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가득한 잔주름 사이사이에
여전한 지성의 깊이와 야성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일흔 다섯 세월로 엮은 이 작품은,
젊은 감독의 창의력과 생기와 재능만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생에 대한 철학적인 관조와 생 저너머의 세계까지 소통코자
애쓰는 최후의 에너지인 무력한 냉소에까지 이르고 있다.
링 위에서 혼신을 다해 싸우다 툭 터져 찢어진
한 흑인선수의 광대뼈 바로 위의 상처를 지혈하며 나오는 멘트
'때로는 상처가 너무 깊어 뼈까지 이를 때, 피를 멈출 수가 없다.'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시골 깡촌에서 자라나 아버지를 잃고 도시로 나와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복싱선수를 꿈꾸는 서른 한 살의 아가씨 매기와 아내와 딸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소원해진 지혈사이자 복싱 트레이너인 노년의 프랭키와의 애틋하지 않을 수 없는
만남으로 관계를 엮어간다. 허름한 체육관 안은 한 때 스폿라이트를 받으며
타이틀전까지 도전했다가 부상으로 한쪽 안구를 잃게 된 늙은 복서가 관리를
맡고 있고, 왼손훅은 세지만 인간성이 안좋은 어떤 선수, 어느 날 갑자기
부모에게 버림받고 굴러들어온 어리버리한 복싱지망생,
그리고 최상의 실력까지 탄탄히 이르렀지만 타이틀전에 내보내지 않는
프랭키의 신중함에 지쳐 떠난 복서, 허락도 없이 6개월치 회비를 먼저 내놓고
무조건 샌드백을 쳐대는 매기와, 예이츠의 시를 즐겨읽고 빠짐없이 성당에
나가 미사를 드리고 무정하고 형식적인 신부의 충고를 거부하지 않으며
매주일 반송되면서도 딸에게 보낼 편지를 쓰는 프랭키가 선택하며 갈등하며
희망하며 함께 숨쉬고 뛰고 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란 아마도 '말아톤'의 초원이가 일컫는 '백만불짜리 다리'와
비슷한 의미일 게다. 그리고 이 영화 속에서 프랭키가 매기에게 지어준 게일어 별명
'모쿠 슈라'(나의 소중한, 나의 아기)의 미국식 별명일 것이다.
안구를 잃은 친구 복서와 노년을 같이 하며, 최고의 실력으로 키워낸 젊은선수마저도
보호만 하려다가 다른 매니저에게 빼앗기고 마는 프랭키는 극단적으로 자기에게
지도받기 원하는 매기를 여전한 두려움으로 거부하지만, 그보다 강한 '희망'이라는
본능에 져서 결국 최고의 복서로 키워내고 만다. 링 위에서의 매기는 살아있는 힘
그 자체이며, 프랭키의 보호 아래에서 완벽한 조율과 기술로 거침없는 완승을 기록한다.
더 좋은 조건의 매니저에게 갈 기회까지 단호히 거부하는 매기는 복서로서의 성공이나
돈보다 더 강한 그 무엇, 자신을 키워준 트레이너에 대한 신뢰를 넘어서
피로 맺어진 가족보다 강한, 신애(神愛)와 같은 부정(父情)을 지향하고 있다.
코뼈가 부러져가며 얻은 성공과 돈으로 시골의 가난한 어머니께 집 한채를
선물해드렸더니, 집을 사면 생활보조비를 못타게 된다고 외려 다그침을 당하는
매기는, 마지막 경기에서 척추뼈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전신불구가 되었을 때
딸의 경기 한 번 관람한 적 없는 무정한 어머니에게서 재산 양도 서약서에
싸인해달라는 부탁을 받고는 전신장애보다 더 처절한 아픔으로 혈육의 정을
부인하게 된다. 영화는 이 부분에서 나를 당겼다.
겉모양은 있으나 사랑이 해체된 가정, 절대적인 고독으로 남겨진 현대인들.
이 영화는 인간승리적인 권투영화가 아니다. 가장 치열하고 고독하게
희망이라는 대상과 싸우는 인생의 모델로 권투를 택한 것일 뿐,
시종일관 영화는 관객에게 질문한다. '너에겐 진정한 가족이 있느냐?
혈육을 넘어서 정신과 영혼으로 교감하는 진정한 사랑이 있느냐?
네 인생에는 진정한 희망이 있느냐?'라고. 그러나 매기는 죽음을 택한다.
어릴 적 집에서 키우던 개의 죽음과 친아버지의 죽음을 그리며 전신불구
상태에서 혀를 깨무는 자살을 두 번이나 시도한 후에, 자신이 원하던대로
프랭키의 손에 의해 안락사하게 된다.
'모쿠 슈라(나의 소중한, 나의 아기)'라는 마지막 말을 전해듣고 만족한 미소를
가득 머금은 매기의 얼굴에 가벼운 입맞춤을 한 후 산소 호흡기를 떼어낸 프랭키는
뚜벅뚜벅 어두운 복도를 지나 햇살과 바람만이 자욱한 문밖 어딘가로 향하여 간다.
아마도 그는 평소에 즐겨읽던 예이츠의 시 속 그 곳으로 떠나갔으리라.
이니스프리 ; 예이츠
나 일어나 이제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거기 욋가지 엮어 진흙 바른 작은 오두막을 짓고,
아홉 이랑 콩밭과 꿀벌통 하나 벌 윙윙대는 숲 속에 나 혼자 살으리.
거기서 얼마쯤 평화를 맛보리. 평화는 천천히 내리는 것.
아침의 베일로부터 귀뚜라미 우는 곳에 이르기까지.
한밤엔 온통 반짝이는 빛
한낮엔 보라빛 환한 기색
저녁엔 홍방울새의 날개 소리 가득한 그 곳.
나 일어나 이제 가리, 밤이나 낮이나
호숫가에 철썩이는 낮은 물결 소리 들리나니
한길 위에 서 있을 때나 회색 보도 위에 서 있을 때면
내 마음 깊숙이 그 물결 소리 들리네.
이 영화는 다소 나를 거북하게 했고, 착잡하게 했다.
너에게 진정한 가족이 있느냐?라고 물으면,
그렇다고 자신있게 나설 사람이 누가 있으랴.
프랭키의 고통처럼, 예이츠의 고독처럼이 생의 모든 이들이 그 형벌을
이미 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 것이 과연 우리를 절망으로 그치게
할만한 이유일까? 생의 모든 아픔을 통하여서 어떤 이는 절망을 택하고,
어떤 이는 사랑을 택하고, 어떤 이는 더 큰 아픔 속의 신을 만난다.
때때로 나 또한 꿈을 꾼다. 매기의 친아버지와 개가 묻힌 그 곳에 함께
묻히기를 바라는 꿈을...그러나, 내 생은 내 아픔은 아직 견딜만하며
내가 알 수 없는 무언가 더 이뤄져야 할 것이 남았음을 알기에
그저 더 기다린다. 욕심도, 집착도, 부질없는 희망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이기에 그저 누리며 기다릴만 하다고 매기와 프랭키,
그리고 예이츠에게 외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