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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갖추어야 할 믿음의 기본(1)

Joyfule 2017. 3. 20. 21:49

 

 

 

 반드시 갖추어야 할 믿음의 기본(1)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시 26:1-4)

 

시편 26편은 다윗이 저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접하는 순간 첫 구절부터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듭니다. 그는 완전함에 행했으며 요동치 않고 여호와만 의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더러 감히 자기를 판단해보라고 합니다. 이어지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진리 중에 행했으며 허망한 사람 같지 아니하고 간사한 자와는 상대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얼마나 완전하면 이런 자신감(?)이 생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세상 속에 섞여서 신자 표시가 나기는커녕 불신자들과 거의 동일하게 세속적 방식으로 살고 있는 저희와 너무 대조적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주일에 교회 출석하는 것과 식사 때 기도하는 것 외에는 다른 이가 우리에게서 신자라는 표시를 발견하기 힘들지 않습니까? 거기다 우리 믿음은 사람들 앞에는 물론, 하나님 앞에 꺼내놓기가 더 부끄럽습니다. 믿음이란 사람들 관계에 앞서 그분과 온전한 관계를 이루는 것이지 않습니까? 현실에서 조금만 힘든 일이 생기면 우린 그저 요동치기 바쁩니다. 하나님의 전능함과 신실함에 대해 의심이 솟구치며 나중에는 불만과 불신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몇 번이고 읽으면 단순히 그런 뜻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2절)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정말로 완전하다고 확신했다면 구태여 그런 요구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다”(3절)고 했으니 주의 인자를 구한 것입니다. 인자란 잘못과 허물을 용서해주는 것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다윗이 자신의 도덕적 종교적 완전함을 하나님 앞에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인간이 완전할 수 있습니까? 단 한 명도 그럴 수 없습니다. ‘완전(完全, perfect)'이란 오직 하나님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용어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무리 위대한 신앙위인이라 해도 완전하다고 여겨지면 일단 오류라고 판단해야 합니다.

 

또 첫 구절의 “완전함”이라는 표현은 엄밀히 말해 번역 상의 오류입니다. 원어의 뜻은 ‘무죄함’ 또는 ‘성실함’입니다. 거기다 다윗은 “나의 완전함”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스스로 판단해볼 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간사한 자와 동행도 않고,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했다”(5절)던 것입니다.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6절)도 완전 무죄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이 정결례를 통해 영적으로 순결해진 후에 하나님께 나아가듯이 자신도 지금 그렇게 한다는 뜻입니다. 순진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뵙기를 소원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디까지나 자신의 무죄함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2절)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스스로는 죄악과 악인에게서 멀어지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혹시라도 그렇지 못한 측면이 있다면 하나님이 판단해서 자기를 연단해서라도 거룩하게 고쳐 달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단하지 않습니까? 스스로 거룩해지려 최선을 다했고 또 실제로 자신이 판단해보아도 무죄한 것 같다고 말하니 말입니다. 그의 말에 영적 교만이, 최대한 양보하여 종교적 자부심이 알게 모르게 내포되어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영적 차원과는 현격히 다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근거를 본문 안에서 찾자면, 성경은 반드시 성경으로 해석해야 하므로, 오직 하나입니다. 바로 “여호와를 의지하여 요동치 않았기”(1절) 때문입니다. 또 다시 힘이 빠지는 까닭은 우리는 여호와를 최대한 의지해도 수시로 요동하며, 그와 동시에 주위 환경과 일어난 일들로 요동하니까 여호와를 온전히 의지하지도 못하지 않습니까?

 

그럼 물어봅시다. 다윗에게 정말 영적으로 요동치는 상태가 전무했을까요? 아닙니다. 그가 지은 시편들을 보십시오. 그만큼 현재 상황에 불안해져 하나님마저 의심한 자도 없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 대표적으로 한 구절만 들었지만 그는 우리와 성정이 똑 같은, 다른 말로 절대 완전한 것과는 거리가 먼 인간으로써 걱정과 염려에 자주 사로 잡혔습니다.

