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도는 ‘라트미안’(Latmian) 만의 남부 해안에서 불쑥 나와 있는 갑(岬소)에 위치한다. 아시아 서부 해안에 있는 이오니안 성읍들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다. 소아시아 서쪽의 출구역할을 하는 항구도시로 지금까지 유명한 관광지의 명성을 유지하는 곳이다. 바울이 1차 선교 여행의 귀환 때 들린 곳이다. 빌립보에서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승선한 배는 밀레도에 기항하였다(행20:15). 여기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만나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행20:15). 디모데후서 4장 20절의 언급은 밀레도에 대한 또 다른 바울의 방문을 언급한다. 바울은 분명 여행 중에 밀레도를 통과하거나 혹은 그 근처를 지났을 것이라고 추측할수 있으며, 거기에 ‘드라비모’를 남겨 놓았다. B.C. 8C, 흑해 지역에 많은 식민지들을 세웠으며 이집트와도 교역했다. B.C. 608, 이집트 왕 바로 느고는 므깃도 전투에서 승리한 후 밀레도 사람들의 신전에서 제사를 드리기도 했다(왕하 23:29, 대하 35:20).
밀레도의 역사를 보면 헬라 이전의 이름을 지닌 도시 밀레도는 선사 시대 때에 아마도 해안의 선적을 위한 안전한 정류지로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밀레도는 최초로 미노안 확장 시기에 그레데인들에 의해서 식민지화 되었다가 나중에 미케네 헬라 인들에의해 넘겨져 B.C. 14C에 요새화 된 도시이다. B.C. 1200경, 혼란으로 인해 멸망되었으나, 헬라인들이 밀레도를 포기하지 않았고 후에는 ‘이오니안’(Ionian) 이주자들에 의해서 보강되었다. B.C. 7C에는 이오니안 해양 사업의 선도적인 중심지로 출현했다. B.C. 499, 밀레도 인들은 해양 사업의 경쟁국인 ‘리디아’(Lydia)왕국의 확장에 저항하였고, 이오니안의 반역이 시작되었다. B.C. 494, 성읍이 파괴되고 신전은 약탈당해 소실되었다. B.C. 334, 알렉산더는 밀레도를 정복하였다. 이 때는 밀레도의거대한 도시 건축물이 재건되는 시기였다. 일부 헬라 왕들은 기념비적인 건축 계획을 후원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로마 제국의 시기는 밀레도의 증대되는 번영과 거래를 의미하였다. 이러한 번영에도 불구하고 밀레도는 상업적으로 몰락하게 되었는데, 이 멸망의 위협은 지역 사업의 부족에서라기보다는 항구의 침전물 때문이었다. 결국 밀레도의 규모는 줄어들게 되었고, 오늘날 밀레도는 폐허로 남아있다. 밀레도는 그 지리적 위치로 인해 상업 및 교역의 중심지로 번창했다. ‘라트미안’ 만의 지질학적 위치는 메안더 강의 침전물 축적으로 인해 밀레도의 부단한 변화를 가져왔다. 오늘날 이 만은 내륙의 호수이고, 한때 항구를 보호하였던 ‘라데’(Lade) 섬은 소택지의 충적 평원으로 둘러싸여 있는 언덕이 되었다. 침전물로 인해 항구이 메워져서 물의 흐름이 변하였다. B.C. 7C 밀레도는 그리스 예술과 철학의 중심지였다. 그 시기 가장 중요한 헬라의 지성들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 최초의 그리스 철학자인 ‘탈레스’, 초기 진화론자 ‘아낙시더만’이 있다. 또한 연대 기자인 ‘헤카타에우스’의 고향이기도 하다. 밀레도 성읍은 최초로 동전을 주조한 성읍이기도 하다. 밀레도의 유적지들은 해안에서 약 10km 정도 떨어져 있다. 밀레도의 가장 훌륭한 조각품과 건축물들은 밀레도 남쪽 약 20km 떨어진 ‘디디마’(Didyma)에 있는데, 이는 ‘아폴로’(Apollo) 신전의 신탁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델페니온’(Delphinion, 아폴로 신전), ‘아고라’(Agora, 시장), ‘세라페움’(Serapeum, 세라리스 신의 신전), ‘파우스티나’(Faustina) 여황에게 헌증된 목욕탕, 연극장, ‘아테나’(Athena) 신전등이 유적 및 건축물로 남아 있다. 이곳의 모직 제품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루스드라’는 평야지대의 구릉에 위치한 소아시아의 중요 도시였으나, 지금은 작은 마을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하투사라이’에서 오른쪽으로 4km 떨어져 있는 계곡의 구릉지대에 있다. 루스드라는 32km 떨어진 이고니온과 96km 떨어진 더베를 연결하는 도로에 위치하였으며 디모데의 고향이다. 그 위치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1885년 ‘스테렛’(J.R.Sterrett)이라고 하는 지리학자는 루스드라의 위치를 루가오니아 지역의 이고니온에서 약 29km 떨어진 터키의 마을 ‘하툰사라이'(Hatum Sarai : 숙녀의 저택) 북쪽, 커다란 언덕으로 보았다. 요즈음 터키 현지의 하툰사라이 지역에서는 2km 정도 떨어진 곳에 교회 터가 남아 있는 휘위귀 마을을 루스드라로 보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더베에서 루스드라가 90km이상 떨어져 있기에 이고니온 남쪽에 1001개 교회가 있는 지역인 마덴세히르(Madenshir)로 주장하기도 한다. 루스드라는 ‘아나톨리아’의 ‘소금 호수’의 남서쪽에 있었던 평원, 루가오니아에 있는 고대 유적지이다. A.C. 6,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비시디아 안디옥과 함께 루스드라를 로마의 식민지로 지정하였다. 고대 역사에 있어서 루스드라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도시였다. 