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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균 수필 연재 - 장마전선을 넘어

Joyfule 2011. 12. 22. 13:30

 

 

   

 

목성균 수필 연재 - 장마전선을 넘어


1. 이름 모를 포구
“오늘 동해남부 지방에는 50에서 80밀리 정도의 비가 내리겠습니다.”
“장마전선을 통과해야 되겠네요.”
아내가 여로를 우려했다.
일기예보에 차질 없이 비가 내린다. 김동완 통보관의 회심의 미소가 보이는 것 같다.
장기곶 반도를 돌아가는 굴곡 심한 912번 해안도로를 따라 길을 떠났다.
아직도 가로등이 켜져 있는 어느 이름 모를 포구에 잠시 차를 세웠다. 비 오는 새벽 바다의 고즈넉한 정취를 느껴보기 위해서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으니까 따뜻한 커피를 한잔 준다. 단돈 300원으로 인정을 대접받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자동화된 인간성의 대행이 불친절보다 훨씬 낫다.
집들이 바다를 향해서 혈맥처럼 고샅을 내고 세포 분열하듯 다닥다닥 붙어 있다. 어촌의 모습이 좀 무질서해 보이지만, 그래서 더 다감해 보이는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취락구조다. 신작로 옆에 있는 집들은 모두 유리문을 크게 달고 ‘무슨 가든, 무슨 횟집’ 이라고 썬팅을 했다. 이 전형의 변형이 시류(時流)를 따르는 소박한 어촌 아낙네가 립스틱을 진하게 바르고 저잣거리에 나앉아 있는 것 같아서 보기 좀 딱하다.
수조에는 도다리, 놀래미, 우럭, 광어, 오징어 등 활어들이 헤엄을 치고 있다. 오늘 낮에는 활어의 안락사에 유념할 리 없는 시골 주방장의 서투른 회칼에 저며져서 비 오는 바다 정취에 취하러 오는 길손의 미각에 오를 생명들. 생명이 생명의 선도를 음미하는 냉혹한 미각은 인간의 원초적 야성에서 비롯한 것일까.
비 오는 새벽 포구의 고즈넉함이 아득히 먼 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주지(主旨)시켜 준다. 홀가분한 고적이 한껏 자유롭다. 오만해도 무방한 이 자유를 얻으려고 나는 비 오는 먼 이 낯선 새벽 포구까지 표류해 온 것이다.

 

 

2. 대보항
장기곶 반도의 북단에 위치한 제법 큰 포구다. 포구의 한쪽 공터는 조선소다. 골조를 다 짜맞춰 가고 있는 작은 어선의 대패질을 한 하얀 나뭇결이 비에 젖고 있다. 비 맞은 나부(裸婦)의 처녀성 같아서 애처롭다. 동해의 거친 물결에 시달려야 할 배의 운명이 보이는 듯하다. 포구 앞에 담을 치듯 방파제가 바다를 가로막고 있다. 배가 드나드는 어귀가 흡사 시골집의 삽짝처럼 열려 있고, 삽짝의 기둥처럼 방파제 양끝에 등대에 흰 것, 빨간 것, 각각 하나씩 서 있다. 안마당처럼 아늑한 포구 안에 어선이 하나 가득 성난 바다를 피해 있다. 그 풍경이 내 마음을 저문 날 내 집 삽짝 안에 들 때 같은 안도감을 안겨준다.
비 오는 새벽 포구의 풍경을 담아 가기 위해서 필름을 한 통 사려고 했으나 문을 열어 놓은 전방이 없었다. 아무리 비 오는 새벽이라지만 너무 게으름을 떤다. 학생들만 등교를 하려고 시내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우산 아래서 허릴 구부리고 있는 여학생의 쪽 곧은 뽀얀 종아리에 빗물이 튄다.
“학생, 어느 학교 다니지?”
“포항여고예.”
“예쁜 종아리에 빗물이 튀어서 어떡해.”
수줍어 고개를 숙인다. 아무 의미도 없는 질문을 해서 공연히 소녀를 당황케 한다. 소년처럼 즐겁다.

