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성균 수필 연재 - 큰밭
동네 앞 골짜기의 평지는 냇물을 가운데 두고 올망졸망한 논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주저앉아서 작지만 돈독하기 그지없는, 소위 윗버들미의 ‘앞들’을 이루었다.
밭들은 쫓겨난 강아지들처럼 양쪽 산기슭으로 올라가서 자리를 잡고 있는데, 동네 바로 아래, 신작로에 붙은 사래 긴 밭이 한 자리 있다. 동네 사람들은 그 밭은 큰밭이라고 불렀다.
논들은 저의들끼리만 어깨동무를 하고 큰밭은 돌려놓은 듯 했다. 그렇다고 밭이 외로워 보이는 건 아니다. 오히려 홍일점처럼 귀하고 당당해 보였다. 큰밭이란 그래서 붙은 고유명사지 밭이 크다는 형용사가 아니다.
물론 밭이 크기도 크다. 산골 밭으로 한 뙈기가 이틀갈이면 큰 밭이다. 그러나 크기로만 따지자면 이 밭보다 더 큰 밭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시나무골 김 서방 네 밭과, 뒷들 박 서방 네 밭은 사흘갈이다. 이틀갈이 정도의 밭은 동네에 몇 뙈기 된다. 그럼에도 유독 이 밭을 큰밭이라고 부르는 것은 토지의 위상(位相)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위상이 높다는 것은 비단 경작하기 편하고 생산성이 높다는 토지의 효용가치만을 이르는 말이 아니고, 그보다 토지의 존재가치를 이르는 말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토지 존재가치는 좋은 자리를 차지한 입지조건 때문이겠으나, 그보다 토지가 그 자리 값을 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토지가 자리 값을 하는 것은 중이 제 머리 못 깎듯이 제가 하는 게 아니고 경작자의 작의(作意) 여하에 따라서 값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작황(作況)이 풍작이면 존재가치가 보이고, 흉작이면 안 보이기 때문이다.
토지의 존재가치는 힘을 다한 경작(耕作)과 그 작의(作意)를 온전히 받아드릴 줄 아는 토지의 합작이다. 즉, 경마에서 1등을 하면 말과 기수가 같이 빛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나 할까. 그래서 큰밭이 선망의 대상이라면 큰밭 주인은 존경의 대상이었다.
나는 청년기에 큰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니 큰밭을 경작하는 농부의 작의에 더 큰 영향을 받았는지 모른다.
당시 이 밭 임자는 함창어른이었다. 함창어른은 큰밭에 하곡으로 보리를 갈고, 추곡으로는 조를 갈았다. 한번도 흉작인 걸 못 봤다. 가뭄 든 해에도 다른 밭들이 다 가뭄을 타도 이 밭만은 가뭄을 안 탔다. 까닭이야 밭의 뛰어난 보습력(保濕力) 때문이겠지만 사람들은 말하기를 함창양반의 가뭄 극복을 위한 노력 덕분이라고 했다. 간과(看過)할 수 없는 함창어른의 가뭄에 대처한 노고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재해에 당하여 함창어른은 손을 놓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지는 않았다. 밭 골을 타서 곡식 포기에 북을 돋아 주고, 풀을 베어다 밭 골에 깔아서 수분증발을 막아주었다. 그 것이 극심한 가뭄 방지책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함창어른이 할 수 있는 한은 다 했다고 동네 사람은 인정을 했다.
이른봄이면 장원처럼 새파란 보리밭 위로 종달새가 ‘지지배배’거리며 하늘 높이 떠오르고, 초여름에는 누렇게 익은 보리밭이 심해처럼 너울을 짓고 출렁거렸다. 저녁 때 노을지는 큰밭 머리에 서면 뉘 부르는 소리 들리는 듯해서 나는 노을에 귀 기울이고 한참동안 서있기 일쑤였다.
“조 이삭이 마치 끌방망이 같네 그려-.”
사람들은 큰밭의 조 이삭을 보고 그리 감탄을 했다.
