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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균 수필 연재 - 희권이의 실내화

Joyfule 2011. 12. 20. 12:11

 

   

 

목성균 수필 연재 - 희권이의 실내화


눈을 뜨니 머리맡 문갑 위에 오이씨 같은 실내화 한 켤레가 새벽 빛 속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희권이는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어제 아침에 저 실내화를 신고 ‘두리 미술학원’ 문을 들어서며 울음 끝이 아직 남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다섯 살짜리 희권이의 하얀 얼굴이 되살아나서 나는 가만히 실내화를 만져 보았다.

 

희권이는 지금 외갓집에 와 있다. 제 어미가 몸을 풀어 가지고 친정에 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의 집 근처에 있는 학원에 외할아버지인 내가 차로 데려다 준다. 저의 집에서 제 어미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것만큼 즐겁지 않은 모양이다. 아침마다 제 어미와 내가 칙사 모시듯 해야 겨우 나를 따라나섰다.

학원엘 무엇 하러 가야 하는지 까닭을 모르는 어린것을 억지 춘향으로 학원에 끌고 가는 악역(惡役)을 아침마다 해야 하는 게 나를 우울하게 했다. 제 어미는 물론 나보다 더할 것이다. 나는 학원에 자주적으로 가지 못하는 희권이가 싹수없이 보여서 속이 상했다. 허긴 갓난아기 옆에만 누워 있는 제 어미를 보는 다섯 살짜리의 소외감이 얼마나 큰지 알지도 못하면서 어린것에게 싹수있는 모습만 기대하는 어른의 가당찮은 것인지도 모른다.
희권이는 특히 학원 이웃에 있는 도장에 태권도를 하러 가는 수요일 날은 결사적으로 학원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 이유는 태권도 선생님이 김치를 열 번도 더 먹은 사람이라 무섭다는 것이다.

 

희권이는 김치를 안 먹는다. 그래서 제 어미가 김치를 먹어야 할 힘이 세진다고 꾀었다. 그래도 김치는 먹지 않는다. 그러면 먹이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제 어미는 애 입맛을 어려서부터 소박하게 길들여 놓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인지 한끼에 한번이라도 억지로 김치를 먹이다. 마침내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어린것은 비상 먹듯 김치를 먹는다. 그럴 때 보면 희권 어미가 조련사 같다. 그래서 희권이는 먹기 힘든 김치를 잘 먹을 수 있는 사람은 힘이 세고 무섭다는 생각이 머리에 박힌 것인지 모른다. 희권 어미는 김치를 잘 먹는 사람을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쇠꼬치 먹는 불가사리처럼 공포의 대상으로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희권이의 태권도 선생님을 보지는 않았지만, 어린이를 강하고 씩씩하게 만든답시고 무서운 얼굴로 소리를 꽥꽥 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권도 선생님의 기합소리 한번에 남달리 마음이 여린 희권이는 주눅이 들었을 게 분명하다. 태권도 선생님은 그런 희권이를 특별 지도했을 것으로 생각이 드는데, 곰살궂게 달래가면서 가르치지 않고 제 어미가 김치 먹이듯 우격다짐으로 가르쳤을 것 같다. 태권도 선생님이 무서워서 팔다리를 마음대로 움직여 보지도 못하고 울먹였을 아이를 생각하면 나는 선병질적인 성미가 발끈하는 것이다.

 

어제 아침, 제 어미가 헝겊으로 된 하얀 실내화를 신기자 희권이는 태권도장에 가는 날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신발을 신지 않으려고 버텼다. 제 어미가 아무리 꾀어도, 눈을 부라리며 윽박질러도 소용없었다.
“안 가. 태권도장 안 가. 김치 열 번 먹은 선생님 무서워 안 가” 하고 겁에 질려 우는 것이었다.
“얘야, 태권도장 가는 날은 희권이 어미는 내게 눈을 하얗게 흘겼다.
“애가 커서 저 좋은 것만 하고 세상을 살 수 있어요?”
애를 야단치는 건지 나를 야단치는 건지 몰라서 우두커니 서 있는데, 희권이는 내 역성을 청하는 듯 눈물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나 태권도장 안 갈래.”
차라리 그럴 수만 있다면 흥부 돈 받고 매 맞으러 가는 것처럼 내가 대신 가고 싶었다. 그러나 희권이의 인생은 희권이의 몫일 뿐이다. 아무리 어려도 누가 대신 해줄 수는 없다. 바야흐로 희권이의 인생도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엄마 말 아 들으면 엄마는 아기만 데리고 집에 갈 거야. 넌 외갓집에서 할아버지하고 살아.”
그러자 희권이는 대성통곡을 하면서 제 어미한테 매달리며 악을 썼다.
“엄마 나도 데리고 가-.”
“안 돼. 태권도장도 못 가는 바보 희권이, 엄만 싫어! 엄만 아기하고만 같이 살 거야.”
희권이 엄마는 매정하게 돌아섰다. 애한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그랬겠지만, 희권이는 당황해서 돌아서는 제 어미 앞을 가로막고 매달리며 원자폭탄 맞은 일본 천황처럼 무조건 항복을 했다.
“엄마, 나 태권도장 갈게.”

 

그런 소동을 치르고 희권이는 나와 같이 ‘두리 미술학원’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학원 문 앞에서 희권이는 또 태권도장이 가기 싫다며 간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나는 문득 애를 태권도장에 보내지 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희권일 데리고 약수터 어린이회관에 가서 놀다가 학원 마칠 시간쯤 집으로 데리고 가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집에 가서 제 어미한테 태권도장을 갔다왔다고 거짓말을 해야 할 것인지, 사실대로 말을 해야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거짓말을 하려면 애하고 입을 맞추어야 하는데,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에게 거짓말이나 가르친 데서야 말도 안 되는 짓이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을 해서 희권이 어미를 상심케 할 수도 없고, 나는 할 수 없이 제 어미가 쓰던 가혹한 협박을 써먹었다.
“희권이 태권도장에 안 가면 아기만 데리고 집에 간다고 했잖아. 그러면 희권인 할아버지하고 외갓집에서 살아야 돼.”
희권이는 결국 그 말에 꼼짝없이 선생님 손에 끌려 학원 안으로 들어갔다.
싫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오이씨 같은 하얀 실내화에 싣고 학원 안으로 사라지던 희권이의 작은 모습이 하루 종일 눈에 밟혀서 골이 아팠다.


그런데 희권이는 학원에서 돌아오자 아침의 일은 까맣게 잊은 듯 장난감을 가지고 천진하게 놀았다. 노는 게 씩씩하고 활기찼다. 태권도장에 다녀온, 어려운 제 몫을 하나 해낸 자신감에 넘치는 모습이었다. 나도 마음이 환하게 개여서 희권이와 더불어 동심이 되어 놀아 주었다. 애들은 어른을 그렇게 안타깝게 하며 크는 모양이다.
희권이 어미는 아침의 아픈 기억을 씻어 버리려는 것인지, 더럽지도 않은 실내화를 하얗게 빨아서 ‘희권아, 미안하다’ 하는 것처럼 희권이 머리맡 문갑 위에 가지런히 놓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