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씀만 하소서 - 황혜경
삼베옷을 곱게 입은 어머님의 모습을 뵌 지 여덟 달이 지났습니다. 이승과의 마지막을 알리는 대못 박는 소리가 온 세상에 쩡쩡 울렸건만 아직도 고향에 계시는 것만 같은 착각은 당신의 사랑이 그리워서인 것 같습니다.
어머님,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시는 길이 순식간이었다는 사실이 지금도 풀 수 없는 영원한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쉽게 주무시듯 떠날 수 가 있습니까. 이 세상의 미련을 어찌 두고 가신단 말입니까. 삶과 죽음의 끝이 단지 고개를 떨구는 순간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몇 번이고 어머님의 얼굴을 만지고 부벼도 채 식지 않은 체온 때문인지 영안실로 가실 때까지도 뭐가 뭔지 현실을 이해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금방 제 이름을 부르며 찾아오실 것만 같아 문에 귀를 기울인답니다.
행여 밸브를 잠그지 않을까 싶어 맞춤법도 다 틀린 글씨로 주의사항을 적어 벽에 붙여 놓은 것과 문단속 잘하고 밤늦게 다니지 말라고 하시던 어머님의 따뜻한 사랑이 곳곳에 메아리로 남아 있습니다.
언제나 어머니의 기도소리로 아침을 열고 저녁 기도소리로 하루를 마감하시던 어머님의 기도가 하늘에 닿아 저는 루치아로, 훈학이는 베르나르도 멘톤으로, 수정이는 아녜스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꽃피는 삼월에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첫 영성체를 모시고 나오면서 그 은혜 이루 말할 수가 없었고 다만 어머님 살아 생전에 그 영광을 드리지 못해 후회가 가슴을 적셨습니다.
이제 거룩한 성전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 어머니의 기도소리를 들은 듯 기쁘고 성가가 은은히 울려 퍼지면 영혼이 하늘에 닿아 가슴이 두근거리고, 또 영성체를 모시고 나오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뵈면 꼭 어머님의 얼굴을 뵙는 것 같아 하염없이 눈물이 나온답니다.
어머님, 지난여름 아녜스가 비석 옆에 백합꽃을 놓고 그 옆에 성모상을 모셔 놓고 왔는데 무척 좋으셨지요? 고통이 몰려 올 때마다 성모님을 부르시던 음성이 귓가에 생생히 들려 옵니다. 지금은 성모님의 사랑으로 그 고통 다 잊으시고 평온하게 잘 계시다고 한 말씀만 하소서. 새가 되어 온 세상을 훨훨 날고 싶다던 소원을 이루셨는지 한 말씀만 하소서. 그리고 어머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사람을 다 용서 하셨는지 한 말씀만 들려주소서.
어머니, 큰손자 결혼시켜 사는 것보고 생을 마감하고 싶다며 하느님께 무수히 기도하시던 어머님의 사랑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 얼굴 많이 봐두라며 내 얼굴에 한없이 부비시던 어머님의 체온이 너무도 그립습니다.
어머니, 지난 추석에 어머님을 뵈려 갔을 때 벌 한 마리가 제 곁을 맴돌았는데 어머님의 혼령이었던가요. 저는 꽃이 되고 어머님은 벌이되어 저를 찾으신 건가요. 그렇게도 꽃을 좋아하시더니 벌이되어 이 세상을 날아 다니신다 생각하니 제 마음이 흐믓했습니다 . 이 세상의 고통 다 잊으시고 하늘 나라에서는 꼭 행복 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같은 날 어머님의 곁으로 요셉이라는 친구 분이 오셨으니 외롭게 지내지 마시고 여행도 다니고 재미있게 지내십시오. 살아 생전에는 우리들 보살피느라고 여행 한번 제대로 못하고 항상 고달픈 삶을 사셨기에 제 마음이 더 아프답니다.
오늘도 방안을 치우다가 어머님의 메모지를 발견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속이 아파 죽을 끓이면서도 생각나고 옷 정리를 하면서도 문득문득 그리워집니다. 또 감당할 수 없는 외로움과 고통을 잊기 위해 혼신을 다해 조랑박에 그려 놓은 환상적인 그림을 보면 항상 우리 곁에 계시는 것처럼 마음이 든든합니다. 신세 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신 박 공예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사랑으로 남아 있을 겁니다.
병상에서도 늘 단정한 모습으로 하느님을 뵙던 어머님, 주말마다 내려가 뵈도 벌써 가느냐고 손을 놓지 않으셨던 어머님, 세면장에 들어가면 혼자 어찌 살라고 목놓아 울다가도 내가 나오면 금방 웃는 얼굴을 보여 주시던 어머님과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못한 것이 가슴 아픕니다.
스물다섯의 고운 나이에 청상이 되어 사십 칠 년을 기다리다 가슴이 까맣게 타버린 어머님께서 지금쯤은 아버님을 만나 행복하다고 한 말씀만 하소서. 이승에서 쏟아 놓지 못한 아버님에 대한 원망을 다 풀었는지 한 말씀만 하소서. 세상의 미련 다 버리셨다고 한 말씀만 하소서. 그리고, 그리고 이 불효 자식을 용서한다고 한 말씀만 하소서. 한 말씀만 하소서.
수필가. 전남영암출생. 한국수필로 등단. 한국수필문학상. 수필집 '시집살이 한번 시텨볼까'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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