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성균 수필 연재 - 洞口
윗버들미의 진입로는 동네 못 미쳐서 둔덕을 이루었다. 그리 높지는 않다. 짐을 실은 트럭은 기어를 변속해야 넘지만 빈차나 승용차는 탄력으로 무난히 넘을 정도의 높이다.
동네 사람들은 그 둔덕에서 마중도 하고 배웅도 한다. 또 저물녘이면 누구를 기다리는 사람이 벌겋게 노을에 젖어서 서성거리기도 한다. 사람들은 둔덕에 올라서면 걸음을 멈추고 동네를 바라본다든지 동네로 드는 길을 뒤돌아보는 경향이 있다. 외처(外處) 사람들은 안 그러는데 우리동네 사람들은 그런다.
그 둔덕이 말하자면 우리 동네의 동구인 셈인데 나는 그 둔덕을 동구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다. 동구라면 동네 문간이다. 두 산줄기가 동네를 품어 안고 틔어 놓은 수구(水口)라면 말할 것도 없는 택리(擇里)의 일급지(一級地)인 동네 어귀다. 그 정도까지는 못 되더라도 최소한 산자락 모퉁이라든지, 동네를 안고 돌아 나가는 냇가라든지, 아니면 동네를 가로막은 숲 사잇길이라든지, 뭔가 그럴 듯한 지형지물이 받혀 주는 길목에 서낭나무와 장승 한 쌍쯤은 서 있어야 할 게 아니냐는, 나의 동구에 대한 관념에 그 둔덕은 전적으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무심하게 들어서다가 문득 계견(鷄犬)의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면 아늑하게 모여 있는 동네가 바라보이는 자리-. 유감스럽게도 우리 동네는 헤벌쭉한 남향받이 골짜기 안에 자리잡고 있어서 그런 자리가 있을 수 없다. 아랫마을 방앗간 모퉁이를 돌아서면 저만큼 납작한 지붕들이 하나라도 빠지면 후루루 흩어질 것만 같은 동네가 고스란히 드러나 보인다. 그렇다고 남의 동네 방앗간 모퉁이를 동구라고 할 수는 없고, 천상 아쉬운 대로 동네 앞 신작로의 둔덕을 동구로 칠 수밖에 없다.
동네 앞들 복판에 늙을 대로 늙은 말채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지금의 동네 진입로는 식민지 시대 일본사람들이 마을 안골에 텅스텐 광산을 개발하면서 개설한 것이고, 그 전에는 그 나무 아래로 동네에 드나드는 길이 나 있었다고 한다. 서낭나무가 서 있는 자리가 당초 우리 동네의 동구였던 셈이다. 차라리 신작로의 둔덕보다는 그 둥구나무 사이가 더 동구답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사람들은 신작로로 동네에 드나들었고 싫든 좋든 둔덕은 우리 동네의 동구가 되어 버렸다.
지리적 형상 여하에 불구하고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들고나는 길이 있고 그 길 어디쯤이 동구다. 그런데 사실은 그 길 어디쯤은 그 동네 사는 사람 마음의 어느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디 갔다 돌아오는 저문 날 둔덕에 올라서면 쿵하고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그러면 뉘 집 어린애 잠 트집 하는 소리거나, 어두운 부엌에서 쨍그랑 하고 사기 그릇 깨트리는 소리거나, 뉘 집 축생들이 철퍼덕거리고 죽 먹는 소리 등 은근하고 잔잔한 사람 사는 소리가 가슴에 부딪혀 온다. 그 소리를 들으면 떠돌다 돌아온 탕자라도 깊은숨을 쉬고 안도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지경(地境)을 넘어서면 모든 허물은 양해 받을 것 같고, 작은 성취는 크게 환영받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맘이 드는 것이다. 동구란 그런 길목이다. 그런 길목은 동네에 들어서는 동네사람 마음 어디 쯤에 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성싶다.
그렇다면 동구는 시골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동구는 도시의 달동네에도 있고, 아파트 단지에도 있고,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다 있다.
젊어서 달동네 골목 안에 셋방 살 때다. 늦은 밤 퇴근을 해서 골목에 들어서면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바람 빠진 고무공이거나 혹은 바퀴 빠진 세발자전거가 주인을 잃고 쓸쓸하게 버려져 있는 걸 보게 된다. 그러면 발걸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그걸 바라보게 되는데 골목 안 개구쟁이들이 최선을 다해서 노는 소리가 장마 때 벌창하는 개울 물소리처럼 울려오는 것이었다. 얼마나 열심히 뛰놀았으면 고무공이나 세발자전거를 저 지경을 해 놓았을까.
아내 말에 의하면 애들이 최선을 다해서 노는 것이나 내가 월급을 벌어오는 것이나 고맙기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우리 애들 진숙, 진용, 진국이가 곤히 잠든 셋방 윗목 희미한 백열등아래서 늦은 저녁밥상 앞에 마주 앉았을 때 아내가 잠든 애들을 들여다보며 한 말이었다.