루스드라는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시대에 들어와서 농경 정착지로만 존재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유적 구릉들에 의해 식별되는 인접한 다른 초기의 많은 촌락들과 비슷한 것이었다. 페르시아인들과 희랍인들이 지배하던 시대의 루스드라의 흥망성쇠는 루가오니아지방에 관한 일반적인 언급들로부터 추측될 수 있는데 루가오니아는 처음에는 셀류커스 왕조에, 그 다음에는 아칼루스 왕조에, 마지막으로 모라인에게 복속되었다. A.C. 6,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비시디아 안디옥과 함께 루스드라를 로마의 식민지로 지정하였다. 루스드라의 후대 역사는 더베의 역사와 유사하다. 이 두 도성은 로마에 복속된 왕 ‘코마게네’의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 후 ‘아트니누스 피우스’는 이 두 도성을 길리기아에 편입시켰다. 이 유적지의 후기 역사는 모호하다. 루스드라 주교들의 이름을 수록한 명판들만 남아 있다. 이 지역은 두 개의 커다란 강이 교차하는 후미진 곳이다. 따라서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헬레니즘의 루스드라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다. 루스드라의 유적지는 1820년에 발굴하였는데, ‘하툰사라이’에서 약간 북쪽으로 떨어진 구릉지대라고 불 수 있다. ‘졸데다’ 또는 ‘조르들라 휘이크’등으로 다양하게 언급된 이 구릉은 B.C. 3000까지 그 연대가 소급되는 지층들을 지닌 곳으로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요즈음의 루스드라라고 하는 희귀 마을은 마을 전체가 양을 치는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는 시골이며, 외지의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 한적한 곳이다. 이 마을에는 초대 교회 때, 교회로 사용했던 두 군데의 동굴 교회가 있다.
루스드라에 온 바울은 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하는 앉은뱅이를 보고 그에게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그에게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하여 고쳐준 표적이 나타났다(행14:8). 바울은 더베와 루스드라를 두 번째 방문하면서 길리기아 관문을 거쳐서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이 길을 따라 여행했을 것이다(행16:1).
암비볼리(Amphipolis)
빌립보 남서쪽 약 53km 지점에 있는 도시로서 B.C167-146년 무렵에는 마게도냐 북부지방의 수도였다. 이곳은 빌립보 지방보다 크고 요충지(要衝地)였으나 바울일행은 단지 지나가는 정도로 그친다. 아볼로니아(Apollonia)암비볼리에서 약 43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이 곳은 갈라디아에 있는 '아볼로니아'와는 다른 곳이다. 데살로니가 데살로니가는 데르마 만의 갑(岬)에 위치한 부산한 항구도시였다. 데살로니가 성읍은 유명한 에그나티아 가도와 북쪽으로 다뉴브에 이르는 대로를 연결하는 지점에 위치한 중요한 성읍으로서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였다. 그 성읍의 인구는 20만 명에 이르렀고, 마게도냐의 최대 도시였다. 주전 167년 마게도냐가 로마에 패하면서 수도가 암비볼리(Amphipolis)로 되었다가 주전 146년부터 데살로니가가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가 되었다. 이곳은 아볼로니아 남서쪽 64km지점이며 데르마이크만(Thermaic Gulf)에 위치해 전략적 요충지였고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였다. 데살로니가(Thessalonica)는 마게도냐 내륙의 풍요로운 농경지를 동쪽에 있는 육로와 해로에 연결시켜 주었다. 그래서 키케로(Cicero, B.C.106-43)는 이곳을 '우리 영토의 심장부'라고 했다. 이 도시는 B.C.42년 빌립보 부근의 싸움에서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에게 가담했기 때문에 자유시(Civitaslibera)의 특권이 주어졌다. 또 데살로니가는 인구 약 20만의 도시로 정치, 경제의 중심지여서 자연히 많은 사람들로 붐볐으며 유대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살전2:14-16).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이곳을 발칸 반도 전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보았다(살전1:7,8). 그러므로 그들은 빌립보에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에서 160여km나 떨어져 있는 이 도시에 사력을 다하여 들어왔던 것이다(R.N.Longenecker).
'━━ 보관 자료 ━━ > 聖地巡禮'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버가 / (0) | 2006.06.28 |
---|---|
이고니온(터키 콘야) (0) | 2006.06.28 |
마사다 (0) | 2006.06.28 |
나사렛 (0) | 2006.06.28 |
다메섹 바울기념교회, (0) | 2006.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