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성균 수필 연재 - 수탉
‘너는 수탉만 한 자존심도 없느냐.’
젊은 날, 전도를 개척해 보겠다고 객지로 돌아다니다 성과도 없이 막 집에 돌아온 내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바깥 사랑방에 좌정하신 아버지께 큰절을 올리자 대뜸 그리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생각할 수록 나를 늪처럼 깊어지게 하는 말씀이다. 아버지의 말씀에는 약간 모멸적인 억양이 섞여있었다. 그러나 나를 섭섭하게 하려는 고의가 있으신 말씀은 물론 아닌 줄 안다. 나이 삼십의 턱을 넘은 놈이 이립(而立)의 싹수가 안보이니까 답답한 나머지 하신 말씀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마당을 내다보면서 그리 말씀 하셨다. 마당에는 퍽 큰 벌건 수탉 한 마리가 아버지의 말씀에 타당한 몸짓으로 나더러 보라는 듯이 어정거리고있었다. 토종과 뉴햄프셔의 교잡 종쯤 되어 보이는 수탉이었다. 토종 의 당찬 기상을 커다란 체격이 뒷받침 해 주니까 수탉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자존심의 실체였다. 아버지의 말씀이 아니라도 나는 이 수탉의 자존심을 일찍부터 알고있는 터였다.
수탉은 우리와 한 식구로 살아온 지 사오 년이 넘었다. 어머니가 장에 갔다가 하도 잘생겨서 장볼 계획에 없던 수탉을 덥석 사오신 것이다. 이 수탉은 우리 집에 와서 여남은 마리의 암탉을 거느렸다. 수탉이 원래 일부다처의 자질을 지녔는지 안 지녔는지는 모르지만 이 수탉은 지아비의 책임을 충실히 다했다.
암탉 여남은 마리는 소중한 우리 집의 가축이었다. 여남은 마리의 암탉이 한 파수에 달걀을 너덧 꾸러미를 생산했다. 가계의 큰 보탬이 되었다. 만약에 수탉이 여남은 마리의 암탉 중 한 두 마리만 상감이 후궁 편애하듯 돌보았다면 나머지 암탉들은 항의 파업으로 달걀 생산을 중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 집의 가계 사정은 불가피하게 차질을 빗을 수밖에 없었음은 물론이고 어머니가 장날 아침에 달걀을 조심스럽게 꾸러미 짓는 재미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수탉은 그런 여난(女難)이 발생하지 않도록 다처(多妻)를 잘 거느렸다. 같은 남자로서 선망의 대상이었다.
어느 해 이른봄 나는 이 수탉의 자존심을 지켜보고 있었다. 양지바른 들녘에 아지랑이가 가물거리지만 높은 산봉우리의 그늘에는 묵은 눈이 희끗희끗할 때다. 할머니가 겨우내 자아 낸 베를 매고 계셨다. 할머니가 베를 매는 마당에는 늘 동네 여자들이 하나 가득했다. 할머니의 길쌈을 견학하는 것이다. 나이 든 여자들은 할머니의 곱게 자아낸 명 실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치하하고 젊은 새댁들은 눈을 빛내며 말없이 지켜보았다. 우리 할머니의 길쌈 솜씨가 내 자부심을 한껏 부풀려 주었다. 단언컨대, 우리 할머니 길쌈 솜씨는 샛골나이의 무형문화재이신 노진남 여사 못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 근동에서 보름 새 무명을 짜낸 분은 우리 할머니말고 없다. 할머니의 보름 새 무명피륙은 근동은 물론 피륙장수여자에 의해서 멀리 영남까지 행세하는 어른의 도포나 두루마기 감으로 나갔다.
병아리가 딸린 암탉은 마당 귀퉁이 거름더미에서 열심히 거름을 버르집으며 ‘꼭 꼭’거리고 있었다. 먹이가 나왔으니 주워먹으라는 소리일 것이다. 병아리들은 어미 닭이 거름을 버르집는 발질에 걷어 채이면서 열심히 모이를 주어먹고 있었다. 그 곁에는 예의 수탉이 서있었다.
