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가 소명을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질문] :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목사나 선교사가 되겠다는 분들을 주변에서 종종 만납니다. 간혹 제 삼자가 볼 때는 거듭나지 않은 것 같고, 하나님에 대해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목사가 되면 안 될 것 같은데도 신대원을 진학하려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사와 선교사로 부르시는 확신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구하여서 그분들에게 자신과 비교해 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경적 해답을 찾기가 너무 힘들고 인터넷을 찾아보니 정답은 없다는 결론도 얻었습니다. 분명히 정답이 없는 주제이지만 목사님의 의견과 목사님이 신학을 공부할 때 어떤 확신과 마음의 자세로 임하셨는지 답변 해 주시면 앞으로 많은 참조가 될 것 같습니다.
[답변] : 정말로 정답은 없습니다. 본인이 하나님께 분명히 소명을 받았다고 확언을 하는데 아무리 자격미달로 보이더라도 제 삼자가 나서서 말릴 수 없습니다. 남들이 볼 때에 많이 부족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분명히 의로운 측면이 있고 그를 들어서 사용해야할 당신만의 뜻이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제자를 직접 불러내셨습니다. 제 삼자가 그 부르심이 잘못되었다고 탓하기는커녕 논의할 수도 없습니다. 당신을 배반해서 팔 유다도 주님은 아시고 선택했습니다. 십자가를 지실 독생자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일이자 태초부터의 삼위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안에 들어있던 일입니다. 유다 본인도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해방을 위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열심히 주님을 섬겼을 것입니다.
그 외는 성경의 모든 선지자들은 오직 본인과 하나님만의 개인적 일대일 대면을 통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제 삼자가 확인할 수 없었고 성경을 아무리 훑어봐도 소명여부를 점검하는 방안도 없습니다. 신구약 시대에도 거짓 선지자나 자칭 재림 예수는 많이 나타났으나 성경에 기록을 하지 않았고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 둘을 대조해서 어떤 해결책을 모색할 수도 없습니다. (민수기22-25장의 발람의 특수한 경우를 빼고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 모든 선지자와 사도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하나님의 대원칙 하나는 분명히 있습니다. 본인으로선 전혀 혹은 거의 준비가 안 된 자에게 하나님 쪽에서 먼저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 바울, 베드로 등등 모두 그러합니다. 하나님 쪽의 절대적 계획과 사명이 먼저 있고 그에 합당한 자를 미리 훈련 준비시켜놓고, 본인은 그것이 하나님의 훈련인줄도 모르지만, 불러내신다는 것입니다. 이에는 하나의 예외도 없습니다.
바꿔 말해 본인이 먼저 자기 사명을 정하고 그에 따른 계획도 세우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여서 스스로 의지적으로 결단하고 헌신했다면 하나님께 소명 받은 것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이 자기 사명을 정할 때에 이미 그런 마음을 하나님이 심어주었다고 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거기다 하나님 쪽에서 먼저 부른다는 원칙 또한 여전히 제 삼자로선 도무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답이 없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체험을 물어오셨는데 굉장히 예민한 주제라 구체적인 과정까진 간증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목사가 될 것까지는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불신자 시절은 물론 신자가 된 초창기에는 세상에서 출세, 형통할 길만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른 모든 길을 다 실패케 하셨습니다. 사실은 제가 믿음이 없어서 제 잘못에 전부 기인한 실패였습니다. 한참 나중에 그런 나의 허물과 실패까지 사용해서 저를 이 자리로 주님께서 인도하셨다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다 전혀 예상치 않던 순간과 장소에서, 아직은 목회자가 될 꿈도 꾸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저를 불러내시는 음성을 확실하게 들리도록 들려준 것은 사실입니다. 직접 음성이 들리는 직통계시는 아니지만 분명하고도 확실한 의미가 있는 간단한 문장의 형태로 내면에 들리게 했습니다. 이런 부르심의 절차와 소명의 내용은 사람마다 각기 다 다르므로 절대 일반화 시키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런 공적 성경문답에서 구체적 간증을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 저는 다른 일을 할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현실의 형편과 상관없이 주님의 인도에 순종하겠다고 결단했고 지금까지 그렇게 헌신 실천해왔습니다. 