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성균 수필 연재 - 살포
지금은 없어졌지만, 농부가 늙어서 드는 농사 연장에 살포라는 것이 있었다. 물꼬 보는 데 쓰는 연장인데 긴 자루 끝에 손바닥 크기의 납작하게 날이 선 네모진 삽이 달렸다. 언뜻 보면 창 같다. 실제로 장비처럼 전의(戰意)가 충천해서 고샅을 내닫는 늙은 농부를 보면 살포를 내지를 창처럼 꼬나들었다. 물싸움을 하러 가는 것이다. 그러나 저 살포로 일내지 하는 걱정은 기우(杞憂)다. 살포는 노농(老農)의 원로적 품위 유지용이지 결코 흉기는 아니다.
달려온 노농이 중세 서구의 기사처럼 상대방 물꼬에 살포를 힘껏 꼽으면 바로 결투로 돌입한다. 죽마고우로 한평생 같이 늙어 온 처지 아닌가, 절대로 살포를 몸에 들이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건 살의를 드러내는 짓이다. 물꼬에 살포를 꼽는 것은 결투의 신청인 동시에 원수질 짓은 말자는 페어 플레이의 다짐이기도 하다. 자존심만 높지 기력은 달린다. 업어치기 한판 같은 화려한 승부는 그리운 추억일 뿐, 겨우 옆굴리기나 해보는 정도의 이전투구에 불과하다. 때문에 불상사는 염려 안 해도 된다. 저물녘, 냇가에 소를 풀어놓고 뒤잡이 치던 유년의 정서가 배어 나오는 싸움일 뿐이다.
살포를 든 노농의 입성(옷)은 한결같이 풀먹여서 다림질한 홑중위 적삼이다. 삼베거나 모시거나 명이거나 그 댁 살림 형편과는 전혀 관계없이 노농이 품위는 모두 학처럼 소쇄(瀟灑)하다. 살포 든 품위에 손색없도록 배려한 며느리의 정성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 입성을 물꼬 진흙탕에 버무리면서 뒹구는 노농의 물꼬 싸움을 보면 '예, 싸워야 오래 사십니다' 하는 버르장머리 없는 호감이 가는 것이다.
물꼬는 양보할 수 없는 가세(家勢)의 보전 지역이다. 살포는 연장이라기보다 가세의 영역을 지키는 한 집안 대주의 의지를 고양하는 물건이다. 연장의 효율성으로 따지자면 삽이 월등 났지만 그건 젊은이들의 연장이다. 삽이 실권이라면 살포는 권위다. 그래서 젊은이가 살포를 든다면 지탄받을 일이듯이 늙은이가 삽을 들면 말년을 백안시 당하기 십상이다.
노농의 물꼬 관리를 농사일로 보느냐 안 보느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사실 풀기가 빳빳한 하얀 중위적삼에 흙물 튈까 저어하듯 물꼬로부터 썩 떨어져서 허리도 구부리지 않고 살포로 물꼬를 트거나 막는 짓은 원로의 거만한 한유(閑裕)일지언정 일은 아니다.
그러나 물꼬 관리가 논농사의 성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임을 감안하면 일이 아니라고 볼 수도 없다. 물꼬를 트고 막는 일은 한 삽질감이다 .그래도 선친을 모시고 있는 젊은 농군은 삽을 대서는 안 되는 곳이 물꼬다. 선친이 안 계시면 모르지만 선친이 살아 정정한데 젊은 자식이 앞서서 삽으로 물꼬를 트거나 막는 짓을 한다면 그는 선친의 권위를 탈취하는 후레자식이다.
허리가 꼿꼿한 로맨스그레이가 짚은 단장이 허리힘을 받치려고 짚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늙음의 멋을 연출하는 소품이며, 떳떳한 늙음을 주장하는 인격이며, 허전한 마음을 보완해 주는 지주(支柱)다. 살포도 노농의 그와 같은 용도로 보는 게 합당하다.
