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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균 수필 연재 - 얼음새 꽃

Joyfule 2012. 1. 17. 03:51

    

 

목성균 수필 연재 -  얼음새 꽃


연풍 산악회에서 시산제(始山祭)를 겸한 조령산 등반을 했다. 음력 3월 초순, 산 아래는 봄기운이 완연한데 1000미터가 넘는 산정에는 군데군데 잔설이 하얗다. 우리는 조령산 꼭대기에 준비해 온 돼지머리를 진설하고 제를 지냈다. 그리고 양지쪽으로 옮아앉아서 점심 도시락을 펼쳐 들었을 때, 누군가 감동적인 소리를 질렀다.
“이 꽃 좀 봐-!”
모두 꽃으로 모였다. 잔설이 미처 다 녹지도 않은 언 땅을 떠밀고 청초하기 이를 대 없는 노란 꽃 두 송이가 피어 있었다. 무슨 꽃일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산악회장인 우리의 고향 지킴이 안 교장도 모르는데 대개 산읍의 농사꾼 아니면 장사꾼인 산악회원들이 알 리가 없다.
꽃도 모르면서 꽃이 핀 경위에 대해서는 아는 체들을 했다. 누구는 사랑하던 빨치산 남녀의 고혼이라 했고, 누구는 전사한 880부대 소년병의 넋이라고 했다. 그리 보니 그럴 듯 했다.
그런데 문득 나는 미치갱(광)이 박중사와 그 아내 생각이 났다. 


이화령을 수비하던 880부대는 정전(停戰) 다음 해에 해체되었는데 이북이 고향인 외로운 젊은 군인 한 사람이 산읍의 미친 여자에게 마음을 뺐기고 주둔지에 홀로 떨어졌다. 그를 가리켜 사람들이 ‘마치갱이 박중사’라고 불렀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눈이 오고 개인 겨울 날 저녁 때였다. 저녁바람에 문풍지가 비파소리를 내는데 밖에서 “영감마님-.”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젊은 남녀가 뜰락 아래 손을 꼭 잡고 서 있었다. 남자는 발에 끌리는 군용 오버를 입었는데 새끼로 오버 자락을 여며서 동여맸다. 체신이 작은 사람이 오버 속에, 놀란 달팽이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철 적은 노랑 반회장 겹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은 앳된 여자가 보채는 어린애처럼 딸려 있었다. 옷은 땟국이 흐를 지경이었고, 역시 땟국에 절은 명 자치로 머리에서 귀때기를 폭 싸맸다. 얼굴에 백회를 뒤집어쓴 것처럼 분을 바르고, 입술에는 새빨갛게 연지를 칠했다. 눈동자는 풀려 있고 침을 흘리듯 웃음을 질질 흘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톰한 입술과 오뚝한 코가 참 예뻤다. 남자의 눈은 맑고 초점이 잡혀 있었다. 전혀 미친 기색이 아니었다. 그들이 미치갱이 박중사와 그의 아내였다.
박중사는 왜 ‘미치광이 풋나물 캐듯’ 살았을까. 미친 여자를 사랑하기 위한 수단이었을까, 도리였을까.


“영감마님-. 성냥만 그어 대면 불이 확 붙는 장작이 있는데 가져올 갑쇼?”
박중사는 나를 무시한 채 건넌방에다 대고 소릴 질렀다. 마침 퇴근해서 집에 계시던 아버지가 건넌방 미닫이문을 벌컥 열고 마루로 나오셨다.
“영감마님은 무신 영감마님-, 사람 희롱하는 겨-.”
아버지는 영감마님이란 경칭이 듣기 싫으셨든지 소릴 벌컥 지르셨다.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지금이야 연풍이 일 개 면에 지나지 않지만, 옛날에는 현(縣) 아니었습니까. 현감이면 외직 종육품 벼슬이지요. 사또십니다. 당연히 영감마님이시죠.”
“허-, 사람 유식하긴, 알아야 면장을 한다더니 자네를 두고 하는 말인가베, 자네가 무식한 내 대신 면장 하게 ---.”
아버지는 못마땅하신 건지, 싫지 않으신 건지 무뚝뚝하게 농을 건네셨다. 그리고 장작을 가져오라고 허락하셨다. 박중사는 펄쩍 뛸 듯 반색을 하며 뜰 위로 성큼 올라서서 아버지에게 장작 값을 달라고 손을 벌렸다. 아버지는 장작도 안 가져오고 선돈을 달라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나무라셨다.
“우선 좁쌀이라도 한 되팔아서 내자에게 조당수(묽은 좁쌀 죽)라도 뜨겁게 끓여 먹여야겠습니다. 내자가 홀몸이 아닙니다. 날이 추워서 자칫하면 큰일납니다.”
큰일나도 자기 큰일일 터인데 마치 우리 아버지의 큰일 인 것처럼 위협했다. 그러고 보니 여자의 몸이 깍짓동 같은 것은 옷을 많이 껴입어서 만이 안이고 배가 부른 것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또께서 이 백성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시고 선처를 해주십시오. 장작은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박중사는 꿋꿋하게 아버지를 설득했다. 아버지는 설득 당하신 건지, 아니면 면장으로서 면민의 딱한 사정을 모른 체 할 수 없으셨든지 돈을 주려고 장작 값을 물으셨다. 박중사가 부른 장작 값은 과금이었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무슨 장작 값이 그리 비싸냐고 화를 내셨다. 박중사는 성냥만 그어 대면 불이 확 붙는 마른 장작이라는 것과 한 짐이란 여느 한 짐이 아니고 지게 뿔 위에 한 자는 실이 올라가는 한 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아버지는 박중사 말을 곧이들으시는 눈치는 아니었으나 마지못해 장작 값은 주셨다. 박중사는 장작 값을 받아 들자 아내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 안고 삼동의 모색 속으로 사라졌다.


