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성균 수필 연재 - 노을 빛 추억
강화도 최북단 철산리 180오피. 임진강 예성강 한강의 하구가 모여 서해(西海)에 드는 물살이 굽어보이는 곳이다.
파란만장했던 개항기(開港期)에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위해서 흑색 쾌자를 입고 돼지털벙거지를 쓴 병졸들이 창을 들고 불란서함대와 맞서 있었을 지 모르는 돈대(墩臺)다. 이곳에서 바라본 서해 낙조 만치 아름다운 노을을 나는 그 이후 보지 못했다.
43년 전, 나는 이곳에서 군대생활을 했다. 당시 해병 제1여단 예하 부대가 교통 호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나는 어느 중대의 위생병으로 파견 근무 중이었다.
그 어느 날, 찬바람 날 때다. 중대장이 불러서 그의 천막으로 갔다. 자기 아내가 어린애를 나았는데 영 기운을 못 차리고 미역국도 못 먹는다며, 의무중대에 가서 링게르를 구해 다 놓아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자신은 없지만 그런다고 대답했다. 군대서 상관의 말에 안 된다는 말은 할 수 없다. 비록 정상적인 지휘선상의 명령이 아닌, 사적인 청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내가 군대 생활할 때는 제국의 군대처럼 그랬다. 그러나 나는 당시 군대의 분수 없이 경직된 기강상태를 조금도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내들이 조직 속에서 지켜야 할 일종의 의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음날 나는 자대(自隊)인 의무중대에 내려갔다. 보급 계 선임하사에게 친정 온 딸처럼 5프로(링게르)를 한 병 달라고 부탁을 했다.
“임마, 5프로는 사경(死境)의 전우(戰友)에게나 주사하는, 군인의 생명 같은 약이야-. 어린애 난 중대장 마누라한테 놓는 게 아니야-.”
선임하사는 일언지하에 완강히 거절을 했다. 나는 하루 종일 돌아가지 못하고 의무중대에서 길 잃은 강아지처럼 빙빙 돌았다. 그러다 선임하사관 앞에 가서 말없이 버티고 서있었다. 시위를 하는 것이었다.
“임마, 빨리 가-. 막차 시간 다 되었어.”
“빈손으로 갈 바에는 차라리 탈영을 하겠습니다.”
“어-! 자식. 너, 반항하는 거야-!”
‘죽여주십시오’ 하고 서있었다.
선임하사는 내가 시집 일을 부탁하러 친정 온 딸 같이 측은했던지 sodium chloride(생리식염수)를 두 병 주었다.
“선임하사관 님-! 이 건 소금물 아닙니까?”
5프로나, 생리식염수나 다 같이 총상환자(銃傷患者)의 탈수증세에 놓는 약품이다. 5프로는 생리식염수에 포도당 5프로가 희석되어 있다는 말로, 생리식염수와는 영양분이 첨가된 소금물과 그냥 소금물의 차이 뿐이다.
더 이상은 떼를 쓰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일이다.
“싫으면 그만 둬-. 임마.”
선임하사가 그러면 그나마 얻어 가지고 올 수없이 되고 마는 것이다. 막차를 타고 파견대로 돌아왔다. 링게르라고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내 실정이 마음을 무겁게 했는데 중대장은 링게르병과 똑 같은 소금물 병을 보더니 반색을 하며 내 손을 잡고 극구 치하를 하는 것이었다. 우선 마음이 놓였으나 상급자를 기만하는 것 같은 일말의 가책이 따랐다.
다음날 나는 철산리 동네로 내려갔다. 중대장은 어느 농가의 문간방을 얻어서 살림을 하고있었다. 산모가 핼쑥한 얼굴로 누어 있다가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비릿한 냄새가 방안에 가득했다. 아기 냄새인지 아기 엄마 냄새인지 모르지만 내 정신을 몽롱하게 했다. 생전처음 맡아보는 냄새였다. 처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내 막내 동생 났을 때 내가 새벽에 미역을 사러갔으니까, 그 때도 맡은 냄새일 것이다. 그러나 기억조차 없다. 그 때 내 나이 열다섯에 불과 했다. 생식본능이 깊이 잠재해 있을 뿐인 나이이니까 그 냄새를 못 맡았을 것이다.
나는 중대장 사모님을 누이고 주사를 놓았다. 핏기 없는 하얀 산모의 팔뚝에서 떨리는 손으로 혈관을 찾아 주사 바늘을 꼽는 일이, 숙달 된 솜씨와 상관없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병사의 팔뚝에 주사바늘을 꽂는 것과는 영 딴판이었다. 팔이 너무 투명하고 맑아서 그랬을까, 혈관이 파랗게 비치는데도 불구하고 주사바늘을 혈관에 바르게 꽂느라고 진땀이 날 지경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주사바늘을 뺐다 꽂다를 몇 번 거듭했다. 못 미더운 수병의 주사 솜씨를 상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온화한 표정으로 견뎌준 중대장 사모님의 교양을 나는 지금도 존경한다. 그 때 그녀가 참을성 없이 상을 찡그렸으면 나는 주사를 영 못 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녀는 비천한 군인 마누라로 내 기억에 남는 불상사가 발생했을 것이다. 기억할 가치가 없는 기억이 더 모질게 기억에 남는 법이다. 그 불행한 기억 대신 영구보존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기억을 남겨준 중대장 사모님을 나는 고맙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오전에 한 병 오후에 한 병 소금물 주사를 맞은 중대장 사모님은 딴사람처럼 생기가 돌았다. 저녁밥까지 해줘서 먹었다. 나는 밥을 먹고 중대장 사모님은 미역국을 먹고, 우리는 오누이처럼 겸상을 해서 먹었다. 비릿한 냄새 가득한 산모의 방에서 산모가 해주는 밥을 먹는 것이 황송해서인지, 황홀해서인지, 도무지 평온하지 못한 마음으로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서둘러서 오피로 올라오다가 나는 막 땅거미 지려는 오피 못 미친 산중턱에 털썩 주저앉았다. 서해낙조가 흑장미처럼 타고 있었다. 비로소 손에 든 책표지를 보았다. ‘靑鹿集’이었다. 책표지가 손때에 곱게 절어 있었다.
“목수병님 고마워요. 뭐 드릴게 없어요. 이 시집(詩集)은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간직했던 건데 제 고마운 마음으로 알고 받아주세요.”
중대장님 댁을 나오는데 사모님이 따라나와서 손을 잡아다가 들려준 책이다. 노을에 물든 중대장 사모님의 맑고 투명한 얼굴이 노을 빛을 그대로 반사했다. 노을 빛에 창백한 얼굴이 처연하리 만치 고왔다. 사모님이 내게 모나리자같이 웃어 주었다. 모나리자같이---.
잔광이 스러지며 대안의 북괴군 서치라이트 섬광이 비수처럼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고운 노을 빛을 보면 60년대 초, 180오피 올라가는 철산리 뒷산 중턱에 하염없이 앉아있던 상등 수병이 보인다.
그 때 온 세상이 다 고마웠다. 파견부대 중대장님도 고맙고, 의무중대 선임하사관도 고맙고, sodium chloride도 고마웠다. 그렇게 온 세상이 고마워 본 적이 내게는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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