 

“요동치 않는다.”는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우선 본문에선 “넘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히브리 원어가 능동형으로 사용될 때는 미끄러지는 것을, 사역형으로 사용될 때는 흔든다는 것을 뜻합니다. 본문에선 능동형이기에 흔들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미끄러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완전히 쓰러져 넘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었던 근거는 물론 하나님만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원어의 뜻을 몰라도 다시 강조하지만 “전혀 요동치 않는 완전함”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불가능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 자체에도 동일한 의미가 적용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분을 믿는 세기와 열성과 정성에선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끝까지 붙들고서 놓은 적은 없어야 합니다. 내 믿음의 상태에선 요동함이 있을 수 있으나, 그분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에서만큼은 요동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자신의 궁극적, 절대적, 완전한 피난처라는 것입니다. 그분 외에 세상의 어떤 사람도 사물도 자신의 궁극적, 절대적, 완전한 피난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항상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 믿음이 지향해야 할 완전함이 의미가 들어났습니다. 주위 사람과 여건이 자신의 믿음을 아무리 흔들지라도 그래서 계속해서 불안과 초조가 엄습할지라도 하나님 그분만은 끝까지 놓지 않는 것입니다. 이야말로 신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 조건 아닙니까? 가장 기본이라는 것은 그것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고 출발도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완전함은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그 기본만 제대로 지키면 완전함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신자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피난처라고 하니까 혹시라도 모든 세속적 수단과 자신의 능력을 다 동원해보고 그래도 안 되기에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 중 대다수는 거의 매번 그렇게 하지만, 다윗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곧바로 처음부터 그분만 붙들었습니다. 살펴본 대로 하나님께 의심과 불만을 그만큼 솔직하게 토로한 자도 없습니다. 역으로 말해 그는 처음부터 오직 그분만 바라보았기에 “왜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느냐”는 의심과 불만을 감히 토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두에서 “완전함”은 “성실함”이라고 했습니다. 성실함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다가 어쩔 수 없어지자 그분을 찾았다면 스스로 부끄러워서라도 “나의 완전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그분만이 “온전한 피난처” 되심은 신자라면 누구라도 확신하는 진리입니다. 반면에 “처음부터 끝까지” 그 진리를 붙들고서 절대로 놓지 않는, 자신의 감정 상태의 오르고 내림과 무관하게, 신자는 아주 드뭅니다.

 

무엇보다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이 시편에서 다윗은 현실의 어려움에서 도피할 곳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죄악에서 멀리하여 자신의 완전함을 지키는 일의 도피처로 찾았습니다.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9절), 대신에 자신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8절)하겠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단지 현실의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능력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신자로서의 완전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더욱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만이 자신을 죄와 악인으로부터 건져주실 수 있음을 온전히 믿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자신이 죄의 유혹에 흔들릴 수는 있어도 완전히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마도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 이후에 지은 시일 것입니다.)

 

다른 말로 “신자가 죄에 흔들릴 수는 있어도 완전히 넘어지는 것을 하나님 그분께서 신자보다 더욱 바라지 않고 또 절대로 그렇게 방관 허용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믿고 놓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에게 자신의 완전함을 판단해달라는 것도 자신의 도덕적 종교적 완전함만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자기가 바로 이 진리를 제대로 믿고 붙들고 있는지부터 판단해 달라는 것입니다. 혹시 그렇지 못한 점이 있다면 다시금 단련해서 그 진리를 붙듦으로써 “여호와가 주시는 평탄 가운데 설 수 있게”(12절) 해달라는 것입니다.

 

서두에 설명한 우리의 영적 상태와 다시 비교해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이유, 또 그분을 의지하는 근본 자세, 나아가 우리가 자기 믿음을 판단하고 강하게 하려는 방향, 등등 모두가 너무나 어긋나 있지 않습니까? 우리 믿음이 하나님이 보시는 완전함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다윗처럼 나의 완전함을 판단해달라는 요구도 아예 할 수 없음이 무슨 연유인지 이제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껏 너무나 부끄럽게도 내 쪽의 의지와 열성을 높이면 믿음이 좋고 강해지고, 또 그러면 하나님이 나의 현실적 고통을 해결해 주신다는 정도로 밖에 이해 적용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최소한 내가 하나님이 바라시는 선을 행하면 은밀히 갚아주실 것이라는 차원까지도 가지 못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바꾸는 일에서 너무나도 성실하십니다. 나머지 모든 일들은 즉, 우리가 보고 겪는 현실적 사건과 환경은 그분의 그런 성실함의 발로입니다. 요컨대 우리가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분의 손을 놓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의미가 지금부터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고난에서 건지시는 “전능함”을 놓지 않는 것에서, 당신께서 계획해 놓은 영광의 자리에까지 우리를 당신께서 반드시 이르게 하고야 마시는 그분의 “성실함”을 바라는 것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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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나의 완전함에 행하고 요동치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도덕적 무결점을 자랑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언제 어디서 어떤 형편에 있어도 오직 궁극적인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만 끝까지 붙들며 그분 앞에 겸손히 엎드린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성실함보다는 당신께서 계획하신 영광의 자리에까지 자기를 반드시 이끌어주실 그분의 성실함을 바라본 것이었습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지녀야 할 믿음의 가장 기본입니다.

