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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침(木枕)냄새 - 유연선

Joyfule 2013. 10. 7. 10:10

   목침(木枕)냄새 - 유연선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화들짝 놀라 일어나는 내 손목을 친구가 덥석 잡았다. 차편도 없으려니와 술에 취해 데려다줄 수도 없으니 자고가라고 했다.

 

술에 취했으니 쉽게 잠들 줄 알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취기가 달아나고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 새 이부자리가 거부감을 주는 데다 베개가 맞지 않았다. 물렁물렁한 베개를 베니 거꾸로 박히는 것 같아 두 개를 포개 베니까 곤두선 것 같았다.

 

슬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와 서성이다 마당 구석에 쌓아놓은 나뭇가리를 발견했다. 나무토막을 한 개 집어 들고 들어와 수건으로 싸서 베니 만들어 놓은 베개보다 편했다. 목침을 베개 삼아 잠을 청하려니 어린 시절에 목침을 가지고 놀던 생각이 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우리 집 사랑방은 머슴방이 되었다. 머슴들이 일터로 나가고 없으면 아이들을 데리고 사랑방으로 숨어들었다. 담배 냄새와 땀 냄새로 찌들은 사랑방에선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문을 꼭 닫고 놀았다.

 

머릿기름 때로 번들거리는 목침을 베고 어른들 흉내를 냈다. 다리를 꼬고 누워서 코고는 시늉을 해보지만 딱딱한 목침 모서리가 머리를 파고드는 것 같아 오래 누워있을 수 없었다. 어른들처럼 목침을 던지고 받는 시늉도 해보지만 미끄럽고 굵어서 척척 받아낼 수 없었다. 제일 재미있는 놀이는 목침 쌓기 놀이였다. 벽장 안에 쌓아놓은 목침을 모두 끄집어내어 성을 쌓았다가 무너트리곤 했다. 어서 어른이 돼야 목침을 베어도 아프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어서 손이 커야 목침을 척척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어른들은 왜 딱딱한 목침을 베고 자는지 궁금했다. 왕겨나 메밀을 넣어 베기 부드러운 베개를 마다하고 목침을 베는 게 이상했다.

 

목침이 옛날부터 쓰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공주박물관에서 백제 무령왕의 목침을 봤을 때였다. 통나무를 베는 부분만 움푹 파고 붉은 칠을 한 나무토막이었는데 귀갑문을 금박으로 새긴 화려한 목침이었다. 권력과 부의 정도에 따라 목침도 여러 모양으로 만들어 베었던 모양인데 우리 사랑방 목침은 하나같이 아무런 문양도 없는 나무토막들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사랑방의 목침은 베개로만 쓰인 것이 아닌 모양이다. 짚 마디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두들기기도 했고 짚신을 삼아 꼴을 치면서도 두드리고 문지르는 망치로도 썼다. 또 심심하면 목침을 손아귀로 잡고 뺏는 목침 뺏기 놀이도 했다. 요즘엔 노래를 부르려면 숟가락이나 술병을 가리지 않고 입에 대고 마이크를 잡듯 하지만 사랑방 마실꾼들은 목침부터 찾아들어 사타구니에 끼웠다. “귀야 귀야 담바귀야 동래나 울산에 담바귀야. 너의 집이 좋다더니 강원도 땅엔 왜 왔느냐….” 투덕투덕 투더덕 턱…. 담바귀타령을 부를 때나 노랫가락이 나올 때면 두드려댔다. 흥얼흥얼 고개를 주억거리다 추임새가 나오면 옆 사람 등짝이나 무릎을 손바닥으로 치기도 하고 공중으로 집어던졌다 받으면서 박자를 맞추고 흥을 돋우는 악기로도 쓰였다.

 

또 목침은 캄캄한 밤중에 도둑이 들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 베고 누었다가 집어 던질 수 있는 무기로 쓸 수 있다고 했다. 일격에 제압하지 못하면 계속 던질 무기로 쓰려고 그랬는지 마실 오는 사람들이 아무리 많아도 모두 베고 누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지 사랑방 벽장 안에는 많은 목침이 쌓여 있었다.  


가장 재미있는 기억으로 떠오르는 것은 목침이 체벌 도구로 쓰일 때였다.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도 목침에 올라서서 매 맞는 아이를 보면 기겁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조바심쳤다. 아무리 당찬 아이라도 종아리를 걷고 목침 위에 서면 피멍이 들도록 회초리로 맞을 생각에 저지레 친 일들을 낱낱이 불었다. 아이들끼리 굳게 맹세한 비밀들이 낱낱이 드러나 동네 아이들이 줄줄이 엮여 곤욕을 치렀다. 
 

딱딱한 목침을 곤두세워 베고 코고는 어른들을 보면 금방이라도 딱딱한 모서리에 머리가 찌그러지거나 고개가 꺾여 숨넘어가는 것 같아 슬그머니 목침을 빼어내다 들켜 야단맞고 달아나던 기억도 난다.

 

커서야 목침을 베고 자면 지압효과가 있어 머리가 맑아진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수오 베개를 베면 장수한다고 하고 녹나무 베개를 베면 잡귀와 뱀을 쫓을 수 있다고도 했다. 나무토막은 목침의 원형이고 목침 속을 비워 향신료나 복숭아씨나 살구씨를 넣어 달그락거리는 목침도 있고 화려한 수를 놓아 헝겊으로 싼 목침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내 기억 속에 목침은 나무토막뿐이다.

 

베개는 단순한 침구가 아니라 머리와 목을 쉬게 해주는 도구라고 하는데 잠자리를 옮기면 잠을 못자는 습성은 아무래도 높낮이가 다른 베개 때문인 것 같다. 베개로 만들어 벤 나무토막에서 목침냄새가 나는가하고 킁킁거려 봤지만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문득 머릿기름에 찌든 유년의 기억 속에 목침냄새가 그리웠다. 나무토막을 베고 누워도 머리에 박히는 감각을 모르겠으니 내 유년의 어른들처럼 누워서 눈만 감으면 드르렁드르렁 잠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잠이 오지 않는 것일까.

 

수필가. 한국수필로 등단 . 한국수필작가회감사. 강원 수필문학상 . 수필집 '금자라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