젊은 날, 골목어귀에 도착하면 가슴에 안기는 안도감에 나는 턱없이 행복했다. 팔 소매에 토시를 끼고 하루종일 공문서를 작성하다 늦은 밤에 돌아오는 가난한 도청 서기의 처지에 개선 장군처럼 마음이 격앙되어서 구멍가게에 들려 라면땅이든지 새우깡 한 봉지를 사 들었다. 반드시 우리 애들을 주겠다는 마음도 아니다. 빈손이 부끄러워 사든 전리품 대용이다. 뉘 집 애라도 만나면 주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밤이 늦어서 골목 안에는 애들이 없었다. 집에 들어와서 곤히 잠든 내 새끼 머리맡에 놓곤 했다.
도시의 골목 어귀는 도시의 동구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라는 삶의 수용시설에 살지만 그 곳도 사람 사는 곳이긴 마찬가지다. 늦은 밤 아파트단지 정문에 들어서다가 졸음을 참고 앉아 있는 늙은 경비를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가지고 담배연기에 절은 좁은 경비실 안에서 이마를 마주 대고 앉아서 마시고 싶어진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그 마음이 아파트의 동구다. 그런 마음이 안 드는 사람은 태생적으로 ‘사회적 동물’에 부적한 사람일지 모른다.
윗버들미 내 고향 그 둔덕의 동네로 들어가다 오른편 길가에 ‘4H클럽’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 정방형의 튼실한 기단 위에 사방 1미터쯤 되는 네모 판을 만들어 세운 시멘트 조형물이었다. 판면(板面)에 네 잎 클로버를 음각하고 이파리마다 知, 德, 勞, 體의 네 글자를 음각 했다. 그리고 표석 하단에는 역시 ‘윗버들미 새마을4H 구락부’ 라고 음각 한 후, 바탕은 녹색 글씨는 흰 페인트칠로 마감한 표석이었다.
농촌 젊은이들이 고향을 떠나던 70년경에 세워졌다. 이 표석은 몇 해전까지 만 해도 까맣게 썩어서 파란 이끼에 덮인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4H클럽 표석’ 앞에 서면 마치 무명용사 비석 앞에 서는 것처럼 맘속으로 머리를 숙이곤 했다. 그 표석이 여름날 깊은 우물 밑바닥에서 길어 올린 샘물처럼 내 동구에 대한 갈증을 해갈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 둔덕에다 고향의 애착심을 조형해 놓은 젊은 그들은 국민소득의 발생지로 모두 떠나갔지만 한때 그들이 둔덕을 고향의 동구로 전원일치를 보고 대문에 문패 달 듯 세워 놓은 사실에 나도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아-. 여기가 내 고향이구나-!’
이 ‘4H표석’을 세울 궁리를 하면서 밤이 깊도록 머리를 맞대고 왈가왈부 했을 젊은 상수리나무 같은 그들이 보인다. 순이, 영자, 계순이 영수 호명이 덕근이 등등---. 처녀들은 부엌에 나가서 밤참으로 무엇을 만들었을 것이다. 고구마를 삶았을까, 수제비 국이라도 끓였을까. 하얗게 무서리 내리는 늦은 밤 그 불빛은 가물가물 멀리멀리 등대 불빛 같이 비췄으리라.
다음 날 이 둔덕이 얼마나 활기로 가득했을까. 남자들은 신명이 나서 없는 솜씨를 다해 작업을 하고 여자들은 모여 서서 허공으로 비누 방울 같은 웃음을 날렸기 쉽다.
그리고 70년대의 젊은 그들은 부득이 미래지향적인 애향심을 표석으로 거기 남겨 두고 그 표석 앞에서 헤어졌다. 먼저 처녀들이 도시 공단으로 떠났다. 처녀들은 정신대로 끌려가는 식민지시대의 처녀들처럼 엉켜서 울며 하나둘 떠났고, 그 때 마다 대범한 척한 청년들 얼굴에도 기실 자세히 보면 오장육부를 도려내는 아픈 기색이 엿보였다. 그리고 그들도 고향을 떠났다.
내 고향 윗버들미의 전통사회의 동구는 정동영이라는 정치인이 쉬라고 하는 60-70대에 의해서 여기까지 겨우겨우 지켜왔으나 그것은 역부족, 조만간 그 정치인의 말대로 전열은 괴멸되고 새로운 전통사회가 30-40대에 의해서 재편성될지 모른다. 제발 편견과 오류에 의해서 보편 타당한 향수가 영영 사라지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 ‘4H표석'이 서 있었을 때는 둔덕은 동구 같았다. 언제 어떤 경위로 그 표석도 없어졌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생활쓰레기가 버려진 그저 바람 부는 둔덕일 따름이다.
가끔 고향에 가면 둔덕에 서서 동구를 몰라 어리둥절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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