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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균 수필 연재 - 본개나루에서

Joyfule 2012. 1. 7. 08:34

 

   

 

목성균 수필 연재 - 본개나루에서


 날은 저무는데, 포장도로가 끝나고 황폐한 비포장도로가 시작되었다. 차를 세우고 내려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오른편에는 나지막하게 와서 멎은 산자락에 동네가 안겨 있고, 왼편으로는 멀리까지 들판이 열려 있는데 들판 끝에 비닐 하우스가 하얗게 모여 있는 게 바라보였다.
비포장 도로가 그 들판을 건너 일직선으로 뻗어 있었다. 길가에 늙을 대로 늙은 재래종 미루나무가 서 있었다. 한아름쯤 되는 미루나무의 둥치는 썩어서 속이 텅 비었고 나무껍데기가 거북이 등처럼 두툴두툴 했다. 나무의 늙은 둥치에는 형편없이 빈약한 가지들이 몇 개씩 뻗어 있을 뿐이었다. 저 가지가 이 겨울을 잘 넘기고 봄에 가서 이파리를 피울 수 있을지는 그 때 가 보아야만 알 것 같았다. 더러 빠진 자리가 있기는 했지만 미루나무는 길 양편에 2열 종대로 주열을 이루고 비닐하우스가 있는 들 저쪽까지 서 있었다.


나는 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서 '한국 도로지도' 책을 다시 펴 보았다. 1008번 지방도로를 따라 부곡온천을 지나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북쪽에서 와서 남쪽으로 가로질러 가는 도로를 만나는 걸로 그려져 있다. 그 곳이 인교사거리인데 우회전을 하면 낙동강을 건너서, 주남저수지를 지나 남해고속도로 진영 I.C에 이르는 1015 지방도다. 1015지방도는 전구간이 포장되었다고 청색 실선으로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식민지시대의 신작로가 나타난 것이다. 나는 지금 시간을 뒤돌아 가는 여행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착각에 잠겼다. 아무튼 이제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재래종 미루나무 가로수가 서 있는 신작로를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옛날에 우리 집 안방 문설주 위에 걸린 사진틀에는 가족들의 사진을 끼우고 남은 자리에 한 장의 풍경 사진이 끼워져 있었다. 어느 잡지의 화보에서 오려 넣은 사진 같아 보였는데 사진틀에 그 사진을 끼워 넣은 분은 아버지였을 것이다. 사진은 저문 신작로를 머리에 보퉁이를 이고 두 손을 활개저으며 걸어가는 중년이 넘은 식민지 아낙의 뒷모습이었다. 신작로는 약간 오르막길이고 오르막 정상에 오두막 한 채가 산란하게 저녁 연기를 피우며 납작하게 주저앉아 있었다. 주막 같아 보였다. 나는 그 풍경 사진을 퍽 좋아했다. 어려서는 공연히 좋은 느낌이었지만 나이 먹으면서 풍경사진의 아낙을 우리 할머니라고 생각하며 각별한 마음으로 보게 되었다.


식민지 시대에 우리는 수원에 살았다. 아버지가 일본 군수품 회사인 '조선운모주식회사'에 다니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할머니는 수원의 아들집에 살지 않고 충청도 산골에서 홀로 농사와 길쌈을 하며 사셨다. 시골 과수댁의 생리에 도시생활이 맞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철 따라서 할머니는 수원 아들네 집에 오셨다. 꼭 어두워서 도착을 하셨다. 비파소리 같은 숨을 몰아 쉬며 보퉁이를 나려 놓고 마루에 털썩 주저앉으셨다. 그리고 우물물을 떠다 발을 담그셨다. 발에 얼마나 열이 나셨으면 도착하자마자 찬물에 발부터 식히셨을까. 문경 새재 아래서 수원까지는 하루 100리씩을 걸어도 댓새 이상 걸어야 하는 길이다. 그 먼길을 할머니는 빈 몸도 아니고 고개가 부러지게 무거운 보퉁이를 이고 오셨다. 할머니는 고단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삶 자체가 보람이었을까. 할머니의 보퉁이를 끄르면 말린 백편, 갱엿, 밤, 대추. 곶감 등 눈물겨운 할머니의 마음이 쏟아졌다. 닷새 사진틀 한 쪽을 차지한 그 풍경사진을 나는 손자가 보고 싶은 급한 마음에서 저문 노정을 허둥지둥 줄이는 우리 할머니라고 생각했다. 그 소중한 풍경 사진은 사진틀과 더불어 없어 졌는데 의외로 오늘 여기서 그 할머니의 신작로를 만나게 된 것이다.


앞으로 갈까. 뒤 돌아갈까 망설이다가 조금 더 가보면 알겠지 싶어서 다시 시동을 걸고 비포장 도로를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달려갔다. 조금 가자 신작로는 강둑에 다다랐다. 낙동강이다. 강에 다리를 놓고 있었다. 강바닥과 강 양안의 고수부지가 어지럽게 파헤쳐져 있었다. 다리발이 몇 개 세워지고 공사는 일단 중단 된 것 같아 보였다. 가난한 지방재정으로 다리를 놓기에는 강이 너무 넓어 보였다. 저 다리발은 다음 선거 때까지 정부의 교부금을 기다리며 마냥 서 있을 수밖에 도리가 없어 보였다.
강 건너편에도 비포장 도로가 언덕 너머서부터 직선으로 뻗어 와서 강에 닿아 있었다. 비포장 도로가 남아 있는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다리를 놓은 다음에 포장을 하려고 강 양안의 신작로는 옛날 그대로 남겨 놓은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신작로의 노면을 작업차량이 형편없이 망가트리며 다녔고 보수를 하지 않고 방치한 것 같다.
앞으로 더 이상 갈 수는 없었다. 날은 마침내 어둡고 있었다.