앞으로도 주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는 그 일 한 가지 외에는 어떤 관심도 미련도 없습니다. 요컨대 그런 일은 절대 없지만 다시 태어나면 그 때는 주저 없이 곧바로 목사의 길을 가겠다는 정도입니다. 또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보람찬 직업이 목사라고 재벌 회장과 대통령 앞에서도 떳떳이 말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결론은 하나님께 분명하게 소명 받았는지 그 자체를 제 삼자는 결코 점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그 목회자가 수행한 사역의 열매를 갖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에 대한 정확한 판단 준거는 예수님의 선한 목자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요한복음 10:1-18의 말씀입니다. 또 민수기의 발람이 바로 구약시대에서 예수님이 지적한 돈을 밝히는 삯군 목자의 대표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현실적으로도 삯군 목자가 나타나는 것을 미리 알고 막을 수는 도무지 없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하나님께 온전한 소명을 받지 않았어도 즉, 본인의 의지적 결단과 헌신만으로 목회자가 되었어도 어쨌든 주님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일할 것 아닙니까? 그럼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제 뜻은 이단도 현실적으로 막을 방도가 없는데 자기 생각이긴 해도 주의 종의 길을 가겠다는 자는 격려는 못해 줘도 막지는 못한다는 단순한 뜻입니다.
그럼에도 도무지 자격이 안 되는 목자의 경우는 결국에는 그 열매에서 표가 납니다. 우선 신자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혹시 많이 모여도 대단히 죄송하지만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속담이 적용될 것입니다. 삯군 목자는 자신의 돈, 명예, 권위를 높이려 드니까 그런 것만 밝히는 신자들만 모인다는 것입니다. 참 목자 밑에 참 신자가 있고, 참 신자들이 모이면 거짓 목자는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래도 순진하고 성경적 지식이 모자라는 신자들로선 자칫 목사의 거짓에 휘둘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예수를 믿은 참 신자라면, 정말로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면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인 성경을 파고들고 싶은 소망과 열성이 생깁니다. 성경을 통독하고 깊이 묵상하게 되면 신학적 교리적 가르침을 안 받아도 영적 분별력이 생깁니다. 거짓 목사를 구분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럼 조용히 그 교회에서 빠져 나가면 됩니다.
같은 목사 입장에서 책임을 신자에게 전가 시키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을 정기적으로 통독하지 않는 신자는, 목사 중에 자격이 없는 목사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자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나 목사나 연약한 인간이긴 마찬가지라는 단순한 의미는 아닙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고 묵상하여 그 의미에 자기 전부를 걸면 참 목자, 참 신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기독교인이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무시하면 목사든 신자든 기독교인의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지금 신자들이 이슬람교도나 불교도가 자기들 경전을 읽는 것보다, 아니 몰몬교나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단들이 성경을 읽는 것보다 성경을 적게 읽지 않습니까? 이런 판국에 어떻게 신자가 거짓 목자 탓만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성경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그대로 실천도 하지 않는 목자가 어떻게 신자가 거룩하게 바뀌지 않는다고 불평할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없습니다. 신자들이 성경을 제대로 읽어서 영적 분별력을 길러야 합니다. 도무지 삯군 목자이다 싶으면 조용히 그 교회를 떠나면 됩니다. 그 자체로 거짓목자는 벌 받은 것이며 그래도 자꾸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됩니다. 저는 이 부분에 확신합니다. 지금 자격이 부족한 목회자가 많은 것도 문제이지만 신자들이 성경은 전혀 읽지 않고 화려하고 선해 보이는 프로그램, 교회, 목사만 쫓아가는 것도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도무지 자격이 안 되어 보이는 자들마저 목회자가 되겠다고 나서게 만드는 동기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물주는 믿어도 창조주는 믿지 않는다
<창세기 강해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창 1:6-8)
불신자는 성경의 창조 기록이 구체적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으로 창조 자체를 부인하는 구실로 삼는다. 간혹 신자들 가운데도 창세기 1,2장의 기록이 좀 더 세밀하여서 상호 모순이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가진다.
