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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 - 김윤희

Joyfule 2013. 9. 5. 08:20

 

 물길 - 김윤희

 

아이들과 함께 도착한 곳은 펄이었다. 썰물 뒤 드러난 갯벌이 생명체가 꿈틀꿈틀 살아 숨 쉬는 곳이라면, 이곳은 온통 진흙을 뒤집어쓰고 널브러져 호흡이 일시 정지된 곳이다. 비교적 풍토가 온화하여 큰 재해도 없었고 살기가 좋아 생거진천이라 불리는 내 고향은 지난여름 유래 없이 집중 폭우를 맞았다. 여기서 태어나서 자란 내가 처음 맞닥뜨린 엄청난 수해였다. 남편은 비상근무로 연일 수해 복구 현장에 투입되었고 남은 가족들도 아이 친구네 가족들과 함께 피해 지역을 찾아 나섰다.


우리가 찾아든 곳은 시장을 끼고 둘러앉은 마을이다. 지대가 좀 낮은 탓도 있지만 소화불량에 꾸르륵거리던 하수도가 양동이로 들이붓듯 쏟아지는 장대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기어이 꾸역꾸역 토악질을 해대어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곳이다.
공무원들이 한 차례 다녀 간 뒤라 질서는 대충 잡혔다고 하나 곳곳에는 물에 젖어 못쓰게 된 가재도구들이 대문 밖에 산처럼 쌓여 있다. 질척이는 골목에 접어드니 종종걸음으로 대문을 드나들며 집 치우기에 여념이 없던 아주머니가 반색을 하신다.


따라 나선 아이들은 텔레비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현실 앞에서 처음에는 무엇부터 해야 할지 엉거주춤 서 있더니 이내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아냈다. 갯벌에서처럼 진흙이 발바닥에 끈적이며 달라붙어 걸음 옮기기가 힘이 들 터인데도 잡동사니들을 열심히 내다 버린다. 그 다음은 방에 호스로 물을 뿌려대며 빗자루로 쓸고 쓰레받기로 물을 퍼내는 일을 제법 진지하게 해낸다.

예로부터 물 있는 곳에 사람 있고, 사람 있는 곳에 물이 있다 하였듯이 사람들은 물과 불가분의 관계로 살아 왔다. 물은 그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유유히 흐르는 순한 것으로 보기 십상이다. ‘수수기지방원(隨水器之方圓)’이라는 말이 있듯이 어떤 그릇에 담든 그 모양대로 어떤 환경에서도 능히 적응을 하면서도 결코 본성을 잃지 않는다.
물은 흘러내리는 속성을 가졌다지만 어쩌면 솟아오르는 것이 본성인지도 모르겠다. 깊은 산 속에서 퐁퐁 솟아나는 옹달샘 물을 보아도 그렇고, 수돗물 이전에 사용하던 우물물을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 그렇게 제 성깔대로 솟아올라 나름대로 길을 내며 흘러내린다. 그리고 계곡물도 개울물도 끌어들여 내를 만들고 강을 이뤄 바다로 영역을 넓혀 가며 끝없이 순환한다. 스스로를 다스려 가며 가만가만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시자(尸子)의 군치(君治)편에 의하면 물에는 인(仁), 의(義), 용(勇), 지(智) 네 가지 덕이 있다고 했다.
이 땅의 모든 자연물을 깨끗하게 씻어주고 만물을 통하여 흐르게 하는 것을 인(仁)의 덕목이라 하였다. 맑은 것을 추구하고 탁한 것을 꺼리며 찌꺼기와 더러운 것을 쓸어버리는 것이 의(義)이다.
부드러우나 범하기 어렵고 약하지만 강한 것을 능히 이기니 용(勇)이라 하였고, 강으로 흘러 바다로 나아감에 나쁜 것을 포용하고 있으나 그 흐름이 겸손하니 이를 지(智)의 덕목으로 꼽았다. 이러한 덕목들은 인간 본성과도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물이든 사람이든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길들이고 교육되어야 함을 아울러 가르치는 것이리라.

강원도 한 지역을 완전히 휩쓸었던 물난리는 사람들이 자연의 순리를 거스른 탓이다. 구불구불 자연스레 흐르던 물길을 인간들이 일방적인 편의를 위해 둑을 쌓고, 그 아래 넓은 들과 마을을 만들어 이용하느라 마음대로 물길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반듯하고 시원스럽게 뚫어 겉모습은 제법 그럴 듯해 보이지만 숨 돌릴 겨를도 없는 그 길을 끝없이 흘러야 하는 물은 호시탐탐 일탈만을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물이 흐르는 속성을 가졌다고 해서 언제나 똑바른 길을 쉼 없이 그렇게 흐르고만 싶었겠는가. 때로는 숨 가쁘게 여울을 지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여울목 지나 한가로이 소(沼)에 머물면서 쉬고도 싶었을 게다. 구불구불 천천히, 또는 휘돌아 치며 그렇게 흐르고 싶은 마음을 자작자작 눌러 왔는지도 모른다. 그런 물길을 사람들은 끊임없이 너무 멋대로 휘둘러 왔다. 물은 인위적인 그 산물들을 모조리 삼켜 버릴 듯 성을 내며 휩쓸어 덮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위에 반항하듯 생긴 물길, 그것은 놀랍게도 개발되기 이전에 있었던 원래의 물길, 그것이었단다. 결국 제 길을 찾아 권리를 주장하듯 당당히 흐르고 있더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혹, 엄마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의 갈 길을 잘못 건드리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직은 볼 빛이 뽀얗고 투명한 아이들 얼굴에 많은 것을 얻어 가는 듯 마냥 행복한 웃음이 햇살처럼 부서지고 있다. 눅눅했던 내 마음이 덩달아 보송해지고 있다.

- 김윤희 수필집 ' 순간이 둥지를 틀다 '/2011년 12월 선우미디어 출간,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