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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균 수필 연재 - 만돌이, 부등가리 하나 주게

Joyfule 2011. 12. 7. 02:40

 

   

 

목성균 수필 연재 - 만돌이, 부등가리 하나 주게


지금은 다 산이 되었지만 강만돌 어른이 살아 계실 때는 윗버들미의 유지봉 넓은 산자락에는 따비밭들이 누덕누덕 널려 있었다. 가을걷이가 한창일 때는 사랑간에 한방 가득 장정들이 모여서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 달빛이 방문을 하얗게 적시면 “달 떴네” 하는 좌장(座長) 말에 놀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사랑 마당 가득한 지게에서 제 것을 찾아 지고 유지봉 따비밭으로 올라갔다. 아직 바심(타작)을 못하고 가려 놓은 채 있는 뉘 집 서슥(조) 더미를 울력으로 져 내리기 위해서다.


강만돌 어른네 따비밭의 서슥 더미를 헐어서 한 짐씩 짊어 놓고 앉아서 내려다보던 푸른 달빛이 어린 골짜기. 풀어 널은 명주자치처럼 달빛에 하얗게 바랜 냇물이며, 순산한 산모가 조용히 숨을 고르며 누워 있는 모습 같은 다랑논들의 평온한 휴면(休眠)이며, 저녁 설거지가 끝난 부뚜막에 엎어 놓은 크고 작은 바가지들처럼 유순한 곡선을 서로서로 기대고 있는 초가집들. 모다가 내 몸뚱이같이 편하고 애착이 가는 고향의 모습이다.


지금도 달빛이 파란 산비탈을 서슥을 한 짐씩 진 장정들이 일렬로 서서 “야- 호호호-”하고 숨가쁜 소리를 지르며 내려오던 광경이 눈에 선하다. 겨우 장정 반 만한 짐을 지고 무거워 그 신명나는 소리도 못 질러 보고 행렬 맨 뒤에 서서 비척거리며 따라오던 풋내기 농사꾼이던 내 생애의 한순간. 언제 그보다 더 최선을 다해 본 적이 있었던가, 언제 그보다 더 즐겁게 울력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그렇게 울력을 하고 밤참으로 국수나 수제비국에 막걸리를 한잔씩하고 다시 사랑간으로 돌아와서 놀다가 달이 척 기울어야 각자 집으로 돌아가든지 사랑간에 쓰러져서 등걸잠을 잤다.


풀숲이 된 유지봉 따비밭 발치마다의 정갈한 빈 자리, 따비밭을 부치다가 간 사람들의 무덤들이다. 그 무덤 자리는 생전의 그 어른들이 저물녘에 곰방대를 물고 하얗게 앉아서 어둠에 묻히던 바로 그 자리다. 명당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 어른들은 죽어서도 곰방대를 물고 앉아서 골짜기의 사시사철을 한눈에 볼 수 있어서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강만돌 어른도 따비밭 경작 시대의 에피소드 하나를 남기고 산이 된 그 어른들 밭머리에 조촐한 무덤으로 남았다.
“여보게 만돌이, 나 부등가리 하나 주게.”
강만돌 어른이 동네 사람들에게 남겨 주고 간, 살아서 옷처럼 걸치고 다니던 농담이다.


어느 해 늦가을, 강만돌 어른은 유지봉 그 따비밭에 망옷( ?? )을 냈는데 망옷 지게를 비탈진 따비밭 맨 위에 바쳐 놓고 옹기로 된 장군을 기울여 망옷을 귀대에 따르다가 지게를 넘어뜨렸다. 장군이 비탈진 따비밭을 굴러내렸다. 장군은 일단 밭고랑에서 멈추는 듯하다가 강만돌 어른이 잡으려고 밭고랑을 내려뛰면 고랑을 홀짝 넘어서 굴러 버렸다. 강만돌 어른은 걸음을 멈추고 “어이쿠, 내 장군”하고 낭패의 소리를 질렀다. 장군이 밭고랑에서 멈추는 듯하면 밭고랑을 내려뛰고, 장군이 다시 밭고랑을 넘어서 구르면 “어이쿠, 내 장군”하며 멈춰서고, 키가 껑충한 강만돌 어른이 구린내를 풍비박산하며 기우뚱기우뚱 구르는 장군을 따라서 따비밭 비탈을 황망히 내려뛰는 모습이 흡사 장승 보릿대 춤추는 것처럼 구경할 만했던 모양이다.


마침내 장군은 따비밭을 다 굴러서 밭 아래 돌무더기에 부딪치고 털썩 깨졌다. 그러자 강만돌 어른은 밭고랑에 털썩 주저앉으며 “어이쿠, 내 장군”하고 장탄식을 했다고 한다. 그 광경을 인근 따비밭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보고 박장대소를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사랑간에 모여서 강만돌 어른의 흉내를 내가며 여러 사람에게 무슨 큰 공지사항인 것처럼 그 사실을 알렸다. 서로 쥐어지르며 넘어지며 재미있어하는 와중에서 담담하게 “미친놈들-”했을 강만돌 어른의 과묵한 태도가 사랑간 사람들을 더욱 즐겁게 했으리라. 그 당시 장군 하나 값이 콩 한 말쯤 했을까? 그러나 긴긴 가을밤의 출출한 배를 채우듯 맛있게 웃음잔치를 벌여 준 강만돌 어른의 깨진 장군 값은 쌀 섬 값은 나가는 것이었다.


지금은 망옷 지게질 하는 사람이 없지만 옛날에는 망옷 지게를 지고 가는 사람을 보면 친구들이 그랬다.
“여보게, 거름 치고 올 때 나 부등가리 하나 주고 가게.”
그 말은 참말로 장군을 깨뜨려서 부등가리를 만들어 오라는 악의가 아니라 그 반대의 뜻이 담긴 선의의 농담으로 오히려 고달픈 농경시대의 삶을 울력처럼 나누어 가지는 농담이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듯 강만돌 어른은 죽어서 망옷 냄새 나는 이름을 남겨서 그 골짜기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진짜 구린내 나는 이름을 남기고 죽은 부패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권세를 이용해서 현대적으로 토색질을 한 정상배(政商輩)들과 그 권세에 돈을 바치고 이권을 사는 모리배(謀利輩)들이 그들이다. 그들도 이름을 남기고 죽었는데 진똥 구린내가 나는 이름이다. 거기 비하면 따비밭을 부치다 죽은 강만돌 어른의 실수가 풍긴 구린내는 참 향토적인 구수한 냄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