물론 늙었다고 다 살포를 들고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살포를 들고 다녀도 남 보기에 떳떳할 때 비로소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논 한 마지기 없는 주제에 살포 들고 다닌다면 잠방이 입고 통영갓 쓴 꼴이, 또 물려받은 세전지물인 논마지기를 겨우 붙들고 있는 주제거나, 그나마 줄여붙인 주제에 살포 든 꼴은 흡사 남이 장에 간다고 씨오쟁이 떼어지고 따라가는 것처럼 궁색이다.
살포 든 모습은 비록하고(아랫물꼬)배미 몇 두락일망정 자신의 노력으로 토지를 장만하고 들었을 때 가장 보기 좋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살포자루 길이로 토지의 소유 규모와 생산의 우열성도 짐작할 수 있었다. 문전옥답을 섬지기로 짓는 노농의 살포자루는 길고, 뒷골 다랑논 몇 두락을 짓는 노농의 살포자루는 짧았다. 농경사회의 무슨 규약이 정한 바에 따라서 불가피하게 살포자루 길이를 맞춘 건 아니다.
자연히 그렇게 살포자루 길이의 차별화가 이루어졌다.
문전옥답 섬지기를 짓는 노농의 살포자루가 좀 길다고 해서 ‘논푼어치나 부친다고 꼴값을 떨어요’라고 질시할 건 아니다. 그게 보편적인 길이였다.
다만, 다랑논 몇 두락을 부치는 노농의 살포자루가 보편보다 짧았다는 게 옳은 견해다. ‘다랑논 부치는 주제에 살포자루는 되 길다’고 남들이 비웃을까 싶어서 일부러 살포자루를 짧게 메워 가지고 다닌 건 아니고, 어쩌면 농경사회에서 최선을 다한 삶의 결과에 대한 허심탄회한 승복이오, 분수를 아는 미덕이며, 따라서 ‘나는 아직 논 한 마지기라도 더 장만할 여지가 있어’ 하는 계속 분발 중에 있다는 의지를 표시일 수 있다.
두메에 가난한 경작 면적을 바라고 모여 사는 고만고만한 삶의 처지에 살포자루의 길이가 무슨 옥관자라도 단 것 같은 신분 표시랄 게 있으랴만, 그래도 살포자루가 길면 은근히 어깨에 힘이 실려서 상체를 쭉 펼 수 있었다. 그래서 농사꾼은 살포자루를 키워 보려고 젊어서 혈기를 집약적으로 경작지에 쏟아 부었다. 뒷골 다랑논에서 앞들 하고배미로, 앞들 하고배미에서 다시 문전옥답으로 가세를 키워 가는 데 따라서 살포자루의 길이도 길어졌다.
농사꾼의 살포자루가 남부끄럽지 않을 만큼 길어졌을 때, 이미 한 생애도 여한 없이 끝나고 육신은 다 턴 빈 참깨 조배기(단)처럼 가벼워졌지만 물꼬에 살포를 짚고 서면 당하관에서 당상관으로 올라선 것만치나 당당했던 것이다. 가솔을 건사하고 논 한 마지기라도 더 장만해 보려고 저돌적으로 살아온 한평생에서 미욱한 힘을 빼고 남은 선량한 사람의 무게, 그걸 우리는 원로라고 부르며 살포를 짚고 선 앞을 공손히 지나갔다.
“너도 말년에 살포 짚고 논둑에 서려거든 정신차리고 살아.”전에 우리 할머니가 한창 농번기에 읍내 출입이나 하시는 아버지에게 안타까이 하시던 말씀이다. 우리는 세전지물로 문전옥답 여남은 마지기를 부쳤는데 아버지가 농사에 힘쓸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할머니는 늘 안타까워하셨다. 있는 농토로 생계유지는 되었지만 할머니의 생각은 아버지가 논마지기라도 더 늘이고 말년에 살포 짚고 논둑에 서 있는 모습이 우뚝하기를 바라마지 않으신 것이다. 부모 마음이리라.
