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가비’ 한 잔에 담긴 고뇌와 사랑 - 이경담
고요하게 내다보는 곳, 정관헌(靜觀軒)에 섰다. 궁궐 후원은 인적이 드물고 나무들은 아직 봄빛을 감춘 채 선뜻선뜻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사리고 있었다. 오늘은 평화의 시대인가. 삼월 오후 햇살이 부드러웠다. 펄펄 넘치는 힘을 가지고 날뛰던 강대국들의 틈바귀에서 풍전등화(風前燈火)가 된 국운에 맞선 국왕 고종은 궁궐 한켠에 지은 한적한 정관헌에서 가비(加比, 커피의 한자표기)를 즐겨 마셨다.
“나는 가비의 쓴맛이 좋다. 왕이 되고부터 무얼 먹어도 쓴맛이 났다. 헌데 가비의 쓴맛은 오히려 달게 느껴지는구나.”
위기에 처한 나라에서 겪는 무력한 통치자, 고종의 고뇌와 고독이 깊이 배어나는 대사이다.
영화 ‘가비’는 한국 근대사의 혼란기인 1896년 아관파천 시기부터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 사이를 배경으로 ‘커피’와 ‘고종’을 둘러싼 음모와 사랑을 그렸다. 명성황후가 처참하게 시해를 당한 후 고종(박희순)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고 시시각각 조여 들며 강대국들의 각축장(角逐場)이 되어버린 조선을 다시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기울인다.
아픈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삶은 아플 수밖에 없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아무런 보호도 없는 채 부평초가 되어 표류하기 마련이다. 정의로운 사람들은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 어린 자식들은 부모를 잃고 굶주리며 젊은이들은 피를 흘리고 상처를 입는다. 조선의 역관인 아버지와 함께 러시아에서 살며 일찍이 가비 향을 맡으며 자란 따냐(김소연), 아버지는 일본의 음해로 칼을 맞아 숨을 거두며 일리치(주진모)에게 어린 따냐를 부탁한다. 러시아를 무대로 굴곡진 삶을 영위(營爲)해오던 두 사람은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에 목숨을 구해준, 조선의 딸이나 뼛속까지 일본인이 된 사다꼬(유선)에게 운명이 맡겨진다. 이국을 떠돌던 세 젊은 남녀는 조국 조선 땅으로 돌아와 ‘고종암살작전’에 투입된다. 조선 최초 바리스타 따냐는 러시아 상류층의 비호를 받으며 궁궐로 들어가고 최고 저격수 일리치는 따냐를 지켜주기 위해 사카모토라는 이름으로 잠입하여 사다꼬의 지시를 따른다.
조선을 집어 삼키려는 열강들의 숨막히는 외교전과 위협 속에서 사면초가(四面楚歌)인 고종은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고심한다. 바리스타 신분으로 왕의 시중을 들게 된 따냐는 백성과 나라를 사랑하며 고뇌하고 아파하는 고종의 진실함과 외로움을 보며 마음이 움직인다. 하지만 의심을 떨치지 못하는 왕이 “나에게서 무엇을 빼앗으려고 하느냐?”라며 경계심을 나타내자 따냐는 당돌하게도 “그토록 뺏기시고 아직 더 내어줄게 있으십니까?”라며 왕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는다. 따냐는 “저를 이용하십시오. 전하의 눈과 귀가 되어드리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점차 왕에게 이끌리는 그녀의 마음을 드러낸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고 연인 일리치와의 재회를 위하여 조선을 버리고 명령에 따르던 따냐의 가슴에 조국이 살아난 것이다.
사그라지는 희미한 등불과 같은 조선에게 미래가 올까.
“사는 게 죽는 것보다 치욕스럽다 해도 나는 살 것이다.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만들어 황제가 될 것이다.”
대한제국을 꿈꾸며 마지막 승부수를 준비하는 고종의 고민은 깊어갔고 처절하게 고독 속에서 홀로 시대와 맞싸워야 했다. 외로운 왕에게 가비는 어떤 의미였을까. 뜨거운 물을 부어내리는 동안 은은한 향을 내면서 서서히 퍼져가는 가비의 고소한 향에 잠시나마 모든 고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던 것일까. 가비의 쓰고 진한 맛이 왕의 고통을 뛰어넘어 통증을 잊게 했을지 모른다. 실내 가득 향이 퍼져가는 가운데 가비가 만들어지고 잔에 따라진 다음, 왕은 잔을 들어 올려 향을 맡으며 한모금 맛을 음미한다. 지극히 편안한 순간이다.
“가비는 맛이 쓰고 진해서 독을 타는 데 이용되기도 합니다.”
따냐의 은근한 암시는 간곡하다. 가슴에 조국을 품게 된 따냐는 왕을 독살로부터 구하고 쫓기는 처지가 되었으며, 무기를 구입하는 의병들을 일망타진하려고 파견된 일리치는 일본을 배신하고 의병 편에서 싸우게 된다. 젊은이들이 제자리를 찾아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기자리 찾기는 그들에게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일이다. 일리치의 맹활약으로 의병들은 무기를 손에 넣고 적을 무너뜨린다. 백성들은 용기백배했으며 기회를 잡은 고종은 드디어 대한제국 건립을 선포하고 황제가 된다. 적의 추적을 막기 위해 제 몸을 희생한 일리치, 간신히 배에 오른 따냐. 사랑하는 두 남녀의 생사가 갈린다. 따냐의 절규 속에 배는 떠난다.
영화를 보고나서 발길이 경운궁으로 향했다. 궁궐 후원 언덕에 자리 잡은 서양식 건물 정관헌에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다. 연하면서도 강렬한 가비 향이 이미 사라진 사람들의 혼령처럼 주변을 휘감고 있는 듯했다. 혹독했던 시절에는 뜨거운 커피 한 잔에 담긴 사연도 아프기만 하다. 시대에 걸맞지 않은 호사스런 취향 정도로 알았던 고종의 커피 애호가 눈물겹게 다가온다. 커피에 담긴 서글픈 역사와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애틋한 이야기가 은은한 향기 속에 아른거린다.
“한 남자에게 가비는 사랑이다. 또 다른 한 남자의 가비는 제국의 꿈이다.”
어느 땅에선가 따냐는 고요히 가비를 내리며 마지막 대사를 읊는다.
2012.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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