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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균 수필 연재 - 梨花嶺2

Joyfule 2012. 4. 13. 08:42

    

  

목성균 수필 연재 - 梨花嶺2


2. 초콜릿
나는 6. 25사변 때 걸어서 이화령을 넘었다. 이화령을 넘은 것은 그 때가 처음이다. 아버지를 따라서 경산까지 피난을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처음 걸어서 넘은 이화령은 내게 지울 수 없는 아픈 기억을 남겨 주었다.

막 전쟁이 지나 간 강토(疆土)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복날 개 끄실러 놓은 것처럼 네이팜탄에 불탄 시커먼 산들, 포탄이 짓이겨 놓은 경작지마다 잡초와 곡식이 우긋하게 자리다툼을 하고 있는 무질서, 허물어진 집 뒤꼍 장독대에 무사하게 돌아난 크고 작은 독과 항아리들이 공포에 질려 의지하고 있는 외로운 모습들, 홀로 선명한 빨간 감 알들, 어디서 풍겨오는 주검이 썩는 냄새-.

전쟁은 사람의 크고 작은 소망들을 무참하게 짓밟아 놓았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치가 떨린다. 이념이 뭐 길래, 단일 민족의 삶의 정서를 공수병에 걸린 개 떼처럼 뒤엉켜 그 지경을 만들어 놓은 것인지 모자라는 민도(民度)가 서러워서 통곡을 하고싶다.

나는 무서워서 허둥지둥 아버지의 빠른 걸음을 따라 걷다 뛰다 했다. 아버지는 어린 자식이 뒤따라온다는 사실은 까맣게 잃어버리셨는지 이념의 수복(收復)만 생각하며 걸으시는 듯 했다. 엷은 늦가을 햇살아래 전쟁의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놓고 있는 강토를 지나서 마침내 이화령 고갯마루에 이르렀다.
고개만 넘으면 내 집인데 길이 막혔다. 꽁무니에 대포를 매단 미군 차량들이 길게 줄지어 멈춰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들이 몰려 서서 웃고 떠들며 산비탈에다 돌을 던지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왜 돌을 던지고 있는지 궁금해서 미군들 뒤에 서서 어깨 너머로 바라보았다. 산비탈에 노란 군복을 입은 병사의 주검이 누워 있었다. 하얗게 뼈만 남은 얼굴이 반듯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누워 있는 옆에 별이 달린 인민군 전투 모가 놓여있었다. 곤히 잠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사람의 주검을 그 때 처음 보았다. 미군들은 그 인민군 병사의 하얀 얼굴을 겨냥해서 돌을 던지고 있었다.

1950년 늦가을 벌써 53년 전이다. 그런데 그 미군 병사들의 얼굴이 지금에서 더 확실하게 보인다. 유백색 얼굴이 흥분해서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한창 데설궂을 소년 병들이었다. 용병이었는지, 지원병이었는지 모르지만 명분 없는 남에 집안 싸움에 출전하게 된 그들이 무슨 전쟁의 당위성을 인식했으랴. 전쟁을 스릴 있는 게임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를 일이었다. 미군 병사들이 인민군 병사의 주검에 돌을 던지는 것이 적개심 때문은 아니고 무료를 달래는 일종의 게임 같아 보였다.
드디어 어느 미군병사가 주검의 얼굴을 맞췄다. 주검의 머리는 힘없이 깨뜨려지고 말았다. 미군병사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나는 무서워서 아버지에게 매달리며 울었다. 악을 쓰면서 울었다. 까닭 없는 돌에 맞아서 내 머리가 깨진 것처럼 슬펐다.

“아이 엠 소리-, 아이 엠 소리-.” 어느 미군병사가 우는 나를 달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인민군 병사의 머리를 마친 미군병사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미군 병사는 내게 뭐가 미안하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군 병사들은 초콜릿을 내게 쥐어주었다. 나는 초콜릿을 받아들고 울음을 그쳤다. 생전처음 받아든 꼬부랑 글씨가 적힌 이상한 물건에 대한 호기심이 잘 알 수 없는 슬픔의 이유를 상쇄시켜버린 것이다.


그 인민군 병사의 부모는 휴전이 되었을 때 어느 마을 저문 동구에 서서 자식의 귀향을 얼마나 기다렸을 것이며, 또 그 어린 미군 병사들은 무사히 살아서 미국으로 돌아가기나 했는지---?
가끔 그 생각이 나서 이화령을 쳐다볼 때가 있는데 그 때마다 ‘나는 몰라 내 책임 아녀-.’ 하 듯 이화령은 아득히 물러앉아서 높기만 했다. 그러면 초콜릿의 맛이 내 아픈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