그 때의 수탉은 늠름했다. 암탉과 병아리에 가해질 어떠한 위해도 막아내려는 의지에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수탉의 자존심을 나는 주목하고 있었다. 우리 할머니의 베 매는 모습이 여자의 자존심이라면 암탉과 그 병아리를 거느린 수탉의 모습은 남자의 자존심이었다.
가끔 수탉이 ‘꾹 꾹’거리고 주의를 발령했다. 그러면 암탉이 병아리를 품고 엎드렸다. 수탉은 두 다리와 상체가 일직선이 되도록 직립자세로 마당에 의연하게 서있었다. 하늘에 독수리가 한 마리 날고 있었다. 독수리의 그림자가 마당을 지나가면 수탉이 주의를 발령해서 암탉과 병아리를 엄폐시키고, 정작 저는 일전을 불사할 의연한 자세로 마당에 표적처럼 버티고 서있는 것이었다.
수탉의 독수리와 대치 자세는 같은 수컷으로서 존경스럽기 그지없었다. 차라리 무모하다는 말이 더 적절할지 모르는 그 태도를 영장류인 나는 생각이 깊어서 감히 엄두도 못 낼 일 이었다. 쭉 펴면 1미터가 넘는 날개로 유유히 활공을 하다가 급강하해서 날카로운 발톱으로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의 사냥에 퇴화되어서 날지도 못하는 가금(家禽)의 날개와 발톱으로 어찌 해보겠다고 저리 높은 정신으로 의연하게 버티고 서있는 것인지, 돌연한 야성본능이 존경의 염을 넘어서 그저 경이로울 뿐이었다.
수탉의 머리는 작다. 그러나 머리 위의 꼿꼿한 빨간 볏과 부리아래 관우의 수염처럼 소담스러운 볏이 작은 머리를 함부로 볼 수 없게 했다. 사기(史記)에 이른 ‘寧爲鷄口, 勿爲牛後: 닭의 머리가 될지언정 소의 엉덩이는 되지 말라’는 말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수탉의 가슴도 작다. 그러나 가슴을 내밀고 독수리를 향해서 직립으로 서있는 수탉의 자세에서 가슴은 엄청 크게 보였다.
언젠가 디즈니 만화에서 불독 개하고 맞선 수탉을 본적이 있는데 가슴을 프로레슬러의 가슴같이 그려놓았다. 너무 과장되게 그렸다고 생각하면서 만화니까 그러려니 했는데 그것이 만화가의 시선이 아니고 마음이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탉은 다리도 가늘다. 그리고 세 개의 발가락으로 된 발은 불안정하다. 그러나 하늘의 독수리를 향해서 땅을 딛고 서있는 발과 다리는 마치 비탈에 똑바로 서있는 참나무의 둥치같이 탄탄해 보였다. 수탉의 위세를 유감 없이 보여주는 것은 꼬리다. 한껏 추켜들어서 포물선을 지은 검은 꼬리는 세계 10대 멋있는 폼을 들라면 들고싶을 만치 멋진 모습이었다. 남자로서 질투가 느껴졌다.
이 수탉의 자존심 강한 그 모습은 수탉이 독수리와 대치했을 때의 모습이다. 아버지가 내게 ‘너는 수탉만 한 자존심도 없느냐’고 하신 말씀은 기실 따지고 보면 자기 자식을 낮춰보신 게 아니고 높여보신 것이다. 나는 수탉만 한 자존심을 가진 남자가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고 싶다.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책임감, 그리 흔치 않다. 아버지는 그리 흔치 않은 자존심을 내게 갖추라고 요구하신 것이다. 우리 아버지도 여느 아버지들처럼 자식욕심은 엉뚱한 데가 있으신 분이었다. 어쩌자고 내게 가당치 않은 수탉의 자존심을 요구하셨단 말인가. 불쌍하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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