 

 

3. 장기곶
뭍의 발기가 결연한 의지로 바다 깊이 삽입되어 있는 곳이 곶(串)이다. 바다는 궁합이 안 맞는 여편네처럼 곶 끝에서 응얼거린다. 곶은 개의치 않고 정정당당하게 바다의 한 녘을 굳건히 장악하고 있다. 아! 수컷다운 기상. 나는 비 오는 곶 끝에 서서 사내의 사기를 진작시켜 본다.
아득하게 우연(雨煙)이 수평선을 가로막고 뿌옇게 흐려 있다. 맑은 날의 거침없는 호형(弧形) 수평선은 참담하게 나의 각성을 촉구하는 데 비해서 비 오는 날의 수평선은 쓰고 따뜻한 탕제 같은 내 마음을 아늑하게 해준다.
곶 끝에 서 있는 하얀 장기곶 등대가 비 오는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일관되게 늙은 흰 정복 차림의 항해사처럼 당당하다. 그가 내게 뚜벅뚜벅 걸어와서 솥뚜껑같이 넓적한 손을 어깨에 턱 얹어주며 ‘삶이란 게 관점에 따라 다를 뿐, 다 그렇고 그런 거요’ 할 것만 같아서 가슴을 두근거렸다.
곶의 안쪽이 만(灣)이고, 포구는 만 안에 있다. 곶이 만을 감싸고 포구는 남편 잘 만난 아낙네처럼 얌전하게 만의 품에 폭 안겨 비 맞고 몸부림치는 곶 끝의 으르렁거림에도 불구하고 혼곤(昏困)하게 잠이 들어 있다.

 

 

4. 구룡포
오징어잡이 채낚기 어선이 역시 부두에 가득하게 접안하고 있다. 덕장에 오징어를 매달고 있는 것처럼 집어등을 배에 가득 매달고 있다. 더 세차진 빗줄기가 집어등을 깨끗이 씻어내고 있다. 한때 고래잡이 어업의 전진 기지였던 포구, 지분(脂粉)을 자포자기하게 바른 색시들이 풋사랑을 팔던 파시(波市)의 비릿한 지분 냄새를 줄기찬 빗줄기가 씻어내고 있다.
을씨년스러운 부두의 한 녘에 노란 금싸라기 참외를 가득 실은 타이탄 트럭이 한 대 서 있다. 역시 노란 비옷을 입은 사내가 차 위에서 소리를 지른다.
“네 개 천원, 꿀참외가 네 개에 천 원입니더.”
이 우중에 참외가 팔릴까? 저 사내는 왜 확신 없는 짓을 할까. 삶이란 원래 확신 없는 최선일까. 빗소리에 지워지는 사내의 소리가 공허하다. 아무튼 이른봄 들녘의 유채꽃 한 무더기처럼 노란 참외가 을씨년스러운 부두의 한 모퉁이를 빛내고 있다.
배가 고프다. 문을 연 식당이 없다. 배가 뜨지 않는 비 오는 포구에서의 아침 식사는 가망이 없다는 새로운 여행 상식을 배웠다.

 

 

5. 31번 국도에서
잠정적으로 비가 멎었다. 완전히 개인 것은 아니고 다만 장마전선의 대치상태가 소악국면을 맞은 것일 뿐이다.
바다에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 안개는 바다로부터 수군(水軍)들이 인해전술로 상륙작전을 전개하듯 해안을 덮친다. 해안의 해송(海松)들을 제압한 안개가 산기슭을 타고 올라와서 등성이의 해송까지 포로로 잡는다. 안개와 대치한 햇살의 주저항선인 산등성이에는 철갑을 두른 듯한 노송들이 장군과 그 막료들처럼 의연하게 서서 안개의 포로가 되고 있다.
임진년에 왜군들이 저렇게 파죽지세(破竹之勢)로 해안에 상륙했을까! 바다는 안개 뒤에 숨어서 모습은 보이지 않는 채 소리만 질러 수군을 독전(督戰)한다. 뇌격(雷擊)을 당한 선체의 찢어진 격벽(隔璧)으로 바닷물이 쏟아지듯 햇살이 구름 틈새로 갈래갈래 쏟아진다. 마침내 전세는 판가름나고 해안은 평정을 찾아간다.