그 날 초저녁에 쿵하고 장작 배기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그 소리를 듣고 나가시더니 쥐어박는 소리를 지르셨다.
“이게 무슨 성냥만 그어 대면 불이 붙는 장작이여, 생 장작이지-. 그리고 무슨 지게 뿔 위로 한자나 올라가는 한 짐이여 반 짐밖에 안되겠구먼-.”
박중사는 어머니의 역정소리를 못들은 척 묵묵히 장작을 부엌으로 들이고, 아궁이에 장작을 한 아름을 집혀 놓고 돌아갔다. 아버지는 내다보지도 않으셨다. 다음 날 새벽에 아궁이에 불쏘시개를 한줌 놓고 성냥을 그어 대니까 장작에 불이 확 붙었다. 단 아궁이에서 밤 새 생 장작이 바짝 마른 것이다. 성냥만 그어 대면 불이 확 붙는 마른 장작이란 박중사의 말은 거짓말이 아닌 셈이었다.


겨울 방학도 다 끝나 가는 어느 날 윗버들미 할머니께 공부하러 간다고 인사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은고개를 넘어서자 남향받이 골짜기에 아지랑이가 아른아른했다. 아직 겨울인데 어느새 양지쪽으로 봄의 척후가 낮은 포복으로 숨어들고 있었다.
“현감님 댁 도령 아니신가. 어디를 다녀오시나?”
양지쪽 다랑논 논둑 아래 박중사 내외가 꼭 끌어안고 앉아 있었다. 마치 동물원에서 본 원숭이 한 쌍이 꼭 끌어안고 털 고르기를 하는 모습처럼 사랑의 진면목(眞面目)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날 박중사 아내의 얼굴은 수컷 원숭이에게 안겨서 털 고르기를 받는 암컷 원숭이처럼 다소곳할 뿐 실성한 티는 볼 수 없었다. 역시 노란 반회장 겹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나는 지금껏 그렇게 다감한 자세로 여자를 안은 모습을 어느 명화의 애정 scene에서도 본 기억이 없다.
그들 옆에는 생 등걸나무를 짊어 놓은 지게가 바쳐져 있었다. 또 장터 뉘 댁에 성냥만 그어 대면 불이 확 붙는 장작이라는 거짓말로 팔아먹을 생나무를 해 가지고 오는 길인 모양이었다.
그가 반가웠다.
“안녕하세요. 할머니께 인사 다녀오는 길입니다.”
민선면장(民選面長)인 아버지의 무식을 압도하던 유식(有識)과 양지바른 논둑 아래서 다감하게 여자를 안고 있는 거리낌없는 순정적(純情的)인 모습에 울컥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성의껏 인사를 했다.
내 인사를 받고 그가 덕담 한 말씀을 건네주었다.
“공부 열심히 하게-. 이런 시 아시나? ‘少年易老 學難成하니, 一寸光陰 不可輕하라. 未覺池塘 春草夢인데, 階前梧葉이 已秋聲하느니라’ 했어. 무슨 소리인고 하니, 소년이 늙기는 쉽고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다는 말이야-. 그러니 반짝하는 순간이라도 헛되이 보내지 말아. 인생이란 연못가의 봄 풀이 미처 봄꿈이 깨기도 전에 계단 앞 오동나무 이파리가 가을 소리를 내는 것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거야-.”
박중사는 두 팔로 감싸안은 아내의 어깨를 장단 치듯 토닥거리며 내게 주자(朱子)의 시를 읊어 주었다. 내 모교인 연풍중학교 늙으신 국어선생님께서 우리가 공부를 등한히 할 때, 속이 상하시면 칠판에 휘갈겨 써 놓으시고 훈육(訓育)을 하시던 시였다.


박중사의 맑고 선한 눈매 때문일까. 유식 때문일까. 나는 지금도 그가 이북 어느 반가(班家)의 유복한 도령님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킨 우리의 역사가 더욱 혐오스럽다.
나는 어머니께 미치광이 박 중사가 나무를 해 오면 아뭇소리 말고 팔아 주라고 간곡히 당부를 하고 집을 떠났다. 왜 그런지 그의 장작을 팔아 주는 게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자는 사람의 도리만 같았다. 사십 육칠 년 전, 궁핍하고 고단한 전후의 겨울이었다.


여름 방학을 해서 집에 와 보니 박중사는 연풍 장터에 없었다. 그 해 봄 그의 아내가 해산을 하다가 난산으로 산모와 아기가 다 죽고 박중사가 정말로 미치광이처럼 장 고샅으로, 들녘으로 헤매 다니더니 홀연히 사라졌다고 했다. 산읍 사람들은 미친 그의 아내가 가엾은 박중사를 편한 곳으로 데려갔다고들 했다.
나도 그가 어디로 갔는지를 몰라서 가끔가끔 안타까워했었다. 어디서 미친 척 거짓말로 세상을 희롱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사람들 말마따나 미친 그의 아내를 따라서 사바를 건너 피안(彼岸)으로 갔을까---.
“이 꽃은 미치갱이 박 중사와 그의 마누라여-.”
그 날 내가 그리 말했더니 모두 동감이라는 듯 아무 말이 없었다.
꽃이 핀 자리에서는 봄이 오는 남한강과 소백산맥의 연봉들이 한눈에 내다보였다. 변함 없이 아름다운 강토(疆土)의 부감전경(俯瞰全景), 박중사가 빨치산을 추적하다 앉아서 시대의 아픔을 생각하던 자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꽃은 야생화도감(野生花圖鑑)에서 찾아보니까 얼음새꽃(복수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