그런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자란 창조가 진리임을 의심하지 않는 자다. 거기다 창조 기록에 대한 논리성을 따질 수 있는 의식이 생긴 것은 이미 창조된 후다. 비유하자면 아이가 자신의 정체성과 소속감을 가지는 것은 어떤 집안에 출생한 한참 후인 것과 같다.
어떤 부모도 아이에게 자신들의 연애와 결혼 과정을 설명하고 출생 기록을 보여주면서 네가 이 집안의 장남인 줄 믿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태어난 후에 그 집안에서 자라다 보면 부모가 누구인지 또 자기가 그 집의 아들인줄 자연히 알게 된다. 히브리서 11:3에서 믿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 “믿는다.”고 하지 않았다. “아나니라”고 표현했다.
대신에 부모는 아이가 건전한 인격과 지성과 건강을 갖추어 한 사람의 책임 있는 성인이 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가르친다. 마찬가지로 창세기 1,2장도 불신자에게 창조를 변증하고 가르쳐서 신자로 만들 목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만약에 그렇다면 창조 과정을 아주 정밀하게 기록했을 것이다. 이미 창조를 믿는 것을 넘어 알고 있는 신자들에게 어떻게 해야 온전한 믿음으로 성숙되고 신자답게 살 수 있느냐를 가르치려는 것이다.
창조 기사가 반복해 강조하는 내용
창세기 1장의 기록을 자세히 보면 동일한 단어와 구절로 일정한 패턴으로 반복해서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 반복 되는 용어와 양식이란 저자가 특별히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창조의 둘 째 날에 대한 기록인 본문에도 그러하다.
먼저 6절에서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한다. 창조 행위의 주체를 말한다. 둘째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무엇이 있으라고 한다. “나뉘게 하리라”(6,7절)고 했다.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셋째는 “그대로 되니라”(7절)고 반복해서 말한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대로 완벽하게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넷째는 본문에는 없지만 각기 종류대로 만들었다고 한다.(11절) 처음부터 고유의 종대로 창조했지 서로 다른 종에서 종으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섯째는 궁창을 하늘이라고 칭하셨다고 한다.(8절)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에게 각기 이름을 붙임으로써 고유의 기능과 역할을 부여했고 또 주권적으로 그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여섯째는 밤이 되니 둘째 날이라고 했다.(8절) 인간 세상의 시간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일곱 번째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다.(8절) 창조를 당신 스스로 평가하여 만족했다는 것이다. 어떤 하자나 부족함 없이 완전하게 창조했다는 것이다.
창조기사가 강조하는 이 일곱 가지의 의미는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가 자신의 인생과 삶에 적용하여 실현해야 한다. 창조가 진리라는 단순한 설명이 아니다. 신자의 매일의 삶에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야 한다. 진리를 안다면 진리대로 살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는가? 정말로 진리임을 확신했다면 어떻게 그대로 살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창세기 1,2장의 창조기록의 의미를 실제 삶에서 구현하고 있다면 창세기 3장 이후의 성경은 몰라도 된다. 지금 이단 사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죄에서 구원을 얻는 것이다. 또 죄에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타락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창세기 3장에 타락이 시작되고 1,2장은 죄가 들어오기 전이다. 구원을 받았다면 창세기 1,2 장대로 살고 있어야 한다. 반대로 정말로 죄와 무관하게 살고 있다면 구원 받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말이다.
기독교에서만은 구원의 확신을 살아 있을 때에 가질 수 있다. 다른 모든 종교처럼 죽어봐야 판결이 나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본인만은 구원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생전에 이미 구원을 얻었으니 예수 믿은 후에는 이 땅에서부터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금령을 어겨 범죄하기 전의 모습으로 살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 믿는 것이 단순히 천국 보험증서를 소지하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의 실제 저자
이 일곱 가지 의미를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오늘은 첫 번째로 창조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창세기 1:1은 아무런 부연 설명 없이 아주 일방적 독선적으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사실을 아주 간단히 선포하고 있다. 믿음으로 창조나 진화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뜻이 아니다. 또 믿든지 말든지 순전히 너희 책임이라는 뜻도 아니다.