 

바다는 왜 불필요한 기세로 분발(奮發)하는가! 작살 맞은 고래의 검은 등허리처럼 요동치는 파구(波丘)가 햇살을 하얗게 부숴 놓는다.
암초 위에 갈매기가 소복하게 앉아서 날개를 쉬고 있다. 암초에다 갈매기들은 배설을 할 것이다. 저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파도가 씻어 놓은 깨끗한 암초에 배설을 하는 갈매기는 얼마나 상쾌할까. 나도 그래 보고 싶다. 그러면 만성 위염증세가 뚝 떨어질 것 같다.
파구에 몸을 내던지는 갈매기의 눈부신 자맥질을 보았다. 다른 갈매기들이 암초에 앉아서 편히 쉬고 있을 때 홀로 거친 바다를 향해서 자맥질을 하는 것은 비단 먹이를 포획하기 위한 짓은 아닐 것이다. 모든 갈매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먹는 일이고, 그래서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갈매기 ‘조나단’은 먹는 일보다 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난다는 것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파닥이며 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정도의 일이라면 모기도 할 수 있어!” 이와 같은 조나단의 초월의지에 대해서 그의 선배 늙은 갈매기 ‘치앙’은 이렇게 말했다.
“완전한 스피드로 나는 것은 수천 킬로미터로 나는 것도, 또는 빛의 속도로 나는 것도 아니야, 왜냐하면 아무리 숫자가 커져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야. 하지만 완전한 것은 한계가 없지, 완전한 스피드란 곧 거기 있다는 거야.”
나는 조나단을 보면서 좌절감을 삭인다. 끝없는 도전은 그 자리에 머무는 경지일지 모른다. 통(通)해서 성불(成佛)이 되는 경지 같은-. 삶의 경지는 무엇일까? 비 오는 텅 빈 포구에서 ‘금싸라기’ 참외를 파는 것일까.
암초에서 편안히 쉬고 있는 무리를 떠나서 미처 진정되지 않은 폭풍 속을 활공하는 한 마리의 갈매기가 침체된 내 생의 한복판으로 내리꽂힌다.

 

분을 삭여 가는 바다가 격정의 대사가 끝난 셰익스피어의 무대처럼 내 가슴에 깊은 감동을 안겨 준다.
광어회가 먹고 싶어졌다. 동해안으로 침투했다가 좌초된 북괴 잠수함의 유일한 생존 간첩이 생포되었을 때 광어회가 먹고 싶다고 했다. 체념한 마음은 담백한 것일까. 담백한 공복에는 담백한 광어 살코기가 제격인지 모른다.
나는 성난 바다 앞에 서서 진취적이지 못했던 삶의 노폐물을 훌훌 털고 생의 이쯤에서 체념을 한다. 그러니까 생포된 무장간첩처럼 광어회가 먹고 싶어졌다. 수조 안에서 광어가 가난한 여행자의 염낭을 풀라고 부추긴다.
“우리 광어회 먹을까?”
“무슨 일 났어요, 왜 객쩍게 낭비를 해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고 도로변 기사식당에서 된장백반이나 먹어요.”
사실 국도변 기사식당의 된장찌개 백반은 먹을 만하다. 아내는 그 점에 착안한 말이지 가당찮은 내 담백한 식욕을 윽박지르기 위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아내의 여행 상식이 가난한 여행자의 동반자답다. 동반자의 모자람을 채워 준 우리의 동반이 오늘은 여기쯤 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조금 더 가서 기사식당의 때묻은 식탁에 마주앉았다.
때묻은 식탁에 아내와 마주앉아서 먹는 된장찌개의 보편적인 맛에 문득 집 생각이 났다.
창 너머로 보이는 수평선에 또 우연이 묻어 들어온다.
저기압에 가라앉는 된장찌개 냄새가 나를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지게 했다.
우리 집은 장마전선 너머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