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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짇고리 - 김정자

Joyfule 2013. 10. 17. 08:49

 

 

  반짇고리 - 김정자 

  나란히 놓인 반짇고리 두 개가 정답다. 그 중 하나의 뚜껑을 열었다.
맨 위 칸엔 어머니께서 쓰시던 투박하게 생긴 돋보기, 아버님 어머님의 젊은 시절 함께 찍은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과 손자들 삼 남매의 어린 시절 사진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어머니의 첫 번째 반짇고리는 시집올 때 혼수품으로 가져오신 것이었다. 종이를 여러 번 발라 만든, 지함(紙函)으로 된 정사각형 상자이다. 겉에는 색종이로 꽃과 새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네 면에는 각각 수복강녕(壽福康寧)과 지장첩화(紙粧貼花)라고 쓰여 있었다. 안팎으로 색종이를 붙인 다음 기름을 먹여 만든 정성이 가득 담긴 반짇고리. 몇 개의 칸막이 중 아주 작은 칸은 가죽과 헝겊으로 만든 골무, 그리고 직사각형으로 된 칸에는 돋보기와 바늘꽂이가, 커다란 네모공간에는 여러 색깔의 옷감 조각들, 가위, 칼, 인두, 줄을 치는 헤라, 단추곽 심지어 줄자까지 바느질에 필요한 것들이 빼곡히 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실을 풀어 큰 바늘에 꿰실 때면 돋보기를 꺼내 쓰시고 한 땀 뜨기 전에 아버님과 다정하게 찍은 해인사의 흑백사진을 들여다보신다. 그럴 때면 눈가에 이슬이 맺히곤 하셨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는 엄하셨지만, 나에게만은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었다. 부부싸움을 해도 늘 내 손을 들어주시곤 하시던 어머니시다.

 내가 새댁 시절 가끔 이불 홑청을 시칠 때면 혹여 굵은 바늘에 손가락을 찔리기라도 할까 봐 “너는 보기만 하고 재미있는 얘기나 해 주렴”
하시며 직접 꿰며 주곤 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장 담그기, 김장, 메주 쑤는 일 등, 온갖 가정의 중요한 일들은 모두 해주셔 힘든 줄을 모르고 살았다.

 나무로 된 검정 실패에 실을 감을 때면 실타래를 나의 양손아귀에 걸쳐주고 어머니는 실패에 실을 감기 시작한다. 이쪽저쪽 양쪽 손을 공중에서 춤을 추듯 손놀림을 하며 실 감기를 할 때는 나의 손이 잘 안 보일 정도로 민첩했다. 그럴 땐 꼭 친정어머니처럼 느껴져 뿌듯한 행복감에 젖기도 했었다. 한 타래를 다 감을 동안 어머니는 연방 손자들 자랑으로 미소를 지으시며 누가 낳았는지 명물들을 낳았다고 은근히 나의 기를 살려주시곤 했는데…….  내가 하는 일이 어찌 그리 마음에 드시기만 했을까만. 그것은 어머니가 주시는 애정이 자식에 대한 조건 없는 내리사랑임을 알았을 때에는 어머니께서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았다.

 거의 30여 년을 쓰신 반짇고리는 군데군데 오려붙인 꽃 모양의 색종이들이 떨어지고 낡아서 보기가 좋지 않았다. 내 혼수품인 반짇고리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새것으로 바꾸고 싶었다. 어머니 반짇고리를 사드린다는 핑계로 고급 수예점으로 가서 똑같은 모양을 한 지금의 반짇고리를 산 것이다.

 당신께서 옆에 두고 쓰시던 투박한 안경을 비롯한 자질구레한 모든 것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넣어두셨다. 그 반짇고리를 마주하고 앉으면 꼭 어머니 앞에 앉아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한쪽은 주황색 한쪽은 검은색 가죽에 주황색 색실로 곱게도 기운 골무가 보인다.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그 골무를 끼우고 어머니의 체취가 남아 있을까 싶어 코끝에 대어본다. 그리고 어머니처럼 흉내도 내어보고 돋보기도 써본다. 어느새 내 눈에 맞는 돋보기가 되어 있으니 세월은 그렇게 흘렀나 보다.

 어머니의 손때 묻은 실패의 실 한 가닥을 쥐고는 때굴때굴 굴려 본다. ‘달그락 달그락’ 그때 들었던 그 소리 그대로 내 귓가에 머문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어머니의 손때 묻은 반짇고리는 그대로인데 다정했던 어머니의 미소는 대할 길이 없다.

  젊은 시절 두 분은 독실한 불교 신자여서 유명 사찰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하시곤 했다. 어머니는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어김없이 새벽에 일어나 정갈하게 분세수를 하시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단아한 모습으로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셨다. 그것은 오로지 자손들을 위해 정성을 다하며 기도하는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다.

 어머니는 여든넷에 세상을 떠나셨다. 세상을 뜨시던 날 어머니의 손끝에서 성장한 손(孫) 삼 남매가 주체할 수 없는 눈물로 몸부림쳤다. 그 애들이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잃어버린 슬픔을 진실로 애달파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문상객들도 덩달아 눈물을 훔치는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나는 손자들에게 어머니처럼 다정하고 자애로운 할머니였는가도 돌아본다.  또한 어떤 추억의 할머니로 비칠 것인가를 생각하니 깊은 회한이 밀려온다.
 어머니의 반짇고리를 다시금 매만진다. 저 세상에서 어머니를 다시 만난다면 무슨 염치로 고개를 들까. 어머니처럼 손자들을 지극하게 사랑을 주지 못하고 살아온 나에게 살아계실 때처럼, 잘했다고 칭찬해 주시려는지 궁금하다. 오늘따라 어머님의 따뜻하고 다정했던 목소리가 그립다.

 

수필가. 청주출신. 한국수필로 등단. 수필집 '세월 속에 묻은 향기'