정작 주목해야 할 사항은 따로 있다. 성경이 “우리는 하나님이 천지와 인간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믿는다. 또 이것을 기독교의 제 1 교리로 삼는다. 그 이유와 근거는 2절 이하에 설명하겠다.”는 식으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는 인간이 고안한 종교 철학 사상 계명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3절)라고 했듯이 하나님이 그렇게 직접 말씀하셨다.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여 인간더러 기록하게 했지만 실제 저자는 하나님이다.
전통적으로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 구약성경의 첫 다섯 책은 모세의 저작으로 보기에 별칭 “토라(모세오경)”으로 불린다. 출애굽과 시내산 율법 수여와 광야 방랑 사건을 이끈 이스라엘 지도자였기에 그만큼 정확히 아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신명기 마지막 부분에 모세의 죽음과 장사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고 모세 저작설을 부인한다. 또 창조를 노아나 아브라함보다 훨씬 후대 인물인 모세가 상세하게 기록했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반발한다.
일부 타당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놓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세상의 어떤 종교 경전은 물론 철학 도서도, 그것도 수천 년 전에 기록한 책들 중에 유일하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이렇게 명료하고도 확정적으로 선언하는 책은 성경을 제외하고는 단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당시 사람이 미개해서 진화와 창조를 분별하지 못했다는 것은 핑계가 되지 못한다. 다윈이 1859년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출간하기 전까지 세상의 어떤 민족도 창조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절대자 신이 있다고 인정했다. 그리스 신화처럼 다신교를 믿더라도 그 신중에 최고의 능력자 제우스가 만물을 창조했다고 여겼다.
그 때까지 모든 사람이 바보였고 다윈만 차원이 다른 최고 천재로 가장 영적으로 신령했다는 뜻이 되는데 이는 말이 안 된다. 다윈 자신부터 진화론에는 해결되어야 할 결정적 과제가 있다고 시인했지 않고 그 과제가 지금도 미해결인 채로 남아 있지 않는가?
조물주(造物主)는 있는 것 같아!
미국에는 장엄하고 신비한 자연경관이 곳곳에 있다. 특별히 그랜드 케년은 그 엄청난 규모 때문에 모두가 처음 보는 순간 입을 쩍 벌리고 한동안 말을 못할 정도다. 불신자도 뭔가 조물주는 있는 것 같다는 고백을 절로 하게 된다. 그 절대적 존재 혹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초월적인 강력한 힘을 떠올리고 잠시 경건해진다. 최소한 그 광대한 크기에 비해 인간이 너무나 왜소하고 무력함을 절감하고 겸손해진다.
시편 19편에서 다윗도 그와 동일한 심정을 피력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의 하신 일을 나타낸다고 했다.(1절) 성경이 창조를 기록하기 이전에 창조된 피조물 자체가 창조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날은 날에게 밤은 밤에게 그 지식을 전한다고 한다.(2절) 본문 8절에서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둘째 날이라고 했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에는 이 땅은 24시간 365일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운행된다는 것이다. 또 그 배경에 절대적이고 완전한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 없어도 그 창조의 지식이 온 땅과 세계 끝에 이른다고 한다.(3-5절) 아담이 창조된 첫날 눈을 뜨자마자 눈앞에 대형 스크린이 쳐져있고 창조를 담은 동영상을 보여준 것이 아니다. 창조를 구태여 기록하지 않아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런 의사소통수단이 없고 심지어 자의식도 없는 하늘마저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한다고 했다.