앞들 상고배미 스무 마지기는 함창 양반네 논이다. 소싯적 기근을 피해서 영남 함창에서 새재를 넘어 이 산골 윗버들미로 솔가(率家)를 해온 이래 한평생 맨손으로 장만한 통지다. 나도 장가들고 한 이태 농사를 지었다. 그때 살포를 짚고 노을진 물꼬에 서 있는 함창 양반을 본 기억이 지금도 뚜렷하다.
나는 그분의 모습에서 큰 영향을 받고 ‘나도 함창 양반 나이가 되면 여름날 저녁 산그늘 지는 물꼬에 살포를 짚고 서서 노을빛에 흠뻑 젖으며 들판처럼 저물어야지’ 하는 간절한 인생관을 다짐했었다. 옷은 세모시 중위적삼을 바라지 않았다. 깨끗이 빨아서 풀먹여 다림질한 무명 중위적삼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머리도 굳이 상투를 틀고 탕건을 쓸 생각은 없었다. 함창 양반처럼 삭발을 하리라고 마음먹었다.
함창 양반은 논농사를 지으면서 天災에는 도리가 없었지만 매년 삼배출을 거두었다. 그 양반 나름의 농사짓는 비결이 따로 있어서가 아니다. ‘남보다 한번 더’ 농사의 일반상식을 충실하게 실행했을 뿐이다. 논을 남보다 한번 더 갈아엎고, 갈을 남보다 한 짐 더 꺾어 넣고, 논을 한번 더 매서 논바닥을 걸구었다.
‘남보다 한번 더’ 말이 쉽지, 그 양반은 그 삶의 주관을 실행하기 위해서 소만(小滿), 망종(芒種) 무렵에는 달밤에 짚신을 벗지 않고 한숨씩 노루잠을 잤다고 한다. 밤낮이 따로 없는 삶, 농사란 참 정직하다. 술수와 묘수가 통하지 않는 일이다. 얼마나 더 흙의 생산성에 집착했느냐의 결과일 뿐이다. 살포자루의 길이는 그 논공행상이다. 누가 정해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긴 것도 짧은 것도 자기 마음에 납득이 가는 보편 타당한 길이로 정했다.
살포 들고 들머리에 서 있는 노농의 원로적 후광 역시 어느 분야에서 출세한 사람의 후광 못지 않게 빛난다. 인생의 후광은‘내실(內實)을 기한 그 사람의 각고(刻苦)의 생애’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살포를 허리에 가로지르고 허리를 쭉 펴고 들머리에 서 있는 함창 양반의 늙은 체신이 어찌 그리 커 보였을까. 백로(白露) 무렵 노란 벼이삭들이 논물 뗀 논둑을 베고 누운 논머리에 꼴막(고의춤)을 훌러덩 까 가지고 둥싯한 갈색 뱃구레를 드러낸 채 서 있던 그 양반의 모습은 꼭 논산들에 서 있는 은진미륵처럼 들판을 가득 채웠다. 그 크기는 육신의 크기가 아니라 생애의 크기였으리라.
말복 무렵, 말매미 소리가 폭포같이 쏟아지는 둥구나무 아래 농막앞을 지나가려면 난간에 기치 창검처럼 죽 늘어 세워져 있는 살포 때문에 막부(幕府)의 본영(本營)처럼 지나가기가 어려웠다. 취한 노농들의 기탄 없는 웃음소리가 열국을 평정한 장수들의 기개만큼이나 높이높이 한 시름을 넘긴 들판으로 퍼져 갔다.
그 시절 농경사회의 질서를 지켜주던 살포, 그 삶의 가치가 어디로 갔을까, 되찾아다 바깥사랑 시렁 위에 얹어 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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