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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균 수필 연재 - 거진항의 아침

Joyfule 2011. 12. 31. 03:11

 

    

 

목성균 수필 연재 - 거진항의 아침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여관 창문이 뿌옇게 밝아 있었다. 수평선 위로 해가 뜬 모양이다. 일출을 보긴 틀린 것 같았으나 아침 포구를 보기 위해서 서둘러 여관을 나섰다.
여관 옆으로 뚫린 골목은 곧바로 방파제로 이어졌다. 방파제 오른 쪽은 해수욕장이고 왼쪽은 거진항이다. 해수욕장 모래톱에는 아침파도가 조용히 밀려와서 몸 비비며 충만한 밤을 보낸 여자의 교태같이 속살거린다.
수평선에는 구름이 떠 있고 해가 구름 위로 시뻘건 얼굴을 쳐들고 있었다. 바다가 아침 햇살을 받고 갑옷자락의 철편 처럼 빤짝거렸다. 저 평화로운 바다가 돌연히 길길이 날뛰면서 이 방파제에 제 몸을 부딪쳐 박살을 낼 때도 있다니 바다의 깊은 속을 영장류의 오만한 지혜로 헤아리려 든다는 건 교만한 짓이다.


내가 서 있는 방파제 끝에는 하얀 등대가 서 있고, 수평선을 등진 맞은편 방파제 끝에는 빨간 등대가 서 있다. 색깔만 다를 뿐 똑같은 모습의 두 등대가 이란성(二卵性)쌍둥이 같다. 언젠가 비 오는 아침 대보항에서 본 방파제 끝에 서 있던 등대의 모습도 그랬다. 입항하면서 오른 쪽은 빨간 등대 왼쪽은 하얀 등대, 배들의 안전 입항을 유도하는 규격화 된 등대의 신호 체계인 모양이다. 그러나 등대는 입항하는 어선들에게 규격적인 신호만 보내기 위해서 서 있는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빨간 등대는 만선 축하용이고, 하얀 등대는 빈배의 시름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고 보고 싶다.
방파제 밖에는 근해 채낚기 어선들이 여남은 척 항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모여 있었다. 어판장 부두에 어선이 가득 접안해 있어서 배를 더 이상 댈 자리가 없기 때문인 듯 해 보였다.


어판장 부두에 접안하고 있는 어떤 오징어잡이 어선은 아직도 집어등을 대낮같이 밝히고 있다. 오징어를 경매하는 핸드폰소리, 호각소리, 딸랑거리는 종소리, 어판장의 열기가 방파제까지 전해졌다.
어선이 한 척 서서히 내항으로 들어가다가 방파제 앞에서 멈췄다. 선수에 제2광성호라고 쓰여 있다. 무전기의 금속성 음이 다투는 것처럼 거칠다. 주체할 수없이 많은 오징어가 어판장에 부려지면 비례해서 오징어 경락가는 떨어질게 분명하다. 미쳐 어판장 부두에 배를 대지 못하고 뒤쳐진 선장이 초조해서 신경질을 내는 까닭은 그 때문이리라.
항구는 더 넓힐 수 없는데 어선의 톤수는 늘고, 항구가 포화상태다. 거진항의 갈등이 눈에 보인다. 비단 거진항 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토는 한정되어 있는데 삶의 질량이 는다. 국가 산업이 번창하는데 따라서 삶의 갈등이 서로 존중하던 인간적인 것들을 마모시킨다.


방파제를 돌아 나와서 어판장 부두로 갔다.
어판장 부두에 제2광성호가 들어와서 오징어를 부린다. 일부는 활어 운반차 수조에 실리고 일부는 어판장 시멘트 바닥에 함부로 부려진다. 오징어들이 물총 쏘듯이 물과 먹물을 뿜으면서 퍼덕인다. "찍-, 찍-,"하고 소리도 지른다. 오징어의 비명소리를 나는 처음 들어보았다.
산 오징어 20마리가 만원이다. 한 마리에 500원, 너무 싸다는 생각이 든다. 출어경비를 제하고 선주의 몫을 빼고 나면 어부의 몫은 마리 당 얼마쯤이나 될까. 새우깡 한 봉지 값과 산 오징어 한 마리 값이 같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경제원칙인걸 어쩌랴. 그래, 경제 원칙이 문제다. 이념의 발생 소지가 있다. 반드시 해결할 문제 같다. 어떻게 해결 할 건데---? 오징어를 무지하게 많이 먹으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오징어가 질기다는 것이다. 많이 먹으면 어금니가 상한다. 어금니가 상하면 치과에 가야한다. 치과는 오징어가 풍년이면 매상이 오를까. 그러고 보니 사회란 먹이 사슬이다.