결국 창세기 1:1은 누가 기록한 셈인가? 다윗의 시편 19:1-6을 한 줄로 줄인 것이다. 다윗이 지었다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가 그랜드 케년을 보고 “조물주가 있는 것 같아”라는 고백을 그대로 받아쓰면 창세기 1:1이 된다. 그랜드 케년이 조물주의 위대함을 드러낸 것이다. 하나님이 그랜드 케년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 고백을 함에 종교적 신념과는 전혀 무관하다. 보통 수준의 상식과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발생적으로 토로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가 어떤 집에 태어나면 부모가 평생을 두고 내가 네 부모라고 확인시켜주지 않는다. 아이는 그런 설명이나 증명 한 번 없어도 부모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출생하고 성장하는 동안에 들리는 소리 하나 없어도 아이에게 부모는 부모다. 부모가 하나에서 열까지 필요한 것 다 공급해주고 처음부터 끝까지 보살펴 주는 사랑 안에 거했기 때문이다.
다윗은 해가 하늘 이 끝에서 나와 저 끝으로 운행하는데 그 따뜻한 온기에서 피해 숨는 자는 없다고 선언했다.(시19:6) 태양 빛이 싫어 어둠을 찾는 자는 하워드 휴즈 같은 정신병자거나 피부암 걸린 자들뿐이다. 부모가 낳고 키워준 은혜를 부인하는 자식은 인간도 아니다.
창세기의 창조 기록이 비논리적인 것 같아 하나님 그분을 의심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다거나 성경을 모른다는 핑계를 댈 수 없다. 신자로서 자격이 없는 것을 넘어서 인간으로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것이다. 부모를 의심하고 거역하면 천벌을 받아 마땅한 패륜아라고 손가락질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자기를 지은 창조주를 외면 대적하면 지옥의 영원한 멸망이 기다림은 너무나 마땅하다.
창조주는 왜 거부하는가?
문제는 그랜드 케년에서 분명히 “조물주(造物主)는 있는 것 같아!”라고 고백해 놓고 왜 기독교의 창조주(創造主)는 부인하는가? 그것도 자기가 기대, 예상, 의식도 못한 사이에 저절로 고백해놓고 그러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아주 간단하다. 그랜드 케년을 만들만큼 엄청난 능력을 가진 절대자가 자기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는 전혀 무력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인도와 보호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 절대자와 자기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거기다 자기가 계획은커녕 상상도 안했고 이해도 안 되는 고난이 수시로 닥친다. 조물주가 일부러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무시하는 것 같으니 자기도 그를 무시하겠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어떤 뜻이 되는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절대로 고난이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질병도 없이 장수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슬픔과 고민으로 괴롭게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결과도 내가 원하는 대로만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범사가 자기 멋대로만 진행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자기를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랜드 케년에서 조물주는 분명히 있는 것 같다고 고백하며 잠시나마 겸손하고 경건해졌는데 사실은 자기를 조물주와 동격화 시키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 삶을 방해하는 것 같아서 믿지 않은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 제 기분대로 살기 위해서 그분을 거역한 것이다.
물론 모든 인간의 삶이 모순, 불합리, 질병, 고난, 죄악 등으로 괴롭고 힘들다. 그런 것들을 없는 세상을 당연히 소망하고 간구해야 한다. 그러나 불신자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아니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인정하지 않는 진리가 하나 있다.
이 땅에 그런 용모, 신장, 성격, 그런 집안, 부모, 형편에, 바로 그 시기에 탄생한 것은 절대로 자기가 작정한 것도 소원한 것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 땅을 이별할 때의 모습도 그렇다. 텔레비전 개그프로에서 우연히 들은 말이다. 계산이 맞아 떨어지는 것은 산수뿐이라고 한다. 학문적 논리 안에서만 계산대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인생은 절대 계산대로 안 된다고 했다.
탄생과 죽음 즉, 자기 인생의 시작과 끝은 그렇다 치자. 그 중간과정은 분명히 자기가 주체가 되어 스스로 판단 결정 시행했었는데도 그 모든 것이 자기 계산대로 되지 않는다고 이구동성으로 동의했다. 자기 인생의 시작, 과정, 끝 모두가 자기 것이 아님을 시인한 셈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경구는 내 인생은 나의 것,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비록 실패해도 내 뜻대로 사는 것이 가장 보람찬 인생이야, 등등이지 않는가?