 

그리고 그의 엎드림은 현실의 어려움에서 구출해달라고 하나님께 긴급조난신호를 보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세상 죄를 멀리하고 악인과 동행치 않기 위해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최선을 다해 무죄함을 추구하지만 알게 모르게 잘못이 있으면 주님의 인자로 덮어서 자기를 거룩하게 바꿔달라는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구하는 믿음의 본질은 바로 그분의 신실하신 인자를 구하는 것이 됩니다. 인자란 하나님의 당신 백성을 향한 긍휼과 자비입니다. 당신의 자녀로 삼은 언약관계를 바탕으로 신자들의 허물과 죄를 사해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죄를 일일이 벌주지 않으시고 은혜로 인내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가 없으면 모든 인간은,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단 한 시도 생존조차 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치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 103:8-11)

 

문제는 그 자비를 아무 조건 없이 무제한으로 용서해주는 사랑이라고 너무나 단순하고도 쉽게 이해하는 신자가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온갖 잘못을 저지르고도 하나님께 용서만 구해주면 언제든 용서해주신다고 철석같이 믿습니다. 하나님을 마치 신자가 어지러이 더럽힌 곳을 뒤치다꺼리 해주는 한량없이 마음씨 좋은 청소부 할아버지처럼 여깁니다.

 

물론 하나님의 인자는 우리가 계측은커녕 아예 상상도 못할 정도로 너무나 풍성하고 광대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마냥 더럽히고 하나님은 마냥 청소만 하는 것으로 일생을 마치면 그분이 우리를 향해 계획하신 영광의 자리는 대체 언제 가보겠습니까? 아니 그런 자리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 아닙니까? 평생토록 신자가 유일하게 잘한 일이 수시로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 것뿐이라면 너무나 부끄러운 구원이 될 것 아닙니까?

 

은혜의 십자가 복음을 도외시하고 도덕주의(moralism)나 율법주의(legalism)로 돌아가자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더 거할 수 없다”(롬6:1)고 설파했습니다.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가 참 은혜가 되게 하기위해서, 하나님의 인자가 진정한 인자로 우리에게 적용되기 위해선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그 안에 더 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개신교 신자들은 하나님의 용서, 인자, 은혜, 긍휼, 자비, 사랑 등을 죄와 그 죄책에 대조되는 개념으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인자를 죄에서 가장 손쉽게 탈출, 도피, 외면, 세탁할 수 있는 수단으로 악용(?)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인자만 믿고 마음 턱 놓고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의도적 악의적으로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 이미 들어왔으니 복음의 만병통치적(?)인 효능만 붙들고 죄에 대해 오히려 더 무감각해지는 성향이 다분히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작금 십자가 복음이 너무 싸구려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죄에서 건짐을 받고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 이미 확보된 것에는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모든 관심이 예수 믿은 것에 따르는 보상과 이득을 얻는 것으로 옮겨지며, 그러기 위해 성실히 기도, 봉사, 헌금하며 교회에 충성합니다.

 

또 그러다 보니 스스로 생각해도 많이 경건해진 양 착각합니다. 교회 밖에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위선자라는 비난을 듣고 있음에도 교회 안에만 들어오면 그런 비난은 금방 싹 잊어버립니다. 교회와 목사에게 충성하는 종교적 열성으로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진정한 경건이 있어야 할 자리에 대체해버립니다.

 

정작 인자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진리에 대비해야만 합니다. 진리에 어긋났기에 죄가 되는 것이기에, 인자에는 반드시 진리로 돌아가게 만드는 방향성을 내포합니다. 신자는 단순히 잘못의 용서만 구해선 안 됩니다. 무엇이, 왜, 어째서 잘못인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 잘못의 결과는 무엇이며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탐구하고 그 길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요컨대 진리를 따를 의사가 없으면서, 심지어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인자만 구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잘못했으면 부모는 벌을 주기에 앞서 어떤 일부터 합니까? 아이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으며, 왜 그것이 잘못이 되는지, 또 그 결과로 남들과 주변에 어떤 나쁜 영향을 끼치는지, 특별히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아이 본인의 육신과 마음에도 좋지 않은 흔적을 남기게 된다는 것 등을,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알기 쉽게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는 뜻도 다음에 동일한 잘못을 범하지 말라는 것 아닙니까? 나아가 그런 가르침을 통해 유사한 경우에는 부모에게 배운 것을 적용하게 하고, 전혀 생소한 사건이 닥쳐도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지 스스로 터득하게 하려는 것 아닙니까?