함창어른은 해마다 길에 면한 조 밭 가장자리 두 골에는 반드시 울타리처럼 수수를 심었다. 오곡에도 못 드는 수수를 무엇 하러 두 골씩이나 심는지 알 수 없었다. 토지를 경제적으로 이용하지 못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느 해 가을 나는 문득 함창어른의 뜻을 깨닫고 ‘참새가 어찌 봉황의 뜻을 알랴’ 큰 진리라도 깨친 듯 그리 쾌재를 불렀다.
무심히 수숫대의 주열 아래로 들어서던 나는 문득 예감에 수숫대 끝을 쳐다보았다. 모가지가 부러질 듯 구부러진 수수이삭의 무게 위로 막 흰 구름이 한쪽이 지나가고 있었다. 넓은 쪽빛 하늘을 찌를 듯 자란 수숫대의 높이와 그 끝에 매달린 이삭의 무게에 감동해서 우뚝 멈춰 섰다.
그 후 알고 보니 수숫대 아래로 지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내 마음과 같은 듯 했다. 들에서 돌아오는 고단한 농부들도, 잔칫집에서 돌아오는 취한 노인들도, 장에 갔다 오는 아낙네들도 이 수숫대 아래 들어서면 발걸음을 멈추고 수숫대 높이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슨 말을 주고받았다. 고단한 시절을 넘어 와서 가을을 맞이한 농부의 자부심을 주거니 받거니 서로 치하는 듯 보였다. 함창어른은 가을농부의 자부심을 고양하기 위해서 사래 긴 밭 두 골을 할애(割愛)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 것은 밭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고 함창어른의 위상도 높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부지런하기 이를 데 없는 함창어른이 큰밭에서 수확체감의 법칙을 극복하고 고부가가치를 거두는 영농을 한 것이다. 그런 독농(篤農)에 의해서 큰밭의 존재가치는 확연해 보였다. 함창어른은 큰밭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데 까지 높이는 것이 큰밭을 차지한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었다.
윗버들미 사람들은 누구나 큰밭 주인이 되어 보겠다는 꿈을 꾸면서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꿈일지도 모른다. 그 밭이 매물(賣物)로 나올 일도 없거니와 매물로 나온다고 해도 백 여 호가 넘는 동네에서 내가 차지할 수 있다고 보장할 수도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죽기 전에 반듯이 큰밭을 차지하고 말리라는 마음으로 분발하며 살았다.
그러나 반드시 큰밭을 내 수중에 넣겠다고 공표하고 사는 사람은 없었다. 가슴에 불씨처럼 간수하고 살았다. 그것은 고독한 자기와의 싸움, 농부의 길이다. 거기에는 비열한 술수가 있을 수가 없다. 오직 자신의 노력을 집약적으로 자기 토지에 투입하는 방법 밖에는 별 수가 없다. 농부가 어떤 정치인들처럼 모리배와 야합을 할 것인가. 총을 들고 은행을 털 것인가. 부동산 투기를 할 것인가. 되든 안 되든 오직 열심히 농사를 짓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은 없다.
윗버들미 사람들이 큰밭을 염원하는 마음은 일종의 신앙심 같은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 마음 먹어보지도 않은 사람은 농부가 아니라 농노(農奴)에 불과하다고 보아도 그르지 않다. 그런 사람이 더러 있긴 했다. 고자인 복경씨, 주태배기 수백씨, 팔푼이 석돌씨 등등 어느 동네나 있게 마련인 몇 몇 비농(非農)들이다. 그 외는 모두 큰밭을 내 토지로 갖고 싶은 염원으로 살았으리라. 큰밭이란 이름은 그래서 부쳐진 것이 분명하다.
큰밭이 없었으면 협촌 윗버들미 사람들은 무슨 희망으로 그 고달픈 세월을 건너 저 피안에 이르셨을까. 나는 가끔 유지봉 기슭에 편안하게 자리한 윗버들미 선대 어른들의 나직한 무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 사는 곳에는 어디나 큰밭이 있다. 사람 산다는 것은 큰밭을 차지하려는 분발이다. 문제는 큰밭을 차지하고 나서다. 큰밭은 차지하기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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