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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균 수필 연재 - 파리 목숨

Joyfule 2011. 12. 30. 02:37

 

    

 

목성균 수필 연재 - 파리 목숨


파리목숨만도 못하다는 말이 시사(示唆)하는 바와 같이 생명의 존엄성에 파리 목숨까지 포함 된 건 아니라고 보는 게 옳을 듯 싶다.
아내는 파리만 보면 살기차게 파리채를 휘두른다. 유태인을 멸종시키려고 한 히틀러의 도착증세 같은 거나 아닌지 걱정된다. 여름만 되면 아내와 나는 하찮은 파리 때문에 금실을 그르칠 수 있는 지경까지 갈 때가 있다. 나는 시간이 나면 바람이 시원한 창 곁에 번듯이 누워서 독서를 한다. 독서의 자세로 보아서 낮잠을 청하는 구실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아는 아내는 남편의 독서삼매쯤 가소롭다는 듯 곁에서 '탁 탁' 소리를 내면서 파리채로 파리를 때려잡는다. 소롯이 잠이 들려고 하는데, 살기(殺氣)찬 파리채의 타격소리가 들려 오면 신경질 난다.
"그만 둘 수 없어? 시끄러워 잠을 잘 수 없잖아 -."
"참 별 일이네, 낮잠 자는 게 무슨 벼슬사는 것처럼 유세야. 낮잠 잘 시간이 있으면 파리나 한 마리 잡아요!"
이렇게 다툼이 시작되지만 파리 때문에 부부 싸움을 했다면 남자의 체신머리가 파리같이 될 뿐이므로 나는 책을 들고 다른 방으로 피해 간다. 그러면 파리들은 저 사람을 따라가야 살 수 있다는 듯이 날 쫓아오고, 아내는 파리채를 들고 파리를 뒤쫓아온다. 이렇게 해서 달콤한 낮잠의 꿈이 깨져 버리면 나는 더 참지 못하고 벌 쏘인 황소처럼 식식거리며 아내한테 덤빈다. 그제야 아내는 슬그머니 파리 사냥터를 옮겨가는 것이다. 


나는 아내의 파리 사냥을 귀찮아 하지만 고맙게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내의 파리 사냥은 가족의 보건위생을 위한 주부의 책무를 다하는 일종의 작업임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어려서 뒤꼍 장 항아리 안에 하얀 애벌레들이 득실거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 게 뒷간의 구더기와 한 족속이라는 사실을 알고 한동안은 밥상에 오르는 장 뚝배기에 수저를 대보지도 않았다.
구더기의 성충인 파리 주제에 감히 우리 맛의 원천인 장 항아리에다 쉬를 쓸어 가지고 제 새끼의 복된 성장을 꾀하다니! 아내가 파리 사냥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도 파리의 그 같은 분수를 모르는 짓에 대한 적개심인지 모른다.


사람들은 파리를 죽이는데 일말의 가책도 느낄 필요는 없다. 다만 <에프 킬러>같은 화학약품으로 파리를 대량 학살하는 것과 한 마리씩 파리채로 때려잡는 것은 의미가 약간 다르긴 하다. <에프 킬러>를 사용하는 것은 청소 작업이고, 파리채를 사용하는 것은 살육이다. 파리채에 맞은 파리의 주검을 보면 대개 으깨져 있는데, 그 것은 분명한 살의(殺意)의 흔적이다. 그러나 파리 목숨이 생명의 존엄성에서 배제 된 이상 죽이는 방법을 가지고 왈가왈부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스님이 파리를 죽이는 건 살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파리가 다리에 무수한 병균을 묻혀 가지고 날아다니며 퍼트려서 무고한 사람들을 병고에 시달리게 하고 혹은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할 때, 스님이 파리를 죽이는 일은 오히려 공덕을 쌓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스님이 법당에서 파리채로 파리를 톡톡 때려잡는 다면 모양이 볼썽사나울 수는 있다. 그러면 <에프 킬러>를 사용하면 된다. 파리의 살생까지도 중생을 구원한다는 불심(佛心)의 배치(背馳)라고 안 된다면, 결국 생로병사(生老病死)로부터 인간을 구제한다는 불심(佛心) 결론은 모순이다.


