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집 - 이진화
검은 리무진 영구차가 마을 어귀에 들어서니 온 동네 사람들이 눈물로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어버지의 마지막 집(유택)을 향하여 화려한 꽃상여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만장이 펄럭이고 상여꾼들의 소리가 구성지게 작은 고을에 퍼져 나갔다. 개울가 과수원에는 탐스런 사과 열매가 시월의 햇살에 반짝이고 맑은 하늘아래 산의 능선들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일명 묵방, 서당골로 불리우는 경북 군위군 효령면 중구동이 아버지와 나의 원적지이다.
아버지께는 유년의 추억이 어린 꿈에도 못잊을 고향이요, 내게는 아버지께서 은퇴 후 귀향하여 노후를 보내신 마음의 고향이다. 그리 비옥한 땅이나 너른 들판도 없는 산골 마을에서 아버지는 매실나무를 가꾸면서 삼 년여 세월을 지내셨다. 거의 홀로 보내신 그 시간들이 나에게는 가슴에 대못을 박는 듯한 아린기억으로 남아있다.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간 옛집을 다시 사서 새로 집을 짓고 칩거하시는 동안, 많은 친지들의 염려와 부러움의 시선으로 아버지의 노년을 지켜보았다. 평생동안 세계가 좁다하고 활동하시던 분이 과연 시골의 적막한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까, 어떻게 서울의 큰 살림과 깊은 교분을 단숨에 뒤로하고 초야에 묻혀 욕심없이 살아갈 수 있는 걸까. 그러나 그 모든 기우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고향집에 묵묵히 머무셨다. 상여가 집 앞에 이르자 일가 친척과 마을 사람들의 통곡 소리가 높아졌다. 상여도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듯 주인 잃은 집 앞에서 주춤거렸다. 나는 장례행렬에서 뒤처져 집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마을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가다 가파른 산길로 접어드는 상여를 뒤로 하고 아버지의 숨결이 아직도 감도는 듯한 집으로 들어섰다. 몇 달간 비어있던 집은 빈 집 특유의 황량함으로 내 마음을 서늘하게 했다. 다용도실에는 아버지의 고독을 말없이 담아낸 빈 술병들이 늘어서 있고 , 벽에는 커다란 가족 사진이 무심하게 걸려 있다. 빈 집에 걸린 사진이 주는 느낌은 언제나 쓸쓸하다. 화면 속의 사람들은 다 어디 가고 호흡없는 모습들만 비어 있는 집을 지키고 있는가. 많은 시간 집을 떠나 사신 아버지의 집에 대한 사연은 직업과의 관계로 보나 개인적으로 보나 무척 남다르다. 아버지께서 고향집을 떠난 것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부터이고, 은퇴하여 귀향하실 때까지 오십 년 동안 고향 집은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6.25전쟁 후 어머니와의 결혼 생활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셋방살이로 이어졌다. 초급장교와 공무원의 신분은 경제적 여유와는 항상 거리가 멀었다. 중앙정부의 3급 공무원이 처음으로 가진 집은 한남동 산기슭의 방 한 칸, 부엌한 칸짜리 블록 집이었다. 그때 맏이인 나는 초등학교 삼학년 이었다. 집앞에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둘레에 숲이 우거진 보금자리에는 바가지 우물이 정겹게 솟아나고 있었다. 그런 그 집은 수해와 철거의 모진 수난 끝에 영영 사라져 버렸다. 훗날 아버지가 주택공사 부사장으로 재직하실 때, 한남동에서 상계동으로 집단 이주되었던 철거민들이 상계동의 아파트 단지 개발로 다시 밀려나게 되었다. 주택공사로 몰려 온 철거대상자들 중에는 한남동 시절의 한 동네 살던 아저씨와 아주머니도 끼어 있었다. 책임자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과격한 단체행동도 불사하던 그들이 같은 처지로 집단 이주되었던 부사장의 정중한 면담에 만족한 협상 결과를 가지고 돌아갔다. 아버지 명의의 두 번째 집은 서울 속의 오지였던 목동에 지어졌다. 산을 깎아 택지를 만든 그곳은 온통 진흙 밭이었다. 주택은행에서 이십 년 상환조건으로 칠십만 원을 융자받아 지은 옥색 타일 집은 바닥 면적이 십팔 평 정도인 아담한 집이었다. 공사비가 모자라서 짓다 말다 하며 결국 미완성으로 끝나 버린 집에는 끝내 담장을 치지 못했다. 산기슭을 한 바퀴 돌거나 산 허리를 질러서 넘어야 하는 동네는 큰길까지의 거리가 멀고 너무 외져서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그렇게 어렵사리 마련한 집도 칠 년간이나 주인없이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해외 건설관으로 외국 공관에 근무하시게 된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와 동생들이 모두 출국하게 되었다. 대학입시 때문에 혼자 남은 나는 친척집에 머물렀고, 이층 끝방에 두고 간 짐을 넣고는 그 외의 방을 낯선 사람들에게 빌려 주었다. 나는 수업을 마친 후에 가끔씩 집에 찾아가 우두커니 빈 방에 앉았다 돌아가곤 하였다. 재잘되는 세 남동생의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맴도는 그곳은 무려 칠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비어있었다. 내가 대학교 사학년이 되어서야 아버지는 돌아오셨고 성년이 된 나는 그 이듬해에 결혼하면서 집을 떠났다. 입시생인 막내동생의 성화에 못이겨 도심으로 이주를 하려 하였지만 아버지는 일 곱 번씩이나 아파트 입주권을 놓치셨고, 주변에 목동 신시가지가 개발된다는 것을 끝까지 함구한 채 정든 집을 헐값에 파셨다. 그때 아버지는 건설부 주택국장이라는 요직에 근무하고 계셨다. 여러 가지 주택 건설에 관한 직함을 가졌고, "UN 무주택자를 위한 특별위원회"의 일을 맡아 보셨던 아버지는 편안하고 호사스런 집과는 유별나게 거리를 두고 사셨다. 그래서 일까. 삼우제를 지내러 산에 올라보니 아버지의 산소도 생전의 아버지의 성격과 집을 닮아 있었다. 인적이 없는 외딴 봉우리 근처에 솔숲과 바위에 둘러쌓여 오두마니 앉은 산소는 아버지의 모습을 직접 뵙는 듯 했다. 감벌을 위해 겨우 난 길을 따라 가파르게 오르는 산길에는 한줄기 바람 외에는 벗할 것도 없었다. 큰 비석도 세우지 말고 비석에 갓도 올리지 말고 작은 이력비나 문패 삼아 세우라 하신 유언이 있었다고 하자, 집안 어른들이 그럴 수는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셨다. 한평생 나라 위해 일하고 노후에는 종친회와 고향 마을에 큰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신 분이 겨우 20cm * 50cm 짜리 이력비라니 있을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사관 이상의 관직에 계셨으므로 비석에 갓을 씌워도 마땅하지만 고인이 요란한 것을 싫어하셨으니 과장되지 않게 비석이라도 세워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 자리에 계셨으면 “쓸데없는 소리!”하고 일갈하셨을 아버지는 이제 아무 말없이 누워 계신다. 삼일 탈상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추모의 정을 접으며 굴건 제복과 상복을 불에 태웠다. 젖은 옷을 태우는 연기로 눈앞이 뽀얗게 흐려지며 눈물이 솟구쳤고 아버지의 유택 둥근 봉분 위로는 솔빛 가을비가 촉촉이 젖어들고 있었다. 수필가. 한국수필로 등단. 한국수필 작가회회장 역임 . 수필집 '아버지의 집' 한국수필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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