앞산 비탈의 신도씨와 곰춘씨의 새조밭 농사가 그 증거인 것이었다. 나는 여름날 해질 녘 하루 일을 마치고 벌건 잔광 속에 앉아 있는 이 두분의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훗날 돈독이라는 낱말을 배울 때 퍼뜩 이 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분들은 저문 밭머리에 나란히 앉아서 무슨 말을 했을까? 늘 그게 그리 궁금했다. 삶의 견해를 말했을까. 오늘 무척 더웠다는 말을 했을까. 가정잡사(家庭雜事)를 말했을까. 그런 말은 전혀 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럼 무슨 말을 했을까. 그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노을도 지고 어둠에 묻히는 곰 같은 두 삶이 앉아 있는 모습에서 나는 눈을 떼지 못하고, 밀레인 양 돈독이라는 화제(畵題)의 그림을 그렸다.
돈독한 모습은 돈독한 사이일 때 만들어지는 것으로 그 사이는 하루 이틀의 사이가 아니라 세월이 걸리는 사이다. 춘분 때까지 한 항아리에서 묵은 배추김치 같은 사이다.
그 두 분은 죽어서 묵정밭이 된 그 새조밭 머리에 나란히 묻혔다. 그 자식들이 이농을 해서 성공을 했다. 어느 해 추석에 성묘를 왔다가 동네 경노당에 들려서 선친의 친구 되는 어른들에게 석물(石物)을 해 세우고 싶다고 상의를 했는데, 어른들이 두 곰춘씨의 무덤을 그리운 눈으로 건너다보며 말렸다고 한다.
“그야 자네들 맘이지만 석물을 해 세우면 자네들 낯은 날지 모르지만, 석물에 치여서 자네 선친의 생애는 안 보일 걸---.” 그 자식들은 다행이 동네 어른들이 한 말의 진의(眞意)를 알아듣고 석물은 해 세우지 않았다. 지금도 해마다 사초를 해서 아담하고 떼가 잘 살은 마침맞은 크기의 봉분(封墳) 두 기가 건너다보면 그들의 생애 만치 돈독해 보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