활어 운반차를 탄 오징어들은 수조의 창가에서 보란듯이 유유히 헤엄을 친다. 어판장 바닥에 나뒹군 오징어에게 선택된 제 처지를 과시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오징어의 운명은 바다를 떠난 이상 똑같다. 활어 운반차를 탄 오징어는 어느 도시의 횟집으로 실려 가서 산 체로 저며진 후 게걸스러운 사람의 먹거리가 되고, 어판장 바닥에 뒹구는 오징어는 할복을 당한 후 해변의 맑은 바람과 밝은 햇살에 풍장(風葬)을 치른 후 서민들의 권태극복용이 된다. 마른 오징어는 소주와 더불어 질겅질겅 씹히며 가난한 삶의 기개를 고양시키는 욕구불만용으로 없어서는 안될 물건이다. 내 생각에는 활어 운반차를 타고 어느 도시 횟집에 가서 몸을 저며 가지고 양념초장에 버무려지느니 차라리 맑은 바람과 밝은 햇살 아래 풍장을 치르는 게 났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건 이미 오징어가 선택할 사항 밖의 일이다.


어판장 시멘트 바닥에 나뒹구는 오징어의 퍼덕임, 얼마나 솔직한가. 최소한 그 오징어들에게는 인간이 따져 볼 아무런 부당한 삶의 혐의점도 없다. 오징어의 퍼덕임은, 오징어 뿐 아니라 생선의 공통점이지만 어획당한데 대한 회한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사실, 선도(鮮度)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오징어의 생김새는 미스터리다. 동물적인 몸통의 격식을 과감하게 무시해 버렸다. 다리 사이, 생식기와 배설구가 달려 있는 사타구니가 동시에 입과 눈이 달린 얼굴이라니---. 나는 항상 두 귀가 달린 부분이 오징어의 머린 줄 알았는데 두 귀가 실은 오징어의 방향타(方向舵)용 지느러미로서 꼬리부분이라고 한다. 참 몰상식하게 생긴 놈이다.


오징어 만치 순진한 어종도 없을 것이다. 몰상식한 생김새를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고 집어등 불빛이라면 죽음도 불사하는 그 양성반응이 촌뜨기 같이 순진하다. 어부들은 오징어를 잡는데 신경전을 펼치지 않는다. 집어등만 밝혀 놓고 낚싯줄이 감긴 물레만 돌리면 된다. 오징어 낚시에는 미끼를 달지 않는다. 불빛을 보고 치열하게 덤비는 오징어들은 미끼 없는 낚시에 대가리든지, 몸통이든지, 다리든지 맘대로 찍혀서 올라오는 것이다. 오징어를 잡는데는 하등의 기술도 필요 없다. 낚싯줄을 채는 단순 작업만 하면 된다니 오징어는 바보다. 바보의 세계에는 계층이 없다. 더 바보도 덜 바보도 없는 똑같은 바보 일색이다.


낚시 바늘을 의심하거나 피해 보려는 최소한의 교활성도 갖지 못한 순한 놈들은 맛도 순하다. 식도락의 묘미를 충족시켜 줄 별난 맛이 없는 오징어를 낭비가 가능한 식도락가들은 먹지 않는다. 그래도 꼬리를 물고 서 있는 대형 오징어 활어운반차에 수도 없이 오징어가 실린다. 수산업의 발전은 낭비가 가능한 소수의 식도락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값싼 입맛의 일반 수요에 의해서 이루어진 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오징어 활어운반차들---. 비단 수산업뿐이랴, 국가 경제의 전반에 걸친 한 예일 수 있다. 산봉우리는 산의 저변에 의해서 확고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산봉우리만 선망하고 산의 저변은 도외시한다. 법석대는 포구의 어판장에서 나는 삶의 정점 밑바닥의 요지부동한 저변을 보고 사회구조를 인식했다.


어판장에서 여관으로 돌아오다가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고 마주 달려오는 신문배달 소년을 만났다. 내 옆으로 지나가는 소년을 불러 세웠다. 신문을 한 장 사기 위해서였다.
"신문 남는 거 있으면 한 부 팔아라"
소년이 자전거를 세우고 내려서 신문을 한 부 건네주었다.
"얼마냐?"
"300원이에요."
"1000원짜리 밖에 없는데, 거스름돈 있니---?"
동전이 없어서 1000원짜리를 내밀며 물었다. 소년은 잠시 돈과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흔쾌히 말했다.
"그냥 보세요."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새벽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1000원짜리 지폐를 들고 소년의 자전거가 사라진 골목 끝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비릿한 항구의 아침 공기를 흐트러뜨리며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고 사라진 소년의 오징어처럼 순진한 뒷모습이 때묻은 내 눈을 부시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