그럼 인생이 자기 것이 아님을 알고도 끝까지 자기가 주관하겠다고 덤비기에 천하의 바보인가? 결코 아니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 거꾸로 고집하니 천하에 완악한 자다. 천륜을 거역하는 패륜아다. 이 땅에 태어나자마자 내가 숨을 쉬었고, 내가 젖을 먹었고, 내가 움직이고 잠잤다. 그러니까 부모가 내 살아가는데 힘을 보태 준 것 하나 없으니 내 부모가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인간 생존의 기본으로 필요한 것들, 없으면 금방 죽는 것들, 공기 물 햇볕 음식물 등을 인간 스스로 만든 것은 하나도 없다. 계획도 하지 않았지 않는가?
너무나 배타적인 기독교
기독교에선 예수의 십자가 은혜만이 구원의 절대적이고 유일한 길이기에 다른 종교에선 구원이 없다고 선포한다. 사람들로부터 배타적이며 앞뒤가 꽉꽉 막힌 불합리한 종교요 광신자라는 비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종교 간에 서로 인정하고 포용한다는 것 자체가 아예 말이 안 된다. 관용은 같은 차원과 성격일 때에만 가능하다. 가장 무거운 헤비급 선수와 가장 가벼운 플라이급 선수와 권투 시합을 붙이고는 헤비급 선수더러 관용을 베풀라고 말하면 미쳤다고 할 것이다. 동일한 룰로 시행하는 동일한 스포츠 경기임에도 그렇다.
전혀 다른 차원의 사안은 포용, 타협, 조종의 대상이 아니다. 자유 민주와 공산 독재의 공존은 불가능하다. 기독교에선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한다. 불교에선 스스로 진리를 터득하면 생불이 된다고 한다. 이슬람은 최고급 벤즈라도 길 가다 고장나면 알라의 뜻이니 버리고 가라고 한다. 이 세 종교의 하나님은 이름만 다른 동일한 하나님이 절대 아니다.
이웃의 불량 학생이 자기의 순진한 아들을 아무리 괴롭혀도 그 애가 나빠서 그러는 것이 아니니 네가 참고 그를 위해 기도해주라고 가르치는 부모가 있다. 반면에 왜 너는 맨날 맞고 들어오니 힘을 길러 같이 맞붙어 싸워 맞고 다니려면 아예 집에 들어오지도 말라고 닦달하는 부모도 있다. 이 둘은 절대로 같은 부모일 수 없다. 두 부모를 적당히 섞어서 한 부모로 만들 재간은 하나님에게도 없다.
타 종교에는 구원이 없고 예수 십자가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선포에 기독교라는 종교 체계와 교세를 발전 확장시키려는 뜻은 추호도 없다. 예수를 믿는 가장 근본적 의미는 서두에 언급했듯이 타락하기 이전, 창조의 뜻과 목적에 맞게 인간답게 살라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 겸손히 엎드려서 그분의 거룩하고 의로운 통치를 받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부터 되라는 것이다. 종교적 믿음을 갖기 이전에 한 인간이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영위할 것인지 그 실존의 근거와 시발을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바로 세우라는 것이다.
인간이 창안한 종교들에는 타협과 관용과 공생의 여지가 있다. 각기 그 우열을 비교하여 가장 합당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모든 종교에선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모순이라고 비난하는 창세기 기술만큼도 창조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인간의 근원을 전혀 밝혀 놓지 않았다. 자식이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인정하지 않는 꼴이다.