나는 파리를 손으로 포획하는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다. 오랜 숙련의 결과이다. 파리는 난다. 위험할 때 순간 비상은 절대로 만만치 않다. 파리의 살아 남기 위한 선천적인 기민성(機敏性)을 제압하는 재미는 일종의 스포츠와 같다.
파리는 날아 앉으면 일단 몸을 낮추고 앞발을 모아 비비며 신중하게 적정(敵情)을 살핀다. 그 척후적(斥候的) 자세와 여차하면 다시 날아가려는 기민성, 나는 그 때의 파리를 잡는다. 절대로 방심한 파리를 기습하지는 않는다. 포획의 재미도 없을 뿐더러 스포스맨쉽에도 위배되기 때문이다.
나는 오른손 끝에 기(氣)를 집중시키고 파리를 포획 할 수 있는 적정(適正) 거리까지 조심스럽게 가져간다. 그리고 오른손을 파리가 앉아 있는 위의 허공을 새매처럼 가르면 파리는 제풀에 놀래서 날아오르는데, 영락없이 내 손아귀에 낚아 채이고 만다. 손아귀의 조임을 가만히 풀면 느껴지는 벗어나려는 절망적인 작은 힘, 그 쾌감(快感)을 힘껏 바닥에다 패대기를 치고 보면 거기 파리의 주검이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잔인하다고 느껴 보지는 않았다. 파리의 생명에 단 한 번도 존엄성을 부여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자정이 넘은 고요한 밤에 나는 파리하고 같이 지내며 파리 목숨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미지의 형상화에 골똘한 내 원고지 위에 파리가 한 마리 날아와서 내려앉았다. 그리고 책 위로, 방바닥으로, 빈 찻잔으로, 잠든 아내의 얼굴 위로---, 열심히 빨판을 끌면서 기어 다녔다.
나는 글이 되지 안아서 약간 절망적인 마음으로 파리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비록 나는 실의에 빠져 있고, 아내는 잠들어 있다고 하지만 파리 사냥의 명수들 앞에서 위협을 느끼지 않고 기탄 없이 생명력을 들어내 보이는 파리의 부지런한 움직임이 어리석다기보다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본능일 뿐인 파리의 움직임, 곤충의 짧은 삶의 표연(飄然)함이 보였다. 더럽다는 고정관념을 벗어버리고 바라 본 파리는 분명히 하나의 생명이었다.


파리와 벌, 다 같은 곤충이다. 그런데 어째서 벌은 꽃에 앉아서 꿀을 빨고, 파리는 부패(腐敗)에 앉아서 오물을 빨고 살게 마련되었을까? 어째서 벌은 독침으로 제 생명을 지킬 수 있는데, 파리는 독침도 없이 고스란히 내 손아귀에 낚아채어 죽도록 마련되었을까? 조물주는 무슨 억하심정으로 벌과 파리의 생명을 극단적인 처지로 태어나게 하셨을까? 전생의 업보(業報)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도 죽어서 파리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다. 그러고 보니 파리의 생명에 연민(憐憫)이 느껴졌다.
파리는 비위생적인 몸일망정 제 딴에는 우호적인 몸짓으로 사람에게 덤빈다. 아내의 잠든 얼굴에 기어다니는 저 파리를 보면 그 걸 알 수 있다. 재빠르게 이목구비를 넘어 다니는 움직임에 이 여자가 틈만 나면 우리 생명을 백안시(白眼視)하며 가차없이 파리채를 휘두르던 살육자라는 섭섭한 감정은 아예 품고 있지 않아 보였다.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성의 있는 애무를 하듯 온 얼굴을 기어다닌다. 아내는 그 것도 모르고 깊이 잠들어 있다.


그런 파리가 이상하게 조금도 혐오스럽지 않았다. 내가 손을 내밀면 납작 엎드려서 제 몸을 내 맡길 것만 같은 파리의 몸짓에 나는 애완심(愛玩心) 마저 느껴졌다. 진심으로 파리 생명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싶었다. 여름날 파리 떼가 극성을 부린다면 <에프 킬러>로 학살은 할지언정 파리를 손아귀로 낚아채서 패대기쳐 죽이는 잔혹행위는 이제 다시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죽어서 파리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내 생명이 파리의 생명 보다 더 우월할 게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시대의 부패 속에서 살며 내가 언제 내 삶을 청결히 보전 해 보겠다는 의지를 가져 본 적이 있었던가. 파리와 다를 바 없이 부패를 탐닉하며 살았다.
아내도 이렇게 깊은 밤에 고독한 마음으로 작은 생명의 움직임을 관찰해서 파리에 대한 유감을 풀도록 해야겠다. 이승에서 못난 자의 아내로 산 것만 해도 억울한데 파리채를 휘두른 업보로 죽어서 파리가 된다면 큰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