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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균 수필 연재 - 첫눈에 관한 기억들 (序)

Joyfule 2012. 3. 8. 08:28


    

 

 

목성균 수필 연재 - 첫눈에 관한 기억들 (序)


창 너머로 보이는 아파트 공사장 일꾼들이 일손을 멈추고 우암산을 건너다보는 모습이 자주 눈에 뜨인다. 뭐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나는 꼭 눈송이가 흰나비처럼 창문에 살포시 날아와서 나를 부르는 것 같아서 창 밖을 내다보게 된다. 하늘이 머리 위까지 나지막하게 가라앉아 있다. 어제부터 그렇다. 그러면 첫눈이 올 수도 있다는 기대감, 타당성 있는 것이다.

고향 윗버들미의 첫눈은 사람 맘을 몇 일씩 설레게 해놓고서야 마지못한 듯 마침내 왔다. 바깥일로는 콩 타작까지 바심이 다 끝나고 안일로는 김장을 담근 후에 온다. 그게 자연의 순리다. 지금이 그 때쯤 된다. 그 전에 오는 첫눈도 있을 수 있다. 자연의 조화를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아직 남은 일로 궁리에 차있는데 바라지 않는 식객처럼 오는 첫눈은 이미 기억되어지기를 포기한 첫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 첫눈은? 그리 어리석은 질문은 않기를 바란다. 첫눈은 수리적(數理的)인 명사가 아니라, 어떤 경우의 눈을 말하는 대명사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노농(老農)이 빈들처럼 홀가분하게 비운 마음으로 의젓하게 팔짱을 끼고 동구 밖을 향해 서있을 때 근친 오는 막내딸 동구에 들어서듯 눈썹 밑으로 홀연히 나려 앉는 눈이 첫눈이다. 비록 그 눈이 순서로는 그 해 들 어 두 번째 오는 눈이라 해도 첫눈이라고 봐줘도 동네 구장도 잘못이라고 시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슨 궤변이냐고 할 사람을 설득할 목적으로 한 예를 들어본다. 어느 해 우리 어머니, 당고모, 누이가 김장을 하는 날이었다. 절인 배추를 앞 냇물에 씻어 들이는데 풍세(風勢)가 사나워지더니 가루눈이 왔다. 나는 배추를 집으로 저들이고 있었다. 아직 솜바지 저고리로 갈아입기 전이라 추웠다. 게다가 바람에 불려와서 언 얼굴을 할퀴는 가루눈은 매웠다.
그 고약한 날 저물 녘까지, 아버지와 나는 김치 광을 짖고 어머니와 당고모와 누이는 김장을 버무려 김장독에 담는데 심심하면 심통 난 개 짖듯이 가루눈을 바람이 휘 뿌렸다. 그 눈이 그 해 겨울 처음 내린 눈이라고 해서 첫눈이라고 대접할 수는 없다. 고약한 날씨라는 기억밖에는 남겨준 게 없는 그 눈을 첫눈이라고 할 수는 절대로 없다.

며칠 후 눈이 다시 왔다. 아무래도 착 갈아 앉은 하늘이 반가운 일을 낼 것 같아서 온종일 서성거렸다. 동구의 둥구나무에 까치가 한 쌍 앉아있다. 짖을까 말까 망설이는 것 같지 않다. 그 미물도 조용히 기다리기로 맘을 먹고 있는 것이다. 동네 ‘워리’들이 빈들에서 레이스를 펼친다. 그러다 가끔 모두 먼 산을 보고 멈춰 선다. 건너말 둔덕에 하얗게 서있는 사람들 뭘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편이 쉬어 자세로 멍청하게 서있다. 그 때 눈이 왔다. 사람들의 기대감을 저버리는 법 없이 아주 양순하게 혹은 운명적인 모습으로 오는 눈이 첫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