나는 지금 주남저수지에 철새 떼를 보러 가는 길이다.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여행 목적이 강물처럼 내 마음을 어둡게 한다. 도대체 조류학자도 아닌 주제에 철새 도래지에는 무엇하러 가는 것인가. 여행의 명분 없음이 짜증났다. 솔직하게 말해서 노을 속으로 비상하는 새의 날갯짓이 애수인지, 환희인지? 저수지 기슭에 떨어진 깃털을 주워 들면 철새의 고단한 울음소리가 배여 있는지, 없는지? 내게 그 것은 관념의 사치일 뿐 여행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조수석에 비닐봉지에 담긴 노란 감귤 몇 개가 내 침울을 눈치 챘는지 따뜻하게 쳐다본다. 집에서 떠날 때 아내가 달다면서 가다 먹으라고 놓아준 귤이다. 이 여행은 아내의 권고로 떠났다. 아내가 주남저수지에 다녀오란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여행이라도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아내의 여행 권고는 이례적이다. 여행을 다녀와서 심기일전(心機一轉)하라는 뜻인지, 옆에서 보기에 갑갑한 퇴직자의 침울을 잠시 소개(疏開)시키고 자기가 좀 자유로워 보려는 마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아내의 마음을 고맙게 여기고 여행을 떠난 것이다.


차에서 나려 강둑에 섰다. 수량이 현저히 준 어두운 겨울 강이 조용히 흐른다. 압록강 다음으로 긴 우리나라 제 2의 천리장강이 불원간 하구에 이르기 위해서 유속을 줄인다. 수시로 거론되는 낙동강의 오염, 낙동강의 유역면적은 무려 2만3860평방 킬로미터라고 한다. 사람들은 그 넓은 유역에서 이뤄지는 현대화의 온갖 탐욕적인 삶의 배설물을 다 강에다 쏟아 붇는다. 그 배설물을 다 받아 내야 하는 강의 비애, 창녀처럼 어둡다.
강둑으로 어느 비닐 하우스에서 일을 하고 나왔을 늙은 농부가 나를 향해서 걸어 왔다. 농부는 내 행색을 훑어보더니 "어딜 가시오?" 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가긴 주남저수지를 가는 길입니다만, 길을 잘못 든 것 같습니다." 짓적어 하며 대답하자 "잘못 들고 말고, 옛날 같으면 도선(渡船)으로 건너가면 바로 저 산 너머지만, 도선도 없고 다리는 놓다 말았으니 되돌아가서 수산다리를 건너야 하오." 하는 것이었다. "도선까지 있었으면 옛날에는 큰 나루였겠습니다." 공연히 늙은 농부의 눈치를 보며 슬쩍 이 강가의 좋은 세월을 짚어 보자 "암요. 수산나루만은 못했어도 본개나루하면 남지, 밀양, 창원사람들은 안 건너본 사람이 별로 없지요. 옛날에는 저 쪽 강둑에 색주가도 있고 흥청거렸지-. 그 때가 사람 사는 게 힘은 들었어도 재미는 있었는데-." 늙은 농부의 언성이 약간 고양되더니 잠시 침묵 후 "더 저물기 전에 어서 가시오" 하고 동네를 향해서 갔다.


질펀한 강변의 들판으로 보아서 공출한 볏가마니를 가득 싣고 목탄차가 내가 서 있는 이쯤서 도선을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목탄차 운전수가 도선 사공을 재촉하는 고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날은 저무는데 사공은 주막에서 이미 만취가 되어 직무를 유기하고, 공출차를 호송하는 서기(書記)만 몸이 달아서 오줌마려운 강아지처럼 강둑에서 서서 끙끙 앓고---.
가을이면 주막이 있던 저 쪽 강둑에 신행 가마도 머물렀으리-. 짓궂은 강마을 청년들이 몰려나와서 신랑을 잡아 가지고 주막으로 들어갔을 터이다. 안면 있는 인근 동네의 새신랑을 다루려는 강마을 떠거머리 총각들의 장난질이다. 상객(上客)은 발을 구르며 호령을 했으나 짓궂은 강마을 떠꺼머리들은 들은 척도 않고, 어느새 취해서 육자배기까지 한 곡조 뽑는데 상객만 몸이 달았다. 급기야 상객은 안동네 원로인 친구에게 구원을 청하였기 쉽다. 그리하여 마침내 강마을의 학 같은 원로가 와서 "이놈들아, 이게 무슨 행패냐. 네 놈들이 저 신랑 네 동네로 장가 가면 그 보복을 어찌 감당하려고 이러느냐." 그제야 신랑은 놓여나고 신행 가마는 떠났을 것이다.


식민지 시대의 신작로가 다행이 내 여행의 무의미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이었다. 그 시대 신식청년이 이 자리쯤 서서 나처럼 저물었을까. 전도가 불투명한 시대, 깜깜한 강둑에 막막하게 서 있었을 신식청년의 암담한 그림자를 상상하게 된 연유는 신작로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