예수 십자가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는 뜻이다.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자는 그 분 외에 다른 하나님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창조주 하나님과 그분의 독생자의 십자가 은혜 외의 구원의 길이 있다고는 아예 꿈도 꾸지 않는다. 또 그래서 다른 종교와의 타협과 관용 또한 아예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라
조물주처럼 세상을 만들어 놓고 인생사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방치하는 그런 존재는 없다. 만약 있다 해도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인간과 아무런 인격적 관계가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다르다. 한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는 것 자체가 그분의 창조에 의해서다. 부모의 육신적 수태의 과정을 거쳐도 그분의 창조다. 창조가 창조과학의 주장대로 일만 년 전이라고 비교적 짧은 지구를 믿든지, 일반 과학자들이 말하는 수십 억 년 전에 있었던지 간에, 신자에겐 창조가 먼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이 땅에 나라는 존재가 이런 모습으로 이 시대에 이곳에 있게 된 것 자체가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창조해서 그렇게 위치해 놓은 것이다. 나의 실존, 나의 나 된 것의 첫째 기초가 하나님의 창조다. 당연히 내 인생을 주관하고 통치하는 이도 그분임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다. 그런 앎이 생기려면 반드시 한 분 뿐인 그분과의 개인적 만남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런 만남이 없이는 예수를 믿고 창조주 하나님을 안다고 해도 사실은 머리로 교리를 수긍한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정말로 일대일로 만나고 싶다면 반드시 그분이 찾아와 만나주신다. 사람마다 만남의 방식과 내용은 각기 다르다. 단 한 명도 같을 수 없다. 성경의 진리를 묵상하면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고 싶다는 소원을 진정으로 아뢰어보라. 예상치도 않았던 순간에 그분이 찾아와서 그분의 살아 역사하심을 절대 부인할 수 없게 해주신다. 다시는 의심치 않게 해주신다.
그분이 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정도만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태중에서 지으셨고 그 이후로 계속 지켜 보호하시다 국 이 자리에 이르게 했음을 시인하게 된다. 과거의 내 인생의 모든 과정이 그분의 선하고 의로운 계획에 따른 인도였음을 깨닫는다. 내가 볼 때는 환난과 실패의 연속처럼 여겨졌어도 그 길이 아니면 당신께로 나아올 수 없었던 필연적이고도 완전한 과정이었음을 알게 된다.
현재도 내 입술의 말은 물론이요 마음의 묵상까지도 그분이 아신다는 사실을 안다. 아는 정도를 넘어서 마음의 소원을 심어주는 이가 바로 그분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나를 그분만의 완전하고 거룩한 계획 가운데로 인도할 것을 확신한다.
그래서 두 번 다시는 세상의 것에 의존 만족하지 않으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분의 품을 벗어나지 않고 오직 그분께 순종하려 헌신한다. 평생의 유일한 소원이 세상에서의 어떤 화려하고 풍성한 출세와 형통보다는 그분의 궁정에서 문지기로 지내는 것으로 바뀐다. 하나님의 품을 벗어나면 기다리는 것은 실패와 절망과 죽음뿐임을 과거의 경험으로 절감했기 때문이다. 살아도 주님 안에서 살고 죽어도 주님 안에서 죽는 인생이다.
혹시라도 옛날 버릇이 도져 세상으로 나가게 되더라도 주님이 강권적으로 역사하여 당신의 품으로 되돌려 놓아달라는 기도가 절로 나오게 된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느니 차라리 고난을 당하는 것이 낫다는 고백이다.
십자가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사실은 현재 신자로서 누리는 특권과 축복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난 이후의 삶에서 정말로 그분의 아름답고 풍성하고 의로움을 체험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왜 진작 예수를 몰랐던지 후회스럽다. 주위에 예수를 몰라 조물주까지는 인정해도 창조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인생들을 보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워진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받고 있는 신자에겐 인생은 계산이 안 된다는 세상 원리는 성립될 수 없다. 신자의 일생은 창조주 하나님의 태초부터의 완벽한 계획 가운데 있다. 인생의 계산은 물론 최종 승리까지 확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한 번 생각해보라. 창조주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분이 매일 새로운 일을 통해 내 속에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고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 사실을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실제 체험으로 알고 있다. 어찌 범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는가? 어찌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평강을 잃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창조의 주체라는 것은 바로 이 은혜와 권능으로 우리를 지금도 붙들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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