 

말하자면 신자가 인자만 구하고 진리를 외면하면 이런 어린아이 수준의 반성과 깨우침과 고침마저 전혀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젖먹이로 사리분별이 전혀 안 되고 말도 못할 때는 기저귀에 똥을 하루에 수십 번 싸도 엄마는 싫은 내색 하나 없이 깨끗이 갈아줍니다. 아장아장 걸으면서 겨우 한두 마디 말을 할 때까지도 어떤 실수를 해도 그저 귀엽고 용서가 됩니다. 신자가 잘못의 용서만 구하면 이런 유아 상태로 평생을 마치겠다는 뜻입니다.

 

참된 회개는 진리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에 그 진리에 비추어 이런 저런 점들이 잘못되었다고 구체적으로 실토하는 것입니다. 진리와 견주어 무엇이 어긋났으며, 그 어긋난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성경에 계시해 놓은 절대적 계명입니다. 구약성경의 십계명과 율법에선 그림자로 계시되었다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으로 정확히 풀어서 완성해주신 바로 그 길입니다. 제사장 나라답게, 천국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율법으로는 죄의 깨달음만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율법이 구원을 얻는 수단 통로는 아니지만, 무엇이 죄인 줄 깨닫게 하는 기능과 역할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이후에도 율법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를 이뤄야 합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바뀌고 무용화 된 것까지 문자적으로 지킬 필요는 당연히 없지만, 그런 규정 가운데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 숙지하여 현재의 삶에 맞도록 적용해야 합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기준과 관점에서 행해야 합니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이라면 필연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을 것과 똑같은 방식대로 우리 또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 중에 진리대로 완벽히 행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고서 또 그 준행을 소망하는 자는 진리에 가까이 갈수 있지만, 진리를 모르고 그런 소망조차 없는 자는 평생을 가도 그러지 못합니다. 구원 이후의 인생에서마저 “갈 지(之) 자(字)” 행보만 합니다. 갈지자 행보는 불신자 시절로 충분합니다.

 

신자는 살아가는 향방이 분명해졌고 인생의 목표점도 정해져 있습니다. 그 눈앞에 분명한 푯대가 잇습니다. 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씩 뚜벅뚜벅 걸어가야 합니다. 푯대를 보고 그 방향대로 일직선으로 성실하게 걸어가면 넘어져도 금방 정상 궤도에 오릅니다. 그러나 푯대도 방향도 없이는 아무리 더 빨리 더 열심히 걸어도 진전이 없으며 제 자리를 빙빙 돌거나 심하면 뒤로 후퇴할 뿐입니다.

 

진리를 따라가다가 인간적 연약함으로 넘어지더라도 실망 좌절 낙담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여전히 진리로 돌이켜 주시려는 하나님의 인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실패와 잘못을 정확하게 하나님께 아뢰면 그분의 인자는 곧바로 신자에게 부어집니다. 거기다 신자에게 계속해서 따라갈 수 있는 힘까지 하나님이 공급해주십니다.

 

십자가 복음은 죄책에서의 해방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핵심이긴 하지만 한쪽 단면만 본 것입니다. 복음이 “구원 따로, 성화 따로”의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기에 그분을 알고 믿는 순간 성화도 필연적으로 시작되고 되어야 합니다. 요컨대 진리를 알아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단순히 믿기만 하면 구원은 확보되었고 성화는 어차피 천국에서 완성될 것이니까 이 땅에선 성화에 실패해도, 아니 시작마저 안 해도 된다는 식은 아닙니다.

 

물론 대부분의 신자가 성화를 시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껏 어질렀다가 하나님더러 청소하라고 요구하는 것으론 성화가 결코 이뤄지지 않으며 온전한 인자도 부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갓난아기를 졸졸 뒤따라 다니는 엄마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구원만 주고 성화는 안 해도 다 받아주는, 다른 말로 결코 손해 볼 장사를 하는 분도 아닙니다. 성화에 무관심한 신자는 강권적인 연단이, 불행하게도 주로 현실적 고난의 모습이지만, 기다립니다.

 

성화에 게으르거나 그저 용서만 구하는 것은 내가 어떤 은혜로 구원 받았는지 잊고 있는, 엄밀히 말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진리 밖에 있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자 건져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입니다. 사형수를 조건 없이 사면해주었는데도 은혜를 갚기는커녕 완전히 안면을 바꾸는 몰염치한, 인간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자입니다. 복음이 작금 너무 값싸게 전해짐으로 교회 안에 인간도 아닌 자들만 양산했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