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기저귀 - 최원현
딸아이가 출산을 한 달여 앞두고 있다. 아내는 벌써부터 산후조리며 태어날 손주에게 해줄 일들에 정신이 쏠려 있다. 그런 아내를 보며 나도 할아버지가 되는구나 생각을 하니 새삼 세월이 참 빠르구나 느껴진다.
아내가 지금 출산을 앞둔 딸아이를 낳을 무렵 나는 오랫동안 보관 중이던 어머니의 유품을 꺼내놓았었다. 외할머니께서 보관 하셨다 내게 주신 무명베 한 필이었다.
어머니는 다른 동네까지 유명할 만큼 베를 잘 짜셨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가 베틀을 내리는 날쯤 되면 그걸 서로 가져가겠다고 다툴 정도였으며 그렇기에 미리 부탁을 해오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가 베틀에 앉은 기간은 그리 길지 못했단다. 몸져누우신 후 이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 어머니가 짠 무명베인 것이다. 어머니는 당신이 짠 무명베와 모시 베 한 필을 내 몫으로 남기셨으며 외할머니께서 그걸 보관하셨다 내게 주신 것이다. 모시 베는 어느 해 여름 내려갔을 때 반바지와 조끼 비슷한 옷을 만들어 주셨던 것 같고, 무명베는 아이를 낳게 되면 기저귀감으로 쓰라시며 주셨던 것이다. 그걸 아내에게 주어 딸아이의 기저귀감으로 쓰게 한 것이다.
행여 아기의 약한 살에 해로울까 싶어 다시 맑은 물에 여러 번 우려내어 햇볕에 바랬는데 그렇게 하얄 수가 없었다. 적당한 크기로 잘려 빨래 줄에서 나풀대는 양이 운동회 날 하얀 머리띠로 하나 되어 줄다리기를 하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어머니의 솜씨인 무명베 한 필은 당신의 가실 날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알고 한 점 혈육에게 남기신 마지막 당신의 사랑과 정성이었을까. 그 마음을 담아 짠 베라면 결코 당신처럼 짧은 생을 살지 말고 이 베처럼 긴 생을 살라는 기원도 담겨있었을 것 같다. 나와는 만나지도 못하고 태어났다 가버린 형, 그 형을 낳은 산고로 다리에 힘을 잃어 서있기가 힘드셨다는 어머니는 정신력으로 베틀에 앉아 베 짜기에 온 정성을 쏟았으리라. 힘겹게 북을 보내고 받으며 한 올 한 올에 당신의 영혼까지 담았을 무명베는 그 때 그런 어머니가 할 수 있었던 오직 한 가지 일이었을 것 같다.
학교를 졸업한 후 처음 할머니를 찾아뵈었더니 왕골로 짠 뚜껑 있는 둥근 바구니에서 꺼내놓으신 것이 바로 누렇게 색이 바랜 사진 몇 장과 모시 베와 무명베 한 필이었다. 세월이 흘러 어머니가 가신지가 20년이 넘었건만 할머니께선 어머니 솜씨와 사랑 내 베인 이것들을 간직하셨다 내가 철이 들었다 싶자 내놓으신 터였다. 내가 자라는 동안에도 할머니는 수없이 이걸 꺼내어 만져보고 쓰다듬으며 먼저 간 딸과 사위를 생각했을 것이고 그때마다 한 점 혈육으로 남겨진 나를 보며 더욱 애잔해 하셨으리라. 그러면서 행여 좀이라도 슬어 못쓰게 될까봐 살피고 또 살피며 건사하셨을 것이다.
어쩌면 엄마의 사랑이 자식에게 전해지는 본능적인 첫 번째 행위가 젖 물림이라면 인위적으로 해주는 첫 번째의 사랑행위는 기저귀를 채워주는 일이 아닐까.
남자가 그런 일까지 참견하려느냐고 핀잔 받을 게 분명하여 아내의 눈치만 살피면서 잠자코 있기는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많은 게 변했다 하더라도 하얀 기저귀가 바람에 나폴 대며 햇빛을 받는 걸 다시 보고 싶다.
힘들고 지쳐 있던 어느 날 문득 어머니가 그리워져 그 무명베를 꺼내 냄새를 맡아보던 때가 있었다. 특유의 오랜 옷감냄새 속에서 ‘슉삭 철커덕’ 북이 지나고 베 짜는 소리가 들려왔었다.
아내는 내 기대처럼 어디선가 기저귀감을 마련해 올까, 아니면 시대의 흐름 따라 일회용 기저귀로 넘어갈 것인가. 하지만 내 바람은 첫 손주의 탄생과 할아버지가 되는 의식으로 무명 기저귀 깃발을 볼 수 있었음 싶다. 그건 내 어머니, 아버지와 나 그리고 딸아이와 태어날 손주로 이어지는 핏줄의 선언같이 생각되어서이다.
오늘은 베틀에 앉은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며 인터넷으로 ‘무명베’라도 검색해 보아야겠다. 혹시 아내에게 좋은 정보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태어날 손주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는지 바쁘기만 한 아내를 보니 오늘따라 어머니가 더욱 그립다.
수필가. 문학평론가. 한국수필등단 . 한국수필작가회장역임. 수필집 '서서흐르는 강'외 한국수필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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