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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균 수필 연재 - 故鄕雪

Joyfule 2012. 1. 14. 06:09

 

 

    

 

 

목성균 수필 연재 - 故鄕雪


오랜만에 고향에 갔더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눈이 내린다.
마당에 창문의 불빛을 받고 눈이 裸婦처럼 희고 탐스러운 윤기로 부피를 더해 간다. 어두운 골짜기를 가득 메우며, 형광 빛을 발하는 주먹 같은 눈송이가 펑펑 쏟아진다.
안타까운 세월이 눈발 속에 아른아른 한다.
횃불에 ‘치-직, 치-직---’ 소릴 내며 떨어져 녹던 눈송이. 동네를 돌면서 새로 해 이은 지붕 추녀의 이엉 마름 밑을 뒤져서 참새를 움켜 내던 기쁨, 손에 잡힌 따뜻한 생명의 체온과 부드러운 새털의 감촉, 손아귀를 벗어나려는 조그만 생명의 꿈틀거림, 그 참새의 목숨을 무슨 전리품(戰利品)인양 새끼줄에 엮어 어깨에 걸고 다녔다. 왠 참새는 그리도 많고, 왠 눈은 또 그렇게 내리는지---.


그 때 죽마고우들은 잠들지 못하고 밤 깊도록 고샅을 돌았다. 고샅을 돌면 들을 수 있던 그 시절의 소리들과 보지 않아도 본 거나 진배없던 모습들-. 현상액 속에서 살아나는 포지티브처럼 점점 선명해져서 아쉽고 그리운 소리의 모습을 들어낸다.
뉘 집 안방에서는 심청전 읽는 젊은 새댁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방안에는 동네 시조모님들이 다 모여 앉아 있고 방 가운데는 갓 시집 온 목청 좋은 새댁들이 불려 와서 교대로 이야기책을 읽는 것이다. 그 집은 그 날 묵을 끓였든지, 두부를 했든지, 무시루떡을 했을 것이다. 재 넘어서 안사돈이라도 다니러 오신 게 분명하다. 새댁들은 그 밤 잘못하면 새워야 한다. 집에서 새신랑이 잠 못 이루고 기다릴 생각에 새댁들은 안달이 나지만 그 점을 고려할 시조모님들이 아니다. 바야흐로 심청이는 인당수에 몸을 던지고 동네 시조모님들은 한숨과 눈물이 낭자하다. 새댁들의 안타까운 밤은 그렇게 속절없이 깊어 갔다.


어느 고샅에서는 배고파 칭얼대는 어린 것 보채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부스럭거리면서 돌아눕는 풍만한 어미의 무거운 몸짓소리, 박통 같이 불은 젖을 물고 옹아리치는 간난쟁이 소리가 눈송이처럼 새록새록 떨어진다.
어느 고샅에서는 바깥사랑의 자지러지는 해소 기침 소리가 들렸다. 응달진 저문 산기슭의 사초를 한 번 했으면 싶은 조촐한 봉분한 기가 문득 떠오르는 해소기침 소리가---.
추억에 잠겨 있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영진이었다. 몇 안 되는 고향 친구들이 영진네 사랑에 모였다고 ‘고스톱’을 하러 오라는 것이다. 굴피처럼 굳어서 찌그러진 감성(感性)도 눈앞에서는 견뎌 낼 재간이 없는 모양이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한 걸음에 달려갔다. 남수, 기억이, 영진이, 병천이, 일식이 등 소년시절 참새를 움키러 다니던 죽마고우들이다. 참 소중한 사람들이다. 우후죽순처럼 고샅이 가득하게 자라던 그 많은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가고 이 뿐일까?


동네에서 사랑방을 쓰는 집은 영진네 밖에 없다. 친구들은 가끔 이 방에 모여 구판장에서 막소주를 사다 마셔 가며 ‘점 백 고 스톱’이란 화투 놀이를 하는 모양이다. 사랑을 쓰는 영진 이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점 백 고 스톱’도 끗발이 나지 않으면 하루 저녁에 일이 만원 돈을 잃기도 하지만 하루 저녁을 재미있게 논 값으로는 과히 비싼 건 아니다. 죽마고우가 어릴 때처럼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아옹다옹하는 재미는 충분히 일이 만원 어치는 된다.
“이놈아, 너 독 썼어 네가 풍 띠를 내서 영진 이가 청단을 했잖아.”
“그럼 어떡해? 매조 열을 주면 기억 이가 5점 짜리 고도리를 하는데, 3점 짜리 청단을 줘야지-.”
“그래도 건네주어야 하는 거여, 바로 주면 ‘고 스톱’ 법칙에 안 맞잖아!”
“건네주긴 5점하고 3점하고 돈이 200원 차인데 약한걸 줘야지, 무슨 소리야.”
잘못하면 판이 깨질 수도 있다.
“더러워서 나 안 해. 내 손에 든 거 내 맘대로 내는데 네 놈이 왜 곶감 놓아라 대추 놓아라 지랄이여-.”
얼굴이 벌개 가지고 누가 일어나면 판은 깨지는데, 그 모습이 보기 좋은 것은 아직도 훼손되지 않은 순박성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래 알았어, 그만둬. ‘고 스톱’의 이치가 그렇다 이거지. ‘고 스톱’법칙 이 어디 국회에서 정한 거여, 우리가 고치면 될 거 아녀-. 자, 앉아. 앉아.”
그러면 또 주저앉는다. 나이는 육십 대에든 주제에 애들처럼 씩씩거리고 싸운다. 얼마나 단순한 사람들인가! 이제 좀 간교하고, 의젓하게 팔색조처럼 제 모습을 위장할 줄도 알 때가 되었건만 늘 솔직할 줄 밖에 모른다.
한참 ‘고 스톱’ 법칙에 어긋났느니 안 났느니 하고 옥신각신할 때 길가로 난 방문 앞에서 “아버님 -, 아버님 -.” 하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문을 열고 보니, 20대 젊은 여자가 쟁반에 냄비와 소주병을 놓아서 들고 왔다. 그녀 머리 위로 탐스러운 눈송이가 나려 앉고 있었다.


충주에 나가 사는 남수의 두 째 아들 희택이 댁이었다. 마침 주말이라 집에 다니러 왔다가 시아버지가 놀고 있는 사랑간에 모르는 척 있을 수가 없어서 밤참을 해 온 모양이다.
“아버님, 찌개 좀 끓여 왔어요.”
나는 신세대 새댁의 마음씨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물론 옛날에도 명절 밑이나 뉘 집 제사 때는 두부찌개에 막걸리를 가져오는 일이 있었지만, 어둑하던 옛날 이야기일 뿐 지금은 그런 인심은 고향동네에서도 사라진지 오래다. 찌개 한 냄비 소주 몇 병 따지면 하찮은 거다. 그러나 서로 삶을 옹호(擁護)하면서, 서로를 배려하면서 살던 삶이 재편성되는 지금, 그 것은 마지막 미덕일지 모른다.


경제구조가 바뀌면 사회구조도 변하고 따라서 삶의 가치도 변한다. 다랑논과 비알밭을 붙이며 백 이십여 호가 넘게 모여 살던 고향은 이제 육십여 호에 불과하다. 따라서 다랑논과 비알밭은 붙이지 않는다. 이제는 서로 삶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삶을 존중한다. 옹호는 뜨겁고 구린내 나는 입김을 푹푹 내뿜으며 서로를 꼭 끌어안는 것인데 비해서 존중하는 것은 원소(元素)의 유기적인 결합과 같은 무미한 질서일 뿐이다. 당연히 끈끈한 삶의 유대감, 즉 인심이 예전 같지 않음은 물론이다.


세계에서 제일 부국인 미국의 국민 행복도(幸福度)는 세계 46위인 반면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인 방글라데시의 국민 행복도는 세계 1위라고 한다. 빈부의 차이와 행복의 차이는 역비례 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소득의 향상만큼 행복할 이유는 감소된다고 볼 수 있다.
“그래, 거기 놓고 가거라.”
“네 아버님, 식기 전에 드세요.”
희택이 댁은 조용히 웃고 돌아갔다.
나는 희택이 댁이 다녀간 다음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고향설(故鄕雪)이 보고 싶었다. 눈은 한결 같이 내린다. 적설(積雪) 위에 방금 찍고 간 가지런한 발자국이 선연(嬋娟)하다. 희택이 댁 발자국이다. 새댁의 맨발 발자국 같은 사랑스러운 발자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